[김희주의 10 Voice] 난 사는 게 어려울 땐 야구를 봐
[김희주의 10 Voice] 난 사는 게 어려울 땐 야구를 봐
“이 상황에서는 임찬규 선수를 놔둘 수밖에 없습니다. 바꾸면 이 선수가 더 위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상관없이 임찬규 선수가 던지게 해야 합니다.” 지난 17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SK-LG 전 중계 중 해설자가 한 말이다. LG가 4대 1로 앞선 9회 초 원 아웃 상황에 LG 마무리 투수 임찬규가 등판했다. 첫 타자를 볼넷으로 내 보낸 그는 두 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 놓은 상황에서 세 번째 타자에게 안타를 맞아 1,2루를 채운 뒤, 다음 타자를 또 볼넷으로 내보내 만루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세 타자를 연속해서 볼넷으로 내보내 밀어내기로 3점을 헌납. 결국 임찬규는 4대 4 동점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모자를 벗은 그는 이마를 한 번 쓸고 고개를 숙인 채 덕 아웃으로 돌아왔다.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겁 없이 한 가운데로 공을 꽂아 넣으며,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그 임찬규가.

이것이 최근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일명 ‘6.17 임찬규 사태’다. 108개의 실밥으로 묶인 야구공은 둥글고, 경기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던 건 분명하다. 이를 보면서, 역시 최근 화제인 책 의 이 문장이 떠올랐다. “포볼을 내주고 싶어 하는 투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은 아픈 친구를 대신해 야구부 매니저가 된 평범한 여고생 미나미가 역시 평범한 공립학교인 호도고의 야구부를 ‘코시엔 대회(코시엔 구장에서 매년 봄, 여름에 열리는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진출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우연히 읽게 된 피터 드러커의 경영지침서 를 야구부 혁신에 적용시키는 내용의 소설이다.

‘실패에서 배우는 서사’가 있는 경기
[김희주의 10 Voice] 난 사는 게 어려울 땐 야구를 봐
[김희주의 10 Voice] 난 사는 게 어려울 땐 야구를 봐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3권을 제치고 2010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모시도라(모시-만약, 도라-드러커) 신드롬’을 낳을 정도로 화제였다. NHK에서 애니매이션으로 방송되었고,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평범한 여고생이 매니저를 맡은 평범한 고교 야구부,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이자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 언뜻 보기에 어색한 이 조합을 무겁지 않고 흥미롭게 엮어 낸 은 ‘매니지먼트’가 ‘야구’에 접목되었다는 이유로 일부에서는 경영 지침서나 자기 계발서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청춘들의 성장 이야기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 H2 >가 그렇듯이. 그리고 본질적으로 야구가 그렇듯이.

야구를 보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라, 일본이 특히 그렇지만 야구를 다룬 소설이나 만화, 영화는 참 많다. 일본이 야구가 국기인 나라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는 많은 스포츠 중에서도 특히 야구공은 서사를 싣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유명한 말을 비롯하여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패배하면 많이 배울 수 있다”, “마지막 쓰리 아웃을 잡기 전엔 야구는 끝나지 않습니다.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 드리지요” 같은 야구에 관한 문장들은 그대로 삶에 적용되는 격언이다. 무엇보다도, 야구는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10번 중 7번은 실패하고, 아무리 비범한 투수라도 제 머리 위를 무심하게 날아가 관중석에 꽂히는 공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실패에서 배우는 서사’가 있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의 고교야구부가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 역시 그렇다. 비딱하고 불성실한 에이스 투수 게이치로가 연속 포볼로 밀어내기로만 7점을 내줘 콜드 패한 뒤, 포수 지로는 “저는 이제 게이치로가 던지는 공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유격수의 실책에 화가 난 게이치로가 일부러 포볼을 내줘 야구를 모독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 때 감독이 외친다. “그런 투수는 없어! 포볼을 내주고 싶어 하는 투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 말을 들은 게이치로는 어깨를 떨며 흐느껴 운다. LG의 박종훈 감독은 ‘6.17 임찬규 사태’에 대해 “실패하더라도 잘못을 알게 될 것이라고 봤다. 실패를 통해 성장해 더 좋은 투수가 되면 성공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공놀이’
[김희주의 10 Voice] 난 사는 게 어려울 땐 야구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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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지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노스케의 성장을 믿고 계속 기용하는 게 매니지먼트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의 미나미는 코시엔 진출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잦은 실책을 저지르는 유격수의 선발 출장을 주장한다. 야구가 혼자서 할 수 없는 경기이듯, 사람이 사회에 속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어렵다. 나의 실수나 실패가 개인의 것으로 끝나지 않고, 동료와 조직에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지난 17일 LG가 SK에게 결국 역전패를 당했듯이. 하지만 19일, 다시 마운드에 오른 임찬규는 비롯 볼넷 하나를 내줬지만 2/3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 어떤 투수도 모든 공을 스크라이크 존에만 꽂아 넣을 수는 없다. 그 어떤 사람도 늘 올바르거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실패하거나 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고개 숙인 어린 투수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료와 선배가 있는 것이다. < H2 >의 명대사처럼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는 것”이고 “연전연승으로 죽을 때까지 웃기만 하는 그런 인생”은 없다. 인생이 어렵다고 느껴지면 야구를 보자. 의외의 해답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해도 좋다. 때로는 뒷목을 잡게도 하지만, 분명한 건 어쨌거나 재미있는 ‘공놀이’니까.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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