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나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의 영화
김혜수│나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의 영화
배우와 여배우란 단어는 단순히 연기를 업으로 삼은 이들의 성별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배우라는 말은 그 자체로 다층적이다. 선망의 대상,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은 화려함 그리고 그 이면에 가려진 비극까지.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에 대해 조망 받을 만큼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리고 김혜수는 그 자리에 완벽하게 부합된다. 마치 여배우라는 단어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어느 곳에서든 단번에 시선을 모으는 글래머러스함과 자신 있고 당당한 애티튜드는 여배우로서 김혜수의 아우라를 설명할 때 익숙하게 동원되는 수식어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배우라는 이름을 공허하게 만들지 않는 직업인의 내공은 그녀를 단단하게 만든다.

하이틴 스타로 데뷔한 이래 김혜수의 필모그래피는 스타에서 배우로 넘어가는 굴곡을 그대로 품고 있다. 의 순수한 소녀에서 같은 로맨스물을 지나 연기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와 을 거치면 캐릭터와 배우 사이의 이물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단계의 , 가 등장한다. 그리고 최근 개봉한 으로 김혜수는 배우로서 가장 충만한 시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던 한석규과 함께 고수들만이 가능한 연기의 합을 보여준다. “문제는 캐릭터의 디테일이었어요. 일상적인 디테일에 무엇도 개입시키지 않고, 코미디라는 장르도 의식하지 않은 채로 매순간 그저 연주 자체에만 집중하자고 마음 먹었지만, 디테일이 잡힐수록 그 디테일들을 제대로,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늘 함께 있었어요.” 이층에 세든 남자를 경계하면서도 은근히 끌리고, 수면제나 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만큼 예민하지만 옆 테이블의 아저씨들에게는 버럭 거릴 수 있는 연주는 김혜수에 의해 가련하면서도 웃기고,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비밀스러운 상처를 지닌 여인이 되었다. 24년차 여배우 김혜수를 사로잡은 영화들 역시 여배우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 극대화된 작품들이다. 그 여자들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청춘의 영화”를 만나고, “사랑의 열정과 광기”에 대해 알게 된 김혜수가 들려주는 영화들이다.
김혜수│나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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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7.2 Le Matin)
1986년 | 장-자크 베넥스
“는 대학 시절에 보고 한눈에 마음을 빼앗겼던 영화예요. 베티 그 자체 였던 베아트리체 달 뿐만 아니라 영상, 음악 모두 인상적이었어요. ‘사랑도 답이 되지 못할 때가 있구나’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꼈죠.”

광기 어린 연인 조르그(장-위그 앙글라드)와 베티(베아트리체 달)의 비뚤어진 사랑은 198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이 가졌던 불안감의 다른 이름이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68혁명에 대한 콤플렉스와 부채감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남은 것은 사랑으로의 도피뿐이었다. 장 자크 베넥스 감독은 그 정서를 베티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와 푸른 안개가 지배하는 영상으로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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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volutionary Road)
2008년 | 샘 멘데스
“원작의 섬세함이나 그 디테일을 빼어나게 옮긴 연출력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까지, 모든 것에 매료됐어요. 무엇을 소재로 해서 어떻게 보여주느냐 보다, 무엇을 왜 얼마나 심도 있게 표현하느냐에 집중한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케이트 윈슬렛은 최근 가장 매료되어있는 배우 중 한 명이에요.”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윈슬렛은 마지막 꿈마저 좌초된 자의 절망감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삶이 너무도 평범해서 견딜 수가 없는지? 내가 속한 곳을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보내왔는지? 영화에 임한 모든 이가 최고치를 끌어낸 에는 끔찍할 만큼 그런 나와 닮은 사람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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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Blue Velvet)
1986년 | 데이빗 린치
“악마적이고 관능적인 질감이 살아 움직이던 이 영화는 대학시절 컬트에 빠져있던 절 완벽하게 사로잡았죠. (웃음) 바비 빈튼의 ‘Blue Velvet’도 좋았고, 로이 오비슨의 ‘In Dreams’를 립싱크 하던 장면을 무척 좋아해요. 무대 위의 매혹적인 그녀, 이사벨라 롯셀리니!”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의 세계는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보다 그저 보고 느끼고 동화되는 것은 특히 그의 초기작들을 볼 때 유효하다. 역시 , 등과 마찬가지로 보는 이들의 명료한 이해를 돕진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엇갈리고 폭력적인 욕망은 그저 가장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전시되어 관객들을 짓누른다. 그리고 그 감각은 오랫동안 강하게 남는다.
김혜수│나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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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La Mome)
2007년 | 올리비에 다한
“개인적으로 흠모하는 에디트 피아프의 일생을 그린 영화예요. 에디트 피아프를 연기한 마리온 꼬띨라르의 탁월함에 압도되었죠. 그녀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던 바로 그 장면의 처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어요.”

종종 살아온 인생 자체가 작품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그랬다.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연명하던 그녀가 최고의 가수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의 비극까지 는 ‘장밋빛 인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한 여자의 인생을 들려준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에디트 피아프를 살려낸 마리온 꼬띨라르에게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이 수여되었다.
김혜수│나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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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e Hours)
2002년 | 스티븐 달드리
“는 여배우 인생의 텍스트로 삼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 영화예요. 메릴 스트립, 줄리안 무어, 니콜 키드먼까지… 명징하게 뛰어나고 아름다운 그녀들이죠.”

여기 세 명의 댈러웨이 부인들이 있다. 을 쓰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작품에 빠져 사는 주부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을 별명으로 가진 출판 편집자. 을 매개로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되어 있는 여자들은 놀랄 만큼 닮았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 은밀하게 감춰둔 상처들에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다는 것이. 그녀들이 상처를 극복하거나 점령당해가는 모습은 나 자신의 일상 또한 되돌아보게 한다.
김혜수│나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의 영화
김혜수│나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의 영화
“매일 촬영하는데 물리적으로 힘든 상황이지만 솔직히 힘든지 모르겠어요. 어떨 땐 찍고 나면 심장이 너무 뛰어서 청심환을 먹어야 될 정도지만 기분은 괜찮아요. 연기하면서 정말 할 맛이 나라고 느끼는 건 배우한테 너무 좋은 거니까요.” 최근 김혜수는 드라마 을 통해 “연기하는 맛”을 다시금 느꼈다.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는 동시에 비밀을 감추고 있는 진서 역을 “다른 배우가 안 해준 게 고마울” 정도다. 수없이 많은 배역을 맡았고, 연기가 질릴 법도 한 세월을 거친 뒤에도 자신의 캐릭터가 소중할 수밖에 없는 그녀에게 여배우라는 호칭 말고 어울릴 무엇을 찾기는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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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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