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은 2000년대의 첫 10년의 마지막 해다. 그리고, 마치 이 기념비적인 해를 기념하듯 올 한해는 마치 태풍이 몰아치듯 수많은 사건이 벌어졌고, 그만큼이나 빠르게 트렌드가 변화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의 는 마치 세찬 풍랑을 뚫고 나가듯 혼란스러웠던 한 해를 헤쳐 나갔던 드라마에 대한 기록이다. 누군가는 ‘막장 드라마’를, 누군가는 엄청난 제작비의 대작을 만드는 사이 한국의 드라마 산업은 어떻게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작품들을 만들었는가. 의 기자와 평론가들이 진단했다. 그리고, 올 한해를 대표하는 10명의 인물과 10개의 이슈,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드러나지는 않았던 올해의 어떤 것들도 함께 정리했다.두 여자의 대결, 복수, 해당 방송사 최고의 시청률. 누군가는 이 세 가지 조건에서 SBS 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MBC 을 생각할 수도 있다. 지난 16일 AGB닐슨 미디어리서치에서 발표한 연간 시청률 순위에서 1,2위를 차지한 두 작품은 2009년 한국 드라마 산업의 현재를 보여준다. 은 최소한의 윤리적, 논리적 판단을 배제한 채 극단적인 자극에 집중했다. 스토리는 최소한의 개연성마저 잃었고, 캐릭터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복수를 위해 달려가는 욕망 덩어리였다. 반면 은 화랑의 액션이나 비담(김남길)같은 꽃미남들이라는 상업적인 요소도 많았지만, 드라마를 끌고 간 동력은 시대에 대한 고민이었다. 덕만과 미실은 직접적으로 ‘시대정신’에 대해 논했고, 귀족과 백성들 사이에 놓인 정치가들의 선택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은 이 시대의 정치현실을 은유했다. 시청자들은 비담의 활약에 환호하고, 미실과 덕만의 논쟁을 보며 시대의 올바른 선택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극중에서 던진 질문은 지금 한국 드라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대의’(大義)와 ‘이’(利)는 어떻게 부합될 수 있는가?”
좋은 드라마와 많이 본 드라마 사이의 거리 ‘좋은 드라마’라는 ‘대의’와 대중성이라는 ‘이’의 조화에 대한 고민. 의 기자들과 TV 평론가들이 참여한 ‘2009년 10 어워즈’의 결과는 그 고민의 해답에 부응하려 했던 작품들에 대한 격려다. “미실이 죽기 전과 후는 전혀 다른 드라마”(김교석)라는 아쉬움이 붙긴 했지만 은 대형 사극이 짊어져야 할 상업적 성공에 대한 부담 속에서 시대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냈고, MBC 은 “시청률, 연기력, 개연성, 웃음 감동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5툴 플레이어”(위근우)같은 완성도로 “2000년대 후기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 대한 섬세하고 유쾌한 통찰”(김선영)을 그려냈다. 물론 모든 작품이 이런 성취를 이뤄내기란 쉽지 않다. MBC 는 “드라마가 산업이기 이전에 대중 예술의 차원에 있음을 힘겹게 증명”(최지은)했지만 “높은 완성도를 가진 드라마가 비평적인 지지와 견고한 팬층을 가지고 있어도 시청률을 근거로 조기종영 될 수 있는 2009년의 현실”(윤이나)을 보여줬다. 투표 결과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변호사들의 이야기였던 KBS , 자본 권력에 의해 파멸된 개인의 복수극으로 시작해 ‘투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마무리를 보여준 KBS 처럼 권력에 맞서는 약하지만 용기 있는 개인들을 그려낸 작품들도 있었다. 그리고 MBC 은 지금 한국 드라마가 광화문을 막고 총격전을 할 만큼 크게 일을 벌이지 않아도, 여주인공끼리 머리를 붙잡고 싸우지 않아도 대중성과 작품성 양쪽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 고마운 증거다. “작은 가족 이야기 안에서 코미디와 멜로와 홈드라마를 경제와 계급을 현대 가족사 속에서 통합”(강명석)한 이 작품은 “세상의 이치를 잔인하게 직시하면서 그 전쟁 같은 일상을 이겨낼 힘”(백은하)을 줬다.
대중성과 이상을 조화시킬 창작자의 출현 ‘올해의 감독’ 부문에 김병욱 감독에게 쏟아진 찬사는 도, 도 도달하지 못한 드라마의 새로운 지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일 것이다. “삶에 대한 거시론적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시적인 재미 또한 탁월”(이지혜)한 이 감독은 “지금까지 이뤄낸 모든 성과의 핵심을 추려내”(강명석) 에서 시트콤의 한계를 뚫었고, “자신이 만든 세계를 완벽하게 장악”(최지은)하며 자신의 사상과 세계관을 작품에 관철시켰다. 물론 드라마가 감독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고독한 작가주의와 아집의 위태로운 경계에서도 한 층 더 깊어진 미장센”(김선영)을 보여준 MBC 의 황인뢰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에 대한 대중의 차가운 반응은 지금 드라마 산업 관계자들이 ‘시대의 드라마’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덕만이 미실의 현실정치를 배워 현실을 이상에 보다 가깝게 끌고 갔듯,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중성과 자신의 이상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재주꾼들일지도 모른다. 의 박지은 작가는 “재벌 2세와 아줌마와 불륜이라는 소재들을 모두 담으면서도 요즘 한국인의 인생을 바라볼 줄 아는 절묘한 무게중심”(강명석)과 “악역에게도 소명의 기회를 주는” (정석희) 따뜻함으로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가장 평화로운 만남을 성사”(윤희성)시켰고, 로맨틱 코미디와 민주주의를 행복하게 결합한 SBS 의 김은숙 작가는 “‘바보와 진심’의 귀환”(김선영)을 통해 준수한 시청률과 의미 양쪽을 잡았다. 그리고 순정만화 원작의 KBS 가 결국 ‘청춘 막장 드라마’가 되는 사이 “자기 스타일의 순정만화를 완성”(최지은)시켜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보여주는 가슴 설레는 판타지”(윤이나)를 완성한 SBS 의 홍미란-홍정은 작가는 드라마 작가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일 것이다.
막장, 대작이 아니라도 드라마에 희망은 있다 그러나 상업적인 것과 의미 있는 것, 혹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조화시키는 것은 창작자의 역량만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홍미란-홍정은 작가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어려운 인물을 소화해내는 능력이나 간간이 삽입되는 과장된 연기까지도 섭렵하는 유연함”(윤희성)을 가진 장근석이 없었다면 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지진희는 한국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이른바 ‘초식남’ 캐릭터를 “공감가고 정이 가는 괴짜”(위근우)로 소화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리고 ‘고미실’, 고현정은 때론 연기자가 작품을 통치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의 8할은 미실이었고, 미실이라는 캐릭터의 8할은 고현정”(윤이나)이라는 평이 과언이 아닐 만큼 “자의식과 테크닉의 완벽한 조화로 대본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줬다. 또한 고현정의 성취는 “중견으로 접어든 여배우들이 내달릴 수 있는 연기의 영토를 무한히 넓혀낸”(백은하)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한국 드라마 전체의 중요한 전진이다. 한 편의 드라마 전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배우들이 늘어날 때, 드라마는 대중의 단단한 지지와 함께 그들의 이상을 펼쳐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KBS 에서 드라마 감독 지오(현빈)는 ‘좋은 드라마’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을 비롯한 ‘‘2009년 10 어워즈’’가 선택한 2009년의 드라마들은 ‘대의’와 ‘이’의 공존을 통해, 또는 ‘맨땅에 헤딩’하는 정신으로 드라마 현실에 부딪혀 의미 있는 파열음들을 냈다. 그것은 지금 ‘막장 드라마’나 엄청난 스케일의 대작 드라마가 아니면 최소한의 시청률조차 보장할 수 없는 현실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만을 추구하다 괴물이 될 것인가, ‘대의’를 쫓다 지쳐 쓰러질 것인가, 둘 다 가질 수 있는 노력을 한 것인가. 드라마를 만들고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택의 시간이 오고 있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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