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인생의 나침반이 살짝 틀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방향 선회는 그 자신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돈 벌겠다며 가출해 서울 묵동의 한 가방 공장에서 월급 8만 5천원을 받으며 4개월 간 일하던 소년 김진민이 부산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던 86년의 어느 날을, ‘국어든 영어든 아무 거나’ 선생님이 되려던 입시생 김진민이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봐서” 대입 원서에 ‘신문방송학과’ 라고 적어 넣던 순간을, <인간시대>나 자연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며 MBC에 입사를 지원했던 신입사원 김진민이 “한 번도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안 해 봤고 특수한 사람들, 예술인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던” 드라마 국으로 진로를 바꾸던 연수 마지막 날의 결정에 대해.
입사 후 김종학, 황인뢰, 장수봉, 이승렬 등 들락이는 면면만으로도 대단했던 선배들 사이에서 그는 일단 “몸으로 안 뛰면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일에만 열심히 매달렸다. 문학도도 아니었고 ‘~이즘’을 자유자재로 입에 올리지도 않았지만 대학 시절의 연극반 활동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메카이던 연대 뒤 카페 ‘빵’에서 “문화적으로 흡수해야 할 모든 양분을 다 얻으며 일했던” 경험은 저도 모르는 사이 그의 문화적 감수성을 부쩍 키워놓은 뒤였다. “그 때 들은 음악, 그 때 본 영화 가지고 10년을 써먹”는 동안 그는 사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신돈>과 완성도 있는 느와르로 탄생한 <개와 늑대의 시간>, 드라마를 통한 문학적 실험과 공간의 역할을 극대화해 보여준 <달콤한 인생>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박’을 칠지 못 칠지는 몰라도 매번 기대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김진민 감독의 세계는 아직 1막에 불과하다.
“요즘은 백년 뒤에 누가 지금의 드라마를 찾아서 볼까 하는 고민을 한다. 이런 말 하면 ‘흥행도 못 해본 놈이 입만 살아서’라고 하겠지만. (웃음) 베토벤, 모차르트 시절에도 빵빵 터지는 유행가를 만드는 음악가들이 있었을 텐데 지금 남은 건 베토벤이다. 그러니까 이걸 한 부분이라도 예술로 생각하고 대중과 소통하려 한다면 최소한 우리는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이상의 고민을 해야 한다.” 백년, 십년은커녕 일 년, 혹은 다음 개편 때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 버린 시장에서 김진민 감독이 던지는 화두는 청량하면서도 육중한 무게로 뒤통수를 때린다.
美 <야망의 계절> (Rich Man, Poor Man) ABC
1976년
“어릴 때부터 서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모처럼 읽은 책도 하필 <레미제라블>과 <대지>일 정도로 그런 것들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이 있다. <야망의 계절>은 동유럽 출신의 가난한 미국 이민자 가족의 두 형제 이야기다. 나도 형이 있고 우리가 서로 많이 달랐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극 중에서 형은 공부를 잘 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동생은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면서 일찍부터 가족의 역사가 뒤틀리고 후대에는 그들의 자녀들까지 서로 얽히면서 운명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린 나이였음에도 ‘아, 이야기라는 건 저런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
美 <뿌리> (Roots) ABC
1977년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8부작 미니 시리즈다. 18세기 아프리카의 흑인 소년 쿤타 킨테가 노예 상인에게 잡혀 오면서 시작된 이후 대대로 그들의 자손이 겪은 수난을 그렸는데 최근 다시 보니 옛날 작품이라 모양새가 ‘후진’ 부분이 있음에도 굉장히 재미있고 뚜렷한 힘이 느껴졌다. 등장하는 흑인들의 이야기는 물론 백인들의 이야기도, 보고 있으면 ‘오, 저렇게 만들다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게 잘 쓴 작품,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가 갖는 힘인 것 같다.”
美 <남과 북> (North & South)
1985년
“미국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패트릭 스웨이지가 이 미니 시리즈로 스타가 됐다. 우리가 예전에 잘 몰랐던 역사 중 남북전쟁 당시 남부인들은 흑인을 무조건 학대하기만 했고, 북부인들은 모두 흑인을 도우려고 했다는 식의 인식이 있었는데 실제로 북부인들이 흑인을 보호하려 했던 이유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들과 정 반대되는 면도 있다. 그런 이면들을 보여 주면서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치정과 탐욕, 성욕이 아주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너무 노골적인 장면 때문에 고등학생 시절 보기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인간의 모습이 굉장히 솔직하게 표현된다는 생각을 했다.”
“<로드 넘버 원>은 품위 있는 드라마로 만들 거다”
김진민 감독은 요즘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내년 여름 방영 예정인 <로드 넘버 원>의 준비로 바쁘다. <로드 넘버 원>은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이야기이자 60년을 뛰어넘은 그들의 우정에 대한 드라마다. 이미 지난 8개월 동안 <천국의 계단>의 이장수 감독, <개와 늑대의 시간>을 함께 했던 한지훈 작가와 대본 및 기초 작업에 매달려 왔지만 한국 전쟁 당시의 온갖 자료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부담은 줄지 않는다. “요즘 전쟁을 전자오락처럼 다루는 작품도 나오지만 한국 전쟁은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고, 우리 모두 제 3자가 아니라 당사자인 이야기니까 어렵다. 당시 4백만 명이 죽었다. 부모님의 기억에 남아 있고, 할아버지 대는 무조건 참전해야 했던 전쟁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드라마가 어떠해야 할까. 그리고 조금 더 높은 차원에서 ‘드라마’란 어때야 될까를 치열하게 고민 중이다.” 치열함에 대해 말하는 이는 많지만 그와 동시에 믿음을 줄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김진민 감독만큼 순도 높은 치열함을 보여주었던 이야말로 드물었던 것 같다. “<로드 넘버 원>은 상당히 품위 있는 드라마가 될 것 같다. 멋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전쟁에 매몰되어 사람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전쟁을 어떻게 겪어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될 거다.” ‘품위’라는, 지금 드라마 시장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단어를 그가 태연하게 끌어와 이야기한다. 내년 여름이 기다려지는 유일한 이유다.
사진제공_MBC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입사 후 김종학, 황인뢰, 장수봉, 이승렬 등 들락이는 면면만으로도 대단했던 선배들 사이에서 그는 일단 “몸으로 안 뛰면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일에만 열심히 매달렸다. 문학도도 아니었고 ‘~이즘’을 자유자재로 입에 올리지도 않았지만 대학 시절의 연극반 활동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메카이던 연대 뒤 카페 ‘빵’에서 “문화적으로 흡수해야 할 모든 양분을 다 얻으며 일했던” 경험은 저도 모르는 사이 그의 문화적 감수성을 부쩍 키워놓은 뒤였다. “그 때 들은 음악, 그 때 본 영화 가지고 10년을 써먹”는 동안 그는 사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신돈>과 완성도 있는 느와르로 탄생한 <개와 늑대의 시간>, 드라마를 통한 문학적 실험과 공간의 역할을 극대화해 보여준 <달콤한 인생>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박’을 칠지 못 칠지는 몰라도 매번 기대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김진민 감독의 세계는 아직 1막에 불과하다.
“요즘은 백년 뒤에 누가 지금의 드라마를 찾아서 볼까 하는 고민을 한다. 이런 말 하면 ‘흥행도 못 해본 놈이 입만 살아서’라고 하겠지만. (웃음) 베토벤, 모차르트 시절에도 빵빵 터지는 유행가를 만드는 음악가들이 있었을 텐데 지금 남은 건 베토벤이다. 그러니까 이걸 한 부분이라도 예술로 생각하고 대중과 소통하려 한다면 최소한 우리는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이상의 고민을 해야 한다.” 백년, 십년은커녕 일 년, 혹은 다음 개편 때 살아남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 버린 시장에서 김진민 감독이 던지는 화두는 청량하면서도 육중한 무게로 뒤통수를 때린다.
美 <야망의 계절> (Rich Man, Poor Man) ABC
1976년
“어릴 때부터 서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모처럼 읽은 책도 하필 <레미제라블>과 <대지>일 정도로 그런 것들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이 있다. <야망의 계절>은 동유럽 출신의 가난한 미국 이민자 가족의 두 형제 이야기다. 나도 형이 있고 우리가 서로 많이 달랐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극 중에서 형은 공부를 잘 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동생은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면서 일찍부터 가족의 역사가 뒤틀리고 후대에는 그들의 자녀들까지 서로 얽히면서 운명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린 나이였음에도 ‘아, 이야기라는 건 저런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
美 <뿌리> (Roots) ABC
1977년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8부작 미니 시리즈다. 18세기 아프리카의 흑인 소년 쿤타 킨테가 노예 상인에게 잡혀 오면서 시작된 이후 대대로 그들의 자손이 겪은 수난을 그렸는데 최근 다시 보니 옛날 작품이라 모양새가 ‘후진’ 부분이 있음에도 굉장히 재미있고 뚜렷한 힘이 느껴졌다. 등장하는 흑인들의 이야기는 물론 백인들의 이야기도, 보고 있으면 ‘오, 저렇게 만들다니’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게 잘 쓴 작품,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가 갖는 힘인 것 같다.”
美 <남과 북> (North & South)
1985년
“미국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패트릭 스웨이지가 이 미니 시리즈로 스타가 됐다. 우리가 예전에 잘 몰랐던 역사 중 남북전쟁 당시 남부인들은 흑인을 무조건 학대하기만 했고, 북부인들은 모두 흑인을 도우려고 했다는 식의 인식이 있었는데 실제로 북부인들이 흑인을 보호하려 했던 이유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들과 정 반대되는 면도 있다. 그런 이면들을 보여 주면서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치정과 탐욕, 성욕이 아주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너무 노골적인 장면 때문에 고등학생 시절 보기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인간의 모습이 굉장히 솔직하게 표현된다는 생각을 했다.”
“<로드 넘버 원>은 품위 있는 드라마로 만들 거다”
김진민 감독은 요즘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내년 여름 방영 예정인 <로드 넘버 원>의 준비로 바쁘다. <로드 넘버 원>은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이야기이자 60년을 뛰어넘은 그들의 우정에 대한 드라마다. 이미 지난 8개월 동안 <천국의 계단>의 이장수 감독, <개와 늑대의 시간>을 함께 했던 한지훈 작가와 대본 및 기초 작업에 매달려 왔지만 한국 전쟁 당시의 온갖 자료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부담은 줄지 않는다. “요즘 전쟁을 전자오락처럼 다루는 작품도 나오지만 한국 전쟁은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고, 우리 모두 제 3자가 아니라 당사자인 이야기니까 어렵다. 당시 4백만 명이 죽었다. 부모님의 기억에 남아 있고, 할아버지 대는 무조건 참전해야 했던 전쟁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드라마가 어떠해야 할까. 그리고 조금 더 높은 차원에서 ‘드라마’란 어때야 될까를 치열하게 고민 중이다.” 치열함에 대해 말하는 이는 많지만 그와 동시에 믿음을 줄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김진민 감독만큼 순도 높은 치열함을 보여주었던 이야말로 드물었던 것 같다. “<로드 넘버 원>은 상당히 품위 있는 드라마가 될 것 같다. 멋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전쟁에 매몰되어 사람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전쟁을 어떻게 겪어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될 거다.” ‘품위’라는, 지금 드라마 시장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단어를 그가 태연하게 끌어와 이야기한다. 내년 여름이 기다려지는 유일한 이유다.
사진제공_MBC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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