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영화배우. MBC <무릎 팍 도사>는 얼마 전 출연했던 의뢰인 박중훈을 이렇게 표현했다. 너무나 빤하고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그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뚜렷한 이미지의 레토릭을 구사하는 건 상당히 난감한 게 사실이다. 그는 <투캅스> 시리즈의 유쾌하면서도 속물적인 강 형사인 동시에 범인 검거에 온 몸을 던지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우 형사였고, 또한 삶에 대한 중압감에 짓눌린 <강적>의 하 형사였다. 마찬가지로 90년대, 최고의 짝패인 강우석 감독과의 코믹한 작업으로 최전성기를 누렸지만 <세이 예스>의 사이코 살인마 역시 그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때문에 두텁게 쌓인 필모그래피의 지층 하나하나에서 어떤 일관된 모습을 읽어내는 것보단 그 지층이 세월의 무게에 압축되면서 박중훈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바위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런 그가 영화 <해운대>에서 메인이 아닌 서브플롯을 담당하는 지질학자 김휘를 연기한다는 건 영화의 내용을 떠나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그가 여태껏 주연 욕심을 낸 배우라서가 아니다. 박중훈은 주연인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배우여서다. 하지만 “과거엔 역할의 크기와 깊이를 고려해서 작품을 골랐지만 이제 크기에서는 자유로워져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그에게선 오히려 최고의 흥행 카드로 이름이 높았던 시절보다 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났다기보다는 연기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그래서다. 공자님 말씀 같지만 배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온 그의 입을 거치는 것만으로 느끼하지 않은 진심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가 추천하는 느와르 영화 역시 단순한 장르물이 아닌 넘치는 비장미로 삶의 만만찮은 무게를 온전히 드러내는 영화로 받아들여진다.




박중훈│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영화
1. <스카페이스> (Scarface)
1983년 │ 브라이언 드 팔마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인 알 파치노의 눈부신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쿠바에서 불법 밀입국한 청년의 비뚤어진 성장기를 특유의 카리스마와 광기어린 표정으로 완벽하게 표현했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과장된 표현으로 ‘100번 봤다’는 말을 하는데 정말 이 작품만큼은 100번 가까이 봤어요. 나중에 제가 주연한 <게임의 법칙>에서 “사이판 가는 거야”라는 대사가 있는데 <스카페이스> 속 토니의 아메리칸 드림을 염두에 둔 대사였어요. 그만큼 당시 충격적이고 깊은 인상을 심어준 영화예요.”

한 쪽 뺨에 흉터가 있는 실존 갱스터 알 카포네를 모델로 만든 하워드 휴즈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쿠바 청년 토니가 배신과 숙청을 통해 갱단의 보스가 되고 부와 권력을 얻는 과정과 자신이 뿌린 피의 대가를 결국 자신의 목숨으로 헌납하는 결말은 아메리칸 드림 안에 숨어있는 추악한 욕망의 얼굴을 드러낸다.



박중훈│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영화
2. <칼리토> (Carlito`s Way)
1993년 │ 브라이언 드 팔마

“앞서 얘기한 <스카페이스>처럼 이 영화 역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찍고, 알 파치노가 갱스터를 연기했어요. 다만 <스카페이스>의 토니가 성공에 대한 욕망 때문에 황폐해져가는 인물이라면 <칼리토>의 칼리토는 출소 후에 자동차 임대업을 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는 인물이죠. 비록 친구인 변호사에게 속아 경찰에게 쫓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만요. 나이 먹은 전직 갱스터의 비애가 마음을 울리는 영화죠. <게임의 법칙>이 제게 <스카페이스>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면 이제 <칼리토> 같은 영화를 찍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해 목에 힘이 들어간 ‘폼 나는’ 느와르 영화는 아니다. 출옥하며 새 삶을 꿈꾸는 칼리토는 암흑가 보스 출신도 아니고, 그의 주위에 의리로 똘똘 뭉친 의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 삶을 살 7만 5천 달러를 위해 뒷골목 세계의 진흙탕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결국 뒷골목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어떤 갱스터 영화보다 암흑가의 비정함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박중훈│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영화
3. <영웅본색> (A Better Tomorrow)
1986년 │ 오우삼

“아마 대학교 1, 2학년 때 개봉했을 거예요. 당시엔 서울의 사대문 안에 있는 개봉관에서 개봉되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는 영화 취급을 당했어요. <영웅본색>이 그런 영화였죠. 하지만 정말 재밌게 본 사람들의 입소문만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은 참 특이한 경우였어요. 잘 알겠지만 주윤발이 입은 바바리코트와 입에 문 성냥개비 패션이 남자들 사이에서 선풍적 유행을 일으킬 정도였죠. 느와르에서 인상적인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다고 할까요. 주윤발은 이때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중에 헐리웃에서 <리플레이스먼트 킬러> 같은 영화에 출연했으니 아시아 영화의 진가를 세계에 알린 작품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홍콩 느와르를 하나의 고유 장르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총을 한 번 쏘더라도 몸을 날려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는 주윤발의 모습이 지금으로선 허세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총격 신의 새로운 장을 열며 사춘기 남학생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사실 메인 플롯을 이끄는 건 새 출발을 꿈꾸는 왕년의 보스 송자호 역의 적룡이었지만 기억 속에서 주인공이 헷갈릴 정도로 주윤발의 모습은 인상적이었고, 후에 등장한 <첩혈쌍웅>, <첩혈속집> 같은 작품들도 <영웅본색> 속 주윤발을 복제하는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박중훈│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영화
4. <정무문> (Fist Of Fury)
1972년 │ 나유

“<정무문> 역시 <스카페이스>처럼 100번은 본 영화에요. 느와르 영화는 기본적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바탕에 깔잖아요. 그런 면에서 일제 강점기의 중국을 그린 <정무문> 역시 느와르로 분류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사부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이소룡의 모습과 그런 그를 삽으로 때려서 기절시키는 동문의 모습에선 깊은 비장미가 느껴지죠. 물론 <정무문>은 결국 이소룡의 영화에요. 나라와 스승을 잃은 깊은 분노를 온 몸으로 표현해내며 배우 한 명의 매력만으로 영화를 이끌 수 있단 걸 보여줬죠.”

비교적 권선징악의 결말이 뚜렷한 <용쟁호투>나 <맹룡과강>을 제외하면 이소룡의 영화에는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우울함이 깔려있다. 악인을 처단하지만 결국 경찰에게 잡혀가는 결말의 <당산대형>과 <사망유희>가 그렇고, 분노의 발차기를 날리는 이소룡에게 일본 군인이 총을 쏘아대는 결말의 <정무문>이 그렇다. 이소룡의 액션이 통쾌하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건 꾹꾹 눌러온 분노를 폭발시키기 때문인데 특히 나라와 스승과 문파가 외세 때문에 파괴되는 걸 봐야 하는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이런 면모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다.



박중훈│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영화
5. <볼사리노> (Borsalino)
1970년 │ 자끄 드레이

“쟝-뽈 벨몽도와 알랑 드롱을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영화에요. 영화사에 남을 작품인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했던 벨몽도와 <태양은 가득히>를 통해 엄청난 인기를 얻은 알랑 드롱 모두 정말 흠모하던 배우였어요. 그 둘이 주먹다짐을 통해 친구가 되고 의리를 지키는 모습은 당연히 같은 남자로서 멋있어 보일 수밖에 없었죠. 특히 이 영화에서 흰 정장을 입고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알랑 드롱은 멋있는 갱스터의 어떤 전형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주먹다짐으로 친구가 된 만만찮은 두 남자가 마르세이유의 거대 조직과 대결하는 프랑스식 갱스터 영화로, 홍콩 느와르에 앞서 갱스터의 의리를 미화한 작품이다. 잘생겼다는 말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알랑 드롱이지만 그 차가운 눈빛 때문에 <시실리안>, <사무라이>, <암흑가의 세 사람> 같은 느와르 작품에도 잘 어울렸는데, 덕분에 실제 복싱에 능했던 장-뽈 벨몽도에 비해서도 무게감이 뒤떨어지지 않아 둘 사이의 의리가 좀 더 멋있어 보일 수 있었다.




박중훈│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영화
“말하자면 파도 같은 거예요. 계속 육지를 향해 전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고가고를 반복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는 게 건강한 인생인 거 같아요.” 80년대 아이돌 스타로 시작해 90년대 최전성기를 거쳐 이제 여유롭게 조연에도 눈을 돌리기까지 수많은 성공과 역시 적지 않은 실패로 다져져 단단하고 거대한 바위가 된 박중훈에겐 어떤 작품도 진정한 의미의 실패는 아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표 영화배우라는 그 빤한 표현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이 표현이 온전한 무게를 가질 수 있는 건 바로 그, 박중훈을 수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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