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희는 마주 앉은 사람에게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이것은 그가 흔히 알려진 ‘4차원’ 이미지대로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카메라 밖에서의 최강희는 예상보다 훨씬 차분하고 밝은 얼굴로 상대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어떤 질문에도 모범 답안을 내놓는 대신 그 순간 떠오른 감상을 드러내고 때로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생각을 정리해 들려주는 그와의 대화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산책로에서 새로운 길과 만나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9월 10일 개봉하는 영화 <애자>에서의 최강희 또한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최강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맑은 동안의 도시 처녀에서 억센 부산 사투리로 고함과 욕설을 내뱉는 선머슴 ‘애자’로 변신하기까지 그동안 이 배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동안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SBS <달콤한 나의 도시>가 작년 8월 종영했으니 꼬박 1년 만에 돌아온 셈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최강희
: 음…힘들게 지냈다. ‘초(超)’ 진지하게 지냈다고 해야 되나? 항상 진지했지만, 항상 그랬지만 이번엔 특히 더 많은 걸 책임감 있게 생각해야 하는 시기였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촬영을 마쳤을 때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 “솔직히 요즘은 연기에 대해 재미를 많이 못 느낀다”고 말했다.
최강희
: 그러니까, 그 때가 질풍노도의 시기 시작이었다. 연기를 관둘까도 생각했다. <애자> 중간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결국 관두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계산이 안서던데. (웃음)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애자>에서 엄마로 출연하신 김영애 선생님도 그런 생각을 하시더라. 그래서 우리들, 연예인들이 다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허당이구나. (웃음) 사실 내가 이 나이 또래 다른 주부보다 딱히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 재테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남 흉내 내면서 사는 게 직업이니까 ‘내 거’는 없나 싶었다. 그런데 계속 생각을 해 보니 이렇게 남의 인생 사는 게 ‘내 거’인 거고.

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던 중에 굳이 <애자>를 선택한 이유는 뭐였나.
최강희
: 변신 한 번 해보자 싶었다. 지금까지 변신 같은 거 안 했으니까. 옛날엔 이런 역할 들어오면 ‘어우 힘들어, 감정 봐. 이거 힘들어’ 이랬을 텐데 이번엔 힘들어도 저질러 보자는 생각을 했다. 욕을 먹든 칭찬을 듣든 한 번 해보면서 나를 돌아봐야겠다 싶었다. 용기 많이 내서 선택했다.

스물아홉, 미래가 불투명한 소설가 지망생인 애자의 정신세계는 어떤가?
최강희
: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궁상맞게 구는 사람이 있고 히스테릭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애자는 ‘욱’하는 사람이다. 좀 ‘막장’이고. (웃음)

본인과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나. (웃음)
최강희
: 전혀!

“최강희도 성질은 죽고 오로지 캐릭터만 남았다”

그렇다면 말로도 욕을 하고 몸으로도 욕을 하는 선머슴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어색하지는 않았나.
최강희
: 그래도 ‘영어 잘 하는 부잣집 딸’ 같은 역할보다 훨씬 낫다. (웃음) 옷 준비 안 해도 되고, 다크 서클 생기면 감독님이 좋아하고, 심지어 일부러 그런 분장을 하기도 하니까 그런 면에선 편했다.

그럼 안 편했던 건 뭔가.
최강희
: 연기다. 지금까지와 다른 역할이라는 거. 내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캐릭터를 내가 입어야 한다는 게 어려웠다. 개그우먼 김숙 씨와 친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가 현실에서 아는 사람 중엔 김숙 씨가 애자와 성격이 가장 비슷하다. 지금은 성질 많이 죽었지만. (웃음)

본인 성질은 어떤가.
최강희
: 나도 죽었다. 성질은 죽고 오로지 캐릭터만 남았다. (웃음)

고등학생 시절의 애자도 연기했다. 데뷔 때도 학생 역이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복을 입는다.
최강희
: 좋았다. 난 제복이 잘 어울리는 편인데 제복 중에서 교복은 입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바짝 입어놔야지.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여고괴담>의 재이처럼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속으로는 무슨 생각 하고 살았나.
최강희
: 사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대학 갈 생각도 안 했고, 학교에 안 가려면 졸업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빨리 세월이 흐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잘하는 게 있었다면 뭐였나.
최강희
: 오래 매달리기를 잘 했다. 공부 같은 건 따로 해야 될 사람들이 있는 거니까. (웃음) 오래 매달리기, 오래 달리기처럼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계속 할 수 있는 걸 잘 했다. 그림도 좀 잘 그렸다. 초, 중, 고등학교 때마다 복도 벽에 내 그림 하나씩은 걸렸던 것 같다.

“<애자>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

<애자>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작품이다. 나이가 들다 보면 모녀간의 관계도 점점 달라지게 마련인데 실제로 어머니와는 어떤가.
최강희
: 엄마가 내 수호천사다. 엄마는 기도를 정말 많이 하는 분이라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가면 들어올 때까지 내 방에서 기다리며 기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내 8할은 엄마의 기도로 이뤄진 거고, 내가 엄마 덕에 그나마 사람 구실하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른 모녀와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엄마는 나더러 결혼하라는 말씀을 안 하신다. 아마 내 나이가 몇인지 엄마는 모를 거다. (웃음)

엄마와 평소 일 얘기는 잘 안 하나.
최강희
: 안 한다. 엄마는 내가 실제보다 되게 유명하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음…그리고 사실 난 고등학교 때까지 엄마 때문에 <사랑과 영혼>도 못 봤다. 도자기 빚는 장면이 야해서. (웃음) 그런데 <달콤 살벌한 연인>을 찍는다고 어떻게 말 하나? 그렇게 기도 열심히 하시는 분께 <여고괴담>에서 이번 역할은 귀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엄마가 “뭐 해?”하고 물으시면 “그냥, 있어. 아침 아홉 시에 깨워 줘” 그런 식이었다. 엄마가 원래 TV를 잘 안 보시는데 이효리 씨 팬이라서 ‘패밀리가 떴다’만 보신다. 그래서 내가 ‘패밀리가 떴다’만 안 나가면 되겠구나 했는데 <애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런 영화를 하는데 엄마와 딸 얘기고, 시사회 날도 와서 봐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번에 MBC <황금어장> ‘무릎 팍 도사’ 녹화하고 나서 언제 방송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웃음)

<내 사랑> 때는 “한 영화에서 한 신만 잘 하면 된다”는 마인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애자>에서의 ‘한 신’을 꼽는다면 뭔가.
최강희
: 애자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가 둘이 밖에 나가서 밥을 먹는데 엄마가 입맛이 없다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니까 애자가 “뭐, 먹고 싶은 거 있나?”하고 묻는다. 다음 컷에서 둘이 낚싯대 걸고 뽈락을 잡아서 맨 손으로 초장 찍어 서로 먹여준다. 극 중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나쁜데, 그런 게 모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싸웠지만 또 서로 안쓰러워하며 먹여주고 챙겨주는 거. 김장 할 때 그 자리에서 김치 싸서 먹여주는 것처럼, 모든 모녀가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그런 다정한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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