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신 탓인지 잔뜩 찌푸린 얼굴, 거뭇한 수염 자국, 대충 꿰어 입은 듯한 옷차림에 다소 불량스러운 몸짓. 거기에 굵고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보태면 그가 바로 진구다. 진구는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남자들이 창궐하는 21세기에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수컷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했다.

<달콤한 인생>에서 폭력조직의 1인자도 아닌 2인자의 오른팔 역할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진구는 우아한 선우(이병헌)를 닮은 충성스러운 부하로, 이병헌에게만 영광이 돌아가기 쉬운 영화에서 당당히 이름을 남겼다. 특히 그는 모두가 선우에게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그를 도와주며 어둠의 왕국에서 유일하게 남자의 의리를 지켜냈다. 연이어 2인자의 오른팔로 등장한 <비열한 거리>에서도 그는 ‘비열한 거리’ 한 가운데에 섰다. 의리라는 것이 휴지 조각처럼 내팽개쳐지기 쉬운 세계에서 그는 병두를 배신했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남자들이 떠받드는 가치를 상징한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며 진구는 단순히 조폭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남자라는 이미지 그 자체로 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작 <마더>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꽃미남이라는 수식어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원빈과 나란히 화면에 들어온 진구는 프레임 바깥으로 물러난 순간에도 테스토스테론을 뿜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김혜자와 함께 있을 때조차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마더>에서 성적인 의미로 거의 유일한 남성이자 함께 하는 모든 이성과의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효과는 온전히 진구라는 배우에 의해 가능했다. 그런 남자가 말하는 ‘남자들을 위한 영화’에는 진구를 닮은 사랑에 빠진 남자, 성공을 위해 돌진하는 남자 그리고 외로운 남자가 있다.

1. <천장지구> (天若有情)
1990년 │ 진목승

“이 영화로 오천련의 팬이 됐어요. 그 때 동네 비디오 가게에 <천장지구> 포스터가 붙어있었어요. 사실 오다가다 포스터만 볼 때는 ‘무슨 여주인공이 저렇게 안 예뻐?’ 이랬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너무 아름다운 거 있죠. 10번을 넘게 봤는데도 볼 때마다 울고, 우는 지점도 그때마다 다 틀렸어요. 보통은 유덕화랑 웨딩드레스를 입은 오천련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을 많이 기억하시던데, 그것 말고도 엄청난 명장면들이 많아요. 남자라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한 번은 사랑해 봐야하지 않을까요?”

주윤발의 쌍권총과 바바리코트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가 한국을 강타했던 시기, 남자들의 의리로 가득했던 세계에도 사랑이 빠질 수는 없었다. 외로운 오토바이광인 아화(유덕화)는 경찰에 쫓기다 인질로 삼은 죠죠(오천련)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둘의 달콤한 시간도 잠시, 의형제의 복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아화는 죠죠와의 마지막 시간을 위해 둘만의 결혼식을 준비한다.

2. <키핑 더 페이스> (Keeping The Faith)
2000년 │ 에드워드 노튼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예요. 저도 의외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좋아해요. (웃음) 한 친구는 랍비고, 또 한 명은 신부인데 같은 여자를 사랑해요. 참 독특하죠? 두 친구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결국은 한 명이 친구에게 사랑을 양보하게 되요. 저라면요? 음, 저라면 여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정말 친구도 포기할 만한 사랑인지, 그 여자도 나를 그만큼 사랑하는지를 알아야 우정과 사랑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단짝이었던 브라이언(에드워드 노튼)과 제이크(벤 스틸러)는 각기 신부와 랍비가 되어 뉴욕에서 다시 만난다. 일명 ‘천상의 특공대’로 지루하던 성당과 성전에 활기를 불어넣던 이들은 어릴 적 삼총사였던 애나(제나 엘프만)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이야기는 무수히 되풀이 되어왔지만 신부와 랍비라는 설정이 색다른 웃음을 자아낸다. 에드워드 노튼은 주연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 삼각관계와 종교 문제를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그려냈다.

3. <페이스 오프> (Face/Off)
1997년 │ 오우삼

“와, 이거야말로 진짜 멋진 남자들의 영화죠!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외국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게 어떤 건지 몰랐어요. 우리말이 아니니까 감정을 어떻게 담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는데, 여기서 존 트라볼타와 니콜라스 케이지를 보고 알았어요. 두 배우의 완벽한 조화가 정말 대단했어요. 특히 신문지를 말아 쥐고 얼굴이 바뀐 존 트라볼타가 니콜라스 케이지를 보며 감옥을 나가는 장면에서는 전율이 쫙- 일어났어요. 요즘도 케이블 TV에서 하던데 채널 돌리다가 나오면 그대로 동작 정지예요. (웃음) 그리고는 또 보는 거죠.”

쉴 새 없이 터지는 할리우드식 액션에 홍콩영화 특유의 총격 신과 오우삼 감독 특유의 비장미를 담아냈다. FBI 요원 숀(존 트라볼타)은 테러범 캐스터(니콜라스 케이지)의 도시를 날려버릴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혼수상태에 빠진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에 이식한다. 그러나 캐스터의 음모로 숀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은 모두 살해당하고, 숀은 홀로 캐스터와의 결전을 치른다. 당시로서는 박진감 넘치는 추격 신과 폭파 신들이 지금은 다소 어설프게 보이지만, 두 명배우들의 연기 대결만은 여전히 명불허전이다.

4. <게임의 법칙> (The Rules Of The Game)
1994년 │ 장현수

“최초의 한국형 느와르가 아닐까요? 오연수 선배도 너무 아름다웠고, 박중훈 선배의 연기도 정말 대단했어요. 너무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영화에 한 번 꽂히면 수도 없이 계속 보는 버릇이 있는데, 얼마나 이 영화를 좋아했던지 비디오로 처음 보고 난 이후로 계속 돌려봤어요. 거기다 그걸로도 모자라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 보여주기까지 했어요. (웃음)”

세차장을 전전하지만 주먹깨나 쓴다고 자부하는 용대(박중훈)는 서울로 올라가 최고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게 꿈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사기꾼에게 돈 뜯기고, 애인은 호스티스가 되고, 자신은 점점 추악한 깡패가 되어가는 용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한 건을 끝으로 손을 씻으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마지막이 남자를 집어 삼키고 만다. 코믹한 이미지가 강했던 박중훈은 <게임의 법칙>으로 연기 변신에 성공하며 제15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5.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년 │ 대런 아로노프스키

“<마더>처럼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정서는 외국이나 우리나 다 같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잘 나갔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늙어버린 몸뿐인 한 남자의 인생 역정만으로도 가슴 아픈데, 그 남자도 딸 앞에선 결국 아버지인 거예요. 아버지는 늙으면 힘없고 불쌍하고 보잘 것 없는 뒷모습으로 남잖아요. 레슬러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참 가슴 아팠어요.”

포효하는 기타 리프와 남성적 에너지가 가득한 함성소리로 시작한 인트로가 끝나자마자 랜디(미키 루크)의 기침소리가 힘없이 울린다. 80년대 인기 절정의 프로레슬러였으나 지금은 동네 마트의 잡부로 일하고 있는 랜디. 옛날의 영광을 재현하며 벌이는 3류 레슬링 경기만이 그에게 유일한 삶의 기쁨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심장마비로 레슬링을 포기하게 될 위기에 처하고, 힘들게 찾은 딸은 그를 외면한다. 미키 루크는 절로 그의 인생역정을 떠올리게 하는 퇴물 레슬러 랜디로 2009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모두가 다 내 모습, 다 진구니까요”

“저는 한 번 맡았던 배역을 비워내는데 시간이 얼마 안 걸려요. 모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모습이 아니라 다 내 모습이니까, 다 진구니까요.”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들은 종종 훈장처럼 그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는 많은 찬사를 안겨준 <마더> 이후 휴지기 없이 바로 시동을 걸었다.

이병헌의 아역으로 출연했던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드라마 <올인>의 속편격인 <태양을 삼켜라>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로 특별 출연한 것. 물리적인 등장 시간과 상관없이 진구는 아버지라는 남자의 또 다른 모습을 어떻게 제시할까? 연속선상에 있는 작품에서 아역을 거쳐 특별출연을 하기까지 수컷들의 먹이사슬에서 보낸 6년의 시간이 분명 이 남자의 대사 한 줄을 위협적인 한 방으로 만들 것이다.

사진제공_ BH엔터테인먼트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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