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인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기 위해 일어났던 촛불 집회의 군중은 KBS 본관으로 향했다. 시민들은 “한국방송 걱정 마라, 우리들이 지켜준다”는 구호와 함께 현 정권의 방송장악으로부터 KBS를 지켜내겠다는 응원을 보냈다. 다음은 그로부터 약 2개월 후부터 차례차례 1년 동안 벌어진 일들이다.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시민들이 KBS를 응원했었다는 사실이 가물가물하다 못해 메모리에서 삭제된 것일까. 순서대로 읽어보며 사건의 추이를 확인하기 위해 만든 기록이지만 다시 스크롤을 역순으로 올리며 KBS를 지키겠다던 당시의 외침을 떠올려보는 것도 무의미하진 않을 것이다.보수니 진보니 하는 정치적 수사 때문에 본질이 많이 흐려진 감이 있지만 정연주 전 KBS 사장의 해임이 문제가 됐던 것은 2009년 11월까지 보장된 임기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공영방송의 중립성을 위해 KBS 사장에 대해서만큼은 대통령이 면직권을 발휘할 수 없도록 ‘임면’권을 ‘임명’권으로 변경했었다. 즉 사장의 임기 보장은 KBS 중립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KBS 직원들이 정연주 전 사장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진 않았음에도 2008년 8월 8일, KBS 이사회가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한 해임안을 제청하는 걸 막으려 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유재천 이사장은 직원들을 막기 위해 300여 명의 사복경찰을 요청했고, 이들과 KBS 내부 청원경찰은 항의하는 직원들을 철저히 차단하고, 심지어 완력을 이용해 강제로 끌어내기도 했다. 이는 지난 1990년 노태우 정권에 의해 서기원 사장의 낙하산 취임을 반대하며 KBS 노조가 파업을 벌이다 경찰에 의해 500여 명의 조합원이 연행된 이후 18년만의 KBS 내 공권력 투입이었다.
2008년 10월 13일, 이명박 대통령의 ‘금융위기와 관련한 긴급담화’가 KBS 제1라디오를 통해 전파를 탔다. 청와대는 모든 방송사의 라디오 주파수를 타길 원했지만 MBC는 보도국 자체 회의를 통해 방송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SBS에서는 민영방송이 굳이 대통령 담화를 방송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PD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례방송이 아닌 일회성 특별담화니 괜찮다며 편성을 잡았던 편성담당자의 말은 담화 말미 이명박 대통령의 “다음에는 좀 작더라도 생활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하겠다”는 발언과 함께 거짓말로 드러났다. KBS 라디오본부 조합원들을 비롯해 PD협회와 기자협회는 이에 대해 “방송국의 편성권과 제작 자율성, 더 나아가 언론자유를 짓밟은 폭거”라고 주장하며 편성제작팀장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결국 11월 3일 두 번째 대통령 담화가 방송되면서 대통령 정례 라디오 연설은 KBS 라디오에 격주로 편성되었다. 현재도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는 일방통행으로 대통령의 말을 전하고 있으며, 이 방송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은 학력평가제도의 필요성이나 야당이 대통령에 협조적인 다른 나라에 대한 부러움을 토로했다.
2009년 봄 개편으로 등장한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KBS 공개 음악 방송의 계보에서도 돋보이는 프로그램이고, 라디오에서 갈고닦은 입담을 지닌 유희열은 역시나 좋은 진행자다. 하지만 이 좋은 프로그램이 편성되는 과정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비록 진보적 록커라는 수식은 빛바랜지 오래지만 기본적으로 현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윤도현의 러브레터>의 윤도현을 2008년 가을 개편에서 하차시킬 때 KBS가 제시한 이유는 외부 MC를 내부 인원으로 교체해 예산을 아낀다는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진보매체 프레시안의 이사인 정관용도 <시사토론>의 MC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하나의 페퍼민트>를 거쳐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편성된 것처럼 KBS의 내부 인원 활용 정책은 불균일한 면을 드러내며 경제적 효율성보단 반정부적 인사 배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사게 됐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를 비롯한 소위 보수 매체로부터 공격 받기 일쑤였던 <시사투나잇>과 <미디어포커스>는 <시사터치 오늘>과 <미디어비평>으로 이름이 바뀌고 편성 시간도 바뀌며 실질적인 폐지를 당하며 가을개편은 결과적으로 KBS에 친정부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12월 31일 밤 11시 30분부터 새벽 1시까지 KBS에서 방영한 <특별생방송 가는 해 오는 해 새 희망이 밝아온다>를 본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와 보신각을 타종하는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보신각 주변의 시민들은 ‘방송장악 저지’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이나 촛불을 들고 있었지만 KBS의 카메라 앵글은 절묘하게 그들을 피해 평화로운 제야의 종 행사만을 프레임에 담아냈다. 이처럼 선택과 집중이 돋보인 클로즈업은 현장의 사실을 피하되 왜곡하진 않았지만 시위대의 구호 대신 박수와 함성이 섞인 효과음으로 현장의 소리를 전달한 것만큼은 사실 관계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MBC의 신경민 앵커는 <뉴스데스크> 마무리 멘트에서 “각종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를 1만여 명의 경찰이 막아섰으며 소란과 소음을 지워버린 중계방송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KBS는 “관객의 모든 소리를 수음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 할 경우 통상적으로 일부 지역에 설치된 마이크로 잡은 객석 소리와 효과음을 섞어 ‘관객의 소리’를 만드는 것이 모든 공개 방송 제작의 기본”이라는 보도 자료를 냈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 중계에 대해 “사실성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며 법정제재가 아닌 권고 조치만을 취했다.
KBS 직원들에게 8. 8 사태라 불리게 된 2008년의 사복 경찰 난입과 완력 행사에 대해 결국 영등포경찰서도 유재천 이사장도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KBS 이병순 사장은 2009년 1월 16일, 당시 이사회의 결정에 반대 투쟁을 했던 양승동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 공동대표와 김현석 대변인을 파면하고, 성재호 기자를 해임하는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KBS PD협회와 기자협회는 부당징계 완전 철회와 징계 주범 문책, 회사의 사과를 요구하며 1월 29일부터 전면적인 제작거부에 돌입했고, KBS는 제작거부 반나절 만에 양승동 PD와 김현석 기자에 각각 정직 4개월을, 성재호 기자에 정직 1개월로 징계수위를 대폭 낮췄다. KBS는 ‘어느 때보다 화합과 단결이 요구되는 만큼 미래지향적, 대승적 차원에서 정상 참작을 했다’며 제작거부와 상관없이 징계를 낮춘 것처럼 밝혔지만 제작거부에 참여했던 김덕재 PD협회장은 “제작거부 하루 만에 이 정도로 징계수위를 낮춘 것은 감히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며 징계 완화를 투쟁의 산물로 받아들였다. 이 제작거부 투쟁은 사내 동료를 부당한 징계로부터 보호했다는 것뿐 아니라 KBS 노조가 아닌 임의단체인 PD협회와 기자협회가 투쟁의 중요 주체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KBS의 가을 개편이 외부 MC의 배제로 요약할 수 있다면 2009년 봄 개편은 작가의 배제로 요약할 수 있다. KBS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2009년 2월, 용산참사 당시 KBS는 검찰주장에 치우친 보도를 하며 유족들의 주장은 충분히 검토하지 않아 부실보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급기야 유족들은 KBS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고, 심지어 용산참사 추모 현장에선 KBS 기자라는 이유로 야유와 욕설을 듣고 폭행까지 당했다. 한 번 잃은 신뢰란 역시 쉽게 돌아오지 않는 법이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봉하마을 빈소에서도 KBS의 굴욕은 계속됐다. 빈소에는 조선, 중앙, 동아, KBS는 출입금지라는 표지가 있었고, 시민들의 반대로 중계차는 빈소로 접근할 수 없어 1㎞ 떨어진 벌판에 중계차를 설치하고 방송했다. 이 때 벌판에 있던 황소와 함께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서 널리 퍼지며 또 한 번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촬영기자들은 카메라에 붙은 KBS 로고를 검은 테이프로 가렸다가 아예 로고 자체를 떼서 촬영을 했고, 취재기자 역시 소속을 밝히지 않은 채 인터뷰를 시도해야 했다. 하지만 KBS의 PD와 기자들은 봉하마을의 조문행렬을 보도하며 조문객 수를 300여 명이라고 축소 보도한 과오를 인정하며 자체 반성을 통한 자정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봉하마을에서의 굴욕 이후 KBS PD협회는 성명을 통해 KBS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방송의 문제 이면에는 데스크의 몸 사리기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일러스트레이션_ 무적핑크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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