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에서는 금지 단어가 된 럭스도 출연 했었다.
백경석: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워낙 오래 됐었고, 사실 그 친구들이 직접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으니까. 당시 테마가 ‘열혈 사운드의 발견’이었는데, 럭스를 빼 놓고는 이야기가 되질 않았다. 그들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블루 스피릿을 갖고 펑크를 하는 팀이니까.

지난 2월에 있었던 EBS <스페이스 공감> 백경석 PD와의 인터뷰 중 미공개 된 한 대목이다. 기억컨대, ‘그 사건’이 있은 후 당시의 서울 시장은 직접 홍대의 클럽을 방문하사, ‘그렇지 않은’ 밴드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당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심으로써 사멸의 공포에 휩싸인 지역 음악인들에게 안도감을 선사 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정말로 필요했던 작업은 사실 럭스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확인하는 것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럭스야말로 홍대 앞에서, 한국 음악 신에서 멸종의 위기에 처한 펑크를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몇 안 되는 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펑크 스리핏의 생존을 주장하는 이유는 ‘음악의 다양성’을 지지하기 때문도 아니고, 장르의 존폐에 반응할 만큼 대단한 음악 애호가라서도 아니다. 다만, 아직 사라지기에 펑크의 메시지와 럭스의 전언들은 너무나 절실하고 필요한 문장들이다. 대관절 음악이란 ‘들어서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어떤 음악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와 심장에 새겨진다. 예컨대 <트레인 스포팅>과 관련해 창궐했던 일렉트로니카들은 게릴라적 아나키즘에 포문을 열고 ‘Choose life’란 단 두 단어로 시스템이 일상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건조한 진실을 폭로했다. 그러나 배금과 발전을 숭배하는 이 사회의 목적성은 어느새 그 정신을 말살해 버렸다. 펑크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보다 위협적이고 직설적인 펑크는 그 불온함 때문에 더더욱 제거 대상으로 겨냥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불온하게 계속해서 분노하고 악을 써야 한다. 그리고 유럽 발매판으로 재발매된 럭스의 1집 앨범에는 지루하지 않은 젊음의 분노가 마치 타임캡슐에 보관 한 듯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래도 나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나의 길을 걸어가겠어. 나 이렇게 이 땅에 선 채”나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이대로. 이 모습 여기서 이대로” 라고 노래하는 희망이 참으로 쓸쓸하지만, 무려 스물다섯 곡이 흘러나오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보면 이들의 음악은 여전히 유효하고 통렬하다. 당연한 일이다. ‘Punk from hell’이라는 문장을 보라. 럭스의 펑크는 이 땅에서 탄생했고, 나는 이 땅에서 살고 있으며, 여전히 이 땅은 지옥도를 닮아있다.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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