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으로 본 ‘미드’는 <라비헴 폴리스>다. 강경옥의 1992년 작이었던 이 만화는 가상의 미래도시 라비헴 시티를 배경으로 하이아와 라인이라는 두 남녀 교통경찰의 일상과 그들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멀쩡하게 생긴 순정남, 그러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라인과 애교 없고 둔감하기가 요즘 유행하는 ‘철벽녀’의 조상 격인 하이아의 러브 모드가 작품 전반에 깔려 있긴 했지만 사실 이 작품은 드라마로 치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휴먼 SF에 가까웠다. 우주선 폭발 사고로 죽은 뒤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떠도는 영혼, 세상을 떠난 가족을 추억하기 위해 달 왕복선을 타는 남자, 범우주적 톱스타와 그의 스토커, 심지어 성전환으로 정체를 숨긴 정보 밀매업자까지 그야말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인물들이 매회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 등장했고 하다못해 화상 통화나 인터넷 쇼핑,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 등 90년대만 해도 생소했던 디테일들이 자연스레 녹아 있었던 <라비헴 폴리스>는 결코 <소머즈>나 <타임 트랙스> 같은 외화 시리즈에도 밀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 본격적으로 ‘미드’를 접하게 되고 그 다양한 소재와 새로운 세계관에 감탄할 때마다 나는 <라비헴 폴리스>를 떠올렸다. 그것은 지금 <배틀스타 갤럭티카>가 그렇듯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고민, 철학을 미래와 우주라는 가상의 시간과 공간에서 가장 생생하게, 그러면서도 세련되게 담아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드식 구성이나 SF적 디테일, 전문직 드라마나 퀴어 코드라는 것들이 지극히 낯설기만 하던 90년대 초반에 말이다. 그래서 ‘2025년 10월 4일 토요일’의 하이아처럼 한없이 무료한 오후를 보내던 지난 주말, <라비헴 폴리스>를 다시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한국 최초의 SF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면 이만큼 좋은 원작은 또 없을 거라고. 아, 물론 그 전에 네 권으로 완결된 만화의 뒷이야기부터 나와 주면 더욱 좋을 테고 말이다.

글ㆍ사진.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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