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그리웠던 부산역엔 햇빛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시속 3000광년의 속도로 양심과 욕심 사이를 오고 간다. 훔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하고, 영화제니 출장이니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을 일이 많은데 그 때 마다 들고 간 소설책을 찬밥으로 만들어 버리는 잡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다. 성실하게 발품을 팔아 대한민국 팔도강산을 누빈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잡지를 보고 있노라면, 미트패킹 디스트릭트, 마레지구 같은 타국의 지명에는 꽤나 익숙한 스스로가 정작 이 땅의 지명에 대해서는 거의 백치 수준이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이 잡지에서 만나는 풍경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신선하고 반가운 자극이었다. 특히 경남 창녕의 우포늪을 소개한 사진과 기사는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몇 번을 반복해서 들여다 보았던 것 같다. 7번 국도 여행, 해변 기차 여행, 군산 빈티지 투어, 강경 근대 건축 기행 같은 솔깃한 루트를 보여 준 것도, 태백시 귀네미 마을, 포천의 숯골 마을, 삼계리의 쌀엿마을 같은 낯설지만 다정한 마을들의 이름을 알려 준 것도 이 잡지였다.

은 호루라기를 불며 푸른 깃발을 치켜 든 관광가이드가 아니라, 버선발로 뛰어나와 어서 오라 손을 부여잡는 시골 할미 같은 잡지다. 고즈넉한 풍경 위로 짧은 시를 식혜의 밥알처럼 감칠맛 나게 띄워놓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비 오믄 풀섶 따라 요래요래 걸어 댕겨야 했지. 그래야 하루라도 더 신응께” 동네 어르신들의 사투리를 구성지게 활자화 시킨 사진 설명들은 그 자체로 보고 듣는 여행기요, 중독이 두렵지 않은 마약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은 정작 코레일의 재정지원이 없이 광고수익으로만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기내에 비치 된 잡지를 행선지에서 들고 내리는 건 엄연히 절도인 셈이다. 하지만 기차가 알알한 바다내음을 뚫고 부산역을 향해 닻을 내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언제나 갈등한다. 그렇게 몇 번은 미지의 다음 승객들의 즐거움을 앗아왔던 것 같다. 결국 얼마 전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어쩐지 묵은 부채를 갚은 느낌이다. 며칠 춥더니, 다시 날씨가 풀렸다. 2월도 끝나고 곧 봄이 올 테지. 이제 우린 어디로 떠나게 될까. 어쩐지 올해는 비행기보다는 기차를 자주 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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