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에서 이기는 방법? 가장 확실한 것은 스스로가 잘 하는 거다. 그런데 가끔 그럴 필요도 없을 때가 있다. 경쟁자가 알아서 자폭해 줄 때, 알아서 고꾸라질 대, 알아서 정신 못 차려 줄 때. 그럴 때 “이게 웬일?”이라고 살짝 읊조리게 되는데, 올해 ‘청룡영화상’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대충상’으로 거듭난 ‘대종상’의 셀프디스로 인해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분위기이니 말이다.
지난 20일 열린 ‘대종상’은 대리수상을 막으려다 역대 최다 대리수상이란 역풍을 맞는 한편의 코미디였다. 남녀주연상 후보들 전원이 시상식에 불참하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시상식 내내 “대리~ 대리~ 대리”라는 단어가 넘쳐났다. 졸속 운행으로 가장 고통 받은 이는 MC 신현준. 사회보랴, 시상하랴, 대리수상하랴~ 오죽했으면 ‘신현준의 극한체험기’라는 말이 화제가 됐을까. 이날의 진정한 남우주연상은 신현준이었다. 결국 국내최고령 ‘대종상’은 이날 반쪽짜리 영화상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새겼다. 권위 따위 없었다. 상처만 남았을 뿐.
영화인들의 ‘대종상’에 대한 실망은 갑작스럽게 표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종상’의 흑역사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1996년 대종상은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 ‘애니깽’에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몰아주며 추문의 대상이 됐다. 2000년에는 한 신인 배우가 뒷돈을 대고 대종상 신인상을 챙겼다. 장나라가 미개봉작 ‘하늘과 바다’ 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등극했던 지난 2009년에도 논란은 가문의 저주처럼 대종상을 떠나지 않았다. 일명 ‘광해의 난’(‘광해, 왕이 된 남자’가 15개 부문을 독식)이라 불린 지난 2012년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권위는 타락했고, 공정성을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올해 출석상 논란에서 시작된 ‘대종상’의 파행은, 긴 시간 쌓여왔던 썩은 부분이 곪아 터진 결과물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종상’에 대한 실망이 커질수록 ‘청룡영화상’에 대한 기대와 무게 또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충무로에는 이런 이야기마저 돈다. “청룡에 노미네이트 된 배우들이 모두 참가해서 대종상에 ‘빅 엿’을 선사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네티즌들 역시 어떤 배우가 시상식에 참석할 것인가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청룡영화상’이 이토록 데일 듯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던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모든 게 ‘대종상’ 덕분이다.
물론 ‘청룡영화상’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라는 일부의 시선이 아쉬울 수 있다. 청룡에 쏠린 기대감의 일부는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도 분명 있으니 말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청룡영화상’은 조선일보사가 후원하고 자매사인 스포츠조선이 주최하는 행사. 주관사의 정치적 색깔로 인해 적지 않은 잡음에 시달려 온 게 바로 ‘청룡영화상’이다. 이창동 감독이 ‘청룡영화상’ 출품을 여러 차례 거부한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정치적 한계를 여러 차례 드러낸 ‘청룡영화상’은 그러나 최근 여러 변화를 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난해 송강호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연기한 ‘변호인’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여러모로 시사 하는 바가 컸다. 영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예상밖의 결정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화룡점정은 여우주연상이었다. 독립영화 ‘한공주’의 천우희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기면서 객관성 면에서 ‘대종상’보다는 나은 결정을 한다는 인식, 대중성과 작품성의 절충을 고려한다는 인식을 심었다. 많은 네티즌들이 제2의 천우희들을 기대하게 된 데에는, ‘청룡영화상’의 이러한 선택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한 매체 보도에 따르면 대종상이 끝난 이틀 후 김구회 대종상영화제 조직위원장은 조직위 이사들에게 “국민들이 봤을 때는 부족함이 많은 행사였으나 우리끼리 얘기지만 이렇게라도 치를 수 있었던 게 다행이지 않습니까. 조금도 실망하시지 말고 힘내십시오”라는 문자를 돌렸다고 한다. 문제의 심각성을 아는지,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설마 진짜 모르는 것인지, 여러모로 놀라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김구회 위원장은 오늘 ‘청룡영화상’을 찾은 배우들(주요후보 30명 중 26명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배우들의 대종상 불참소식에 “우리나라 배우들 수준은 후진국 수준”이라고 발언을 하신 분이니, “미안하다, 내가 오해했다” 사과라도 해야 하지 않을지. 물론 기대일 뿐, 일어날 가망성은 0%다. 애석하게도.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팽현준 기자 pangp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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