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천재를 본 적 있는가. 만약 당신이 진짜 천재를 만나봤다면, ‘천재’라는 표현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지용과 성민제, 그리고 정재일. 어떤 단어로 이들을 설명할까 오랜 시간 고민했으나, 결국 ‘천재’라는 말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지난 18일과 19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LG아트센터에서는 ‘2015 디토 페스티벌-언타이틀드(Untitled)’ 공연이 열렸다. 올해로 아홉 번째 시즌을 맞이한 ‘디토 페스티벌’은 슈베르티아데(슈베르트의 밤)를 테마로 진행됐다. 피아니스트 지용,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 멀티 뮤지션 정재일은 ‘언타이들드’ 무대를 통해 슈베르트의 ‘마왕’을 재탄생시켰다.
지용 ‘행복을 찾는 길’
지용의 무대는 피아노 독주와 비주얼 아트의 결합으로 완성됐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보다 개인적인 경험을 비디오에 담았다.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뒤쫓는 ‘마왕’처럼 지용 역시 스스로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어두운 기운을 투영했다. 그는 또한 이 비디오 속에 슈베르트 가곡의 텍스트를 육성으로 되살려냈다.
이날 지용은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독주곡 ‘마왕’을 비롯해 ‘방랑자 D.493’ ‘그대에게 인사를 D.741′ ‘백조의 노래 D.954, No.4’를 연주했다. 그는 이번 작업에 대해 “나를 발견해 가는 여행”이라고 설명했다. 잔혹한 심리상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시작한 지용의 연주는, 이내 내면을 괴롭히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결국 평화를 얻는 순간으로 이어졌다.
특히 “아이는 그의 품 안에서 죽어있었다네(the child he held in his arms is dead, 괴테의 시 中)”라는 독백 뒤, 파도처럼 몰아치던 ‘마왕’의 독주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지용은 불안함에 떠는 아이에서부터 마왕의 달콤한 유혹과 집요한 추적 등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지용의 피아노는 이상에 가까울 만큼 아름다웠으나 그 이면에는 은밀한 고독과 절망, 비극이 감춰진 듯 했다.
성민제 ‘바스프레소를 위하여’
성민제의 무대는 네 대의 더블베이스로 채워졌다. ‘더블베이스가 독주를?’ 아마 많은 이들이 의아했으리라. 민첩하고 빠른 연주가 어려운 탓일까. 더블베이스에 대해서는 저음역의 반주악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성민제는 이러한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블베이스만으로도 다채로운 연주를 들려줬다. 네 대의 더블베이스는 각기 제1·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역할을 맡아 무대를 완성했다. 이를 위해 연주자들은 각 성부 별로 개방현의 조율을 다르게 했다. “더블베이스 네 대의 기준음을 다르게 조율하면 성부 간의 대비가 뚜렷해진다. 고음과 저음이 선명해지면서 다른 악기로 연주되는 것처럼 구별된다”는 게 성민제의 설명.
이날 성민제는 ‘마왕’을 비롯해 대중에게도 친숙한 ‘송어’와 ‘악흥의 순간 2번’ ‘거리의 악사’ 등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엮어냈다. 더블베이스 특유의 따뜻한 음색과 깊은 울림은 ‘악흥의 순간’에서는 로맨틱함을, ‘거리의 악사’에서는 고독한 풍경을 연출해내기도 했다. 연주자들의 뛰어난 테크닉이 빚어낸 ‘마왕’ 역시 일품이었다.
정재일 ‘마왕 시나위’
형식만 놓고 보자면, 가장 혁명적인 무대였다. ‘시나위’라는 제목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이날 정재일의 무대에는 소리꾼 정은혜를 비롯해 다양한 국악기 연주자들이 함께 올랐다. 여기에 4인조 오케스트라까지 더해져 크로스오버의 진수를 선보였다.
유일한 클래식 비전공자인 정재일은 프로듀서에 가까운 시각으로 슈베르트에 접근했다. 그는 ‘마왕’의 선율을 변주하거나 그로부터 받은 영감을 투영해내기도 했다. 극작가 배삼식의 도움을 받아 ‘마왕’의 텍스트를 새로 풀어냈으며 이는 화면을 통해, 또 정은혜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됐다.
슈베르트와 시나위, 그 사이에는 ‘마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왕’의 미스터리하고 마력적 분위기는 한국의 샤머니즘과 일맥상통했다. 정재일이 “한국적 성악”이라 칭한 정은혜의 소리는 흡사 무당의 것 같기도 했다. 정은혜는 주술을 외듯 노래를 하다가도 짐승처럼 거친 소리를 내고, 길게 가성을 뽑아내는 등 다이내믹하게 곡을 이끌었다. ‘신내림’을 받는 듯한 그의 소리는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시나위’라는 타이틀답게 즉흥성이 강조된 무대였다. 징과 장구, 아쟁 등의 전통 악기에 피아노와 스트링콰르텟, 판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중간 중간 들려오던 ‘마왕’의 선율이 짜릿함을 배가했다.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20분 동안 쉼 없이 이어졌다.
세 사람은 ‘언타이틀드’라는 제목의 즉흥곡을 선보이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정재일은 일렉트릭 기타를, 지용과 성민제는 각각 피아노와 더블베이스를 연주했다. 한 사람이 폭주(?)를 시작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두 연주자도 함께 에너지를 끓어 올렸다. 그러다가도 세 사람은 이내 숨을 죽이며 밸런스를 맞췄다. 즉흥임이 믿기 힘든 만큼 훌륭한 앙상블이었다.
‘디토 페스티벌’은 ‘공감하는 클래식’을 지향하는 음악 페스티벌로 지난 2007년 시작돼 매년 6, 7월 경 관객들을 찾고 있다. 지난 6일 리처드 용재 오닐의 ‘겨울나그네’로 포문을 연 이번 페스티벌은 오는 30일까지 LG아트센터와 예술의 전당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 스테판 피 재키브, 마이클 니콜라스, 스티븐 린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해 슈베르트의 음악을 새롭게 들려준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언타이틀드’ 트레일러 영상
지난 18일과 19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LG아트센터에서는 ‘2015 디토 페스티벌-언타이틀드(Untitled)’ 공연이 열렸다. 올해로 아홉 번째 시즌을 맞이한 ‘디토 페스티벌’은 슈베르티아데(슈베르트의 밤)를 테마로 진행됐다. 피아니스트 지용,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 멀티 뮤지션 정재일은 ‘언타이들드’ 무대를 통해 슈베르트의 ‘마왕’을 재탄생시켰다.
지용 ‘행복을 찾는 길’
지용의 무대는 피아노 독주와 비주얼 아트의 결합으로 완성됐다. 그는 이번 작업에서 보다 개인적인 경험을 비디오에 담았다.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뒤쫓는 ‘마왕’처럼 지용 역시 스스로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어두운 기운을 투영했다. 그는 또한 이 비디오 속에 슈베르트 가곡의 텍스트를 육성으로 되살려냈다.
이날 지용은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독주곡 ‘마왕’을 비롯해 ‘방랑자 D.493’ ‘그대에게 인사를 D.741′ ‘백조의 노래 D.954, No.4’를 연주했다. 그는 이번 작업에 대해 “나를 발견해 가는 여행”이라고 설명했다. 잔혹한 심리상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시작한 지용의 연주는, 이내 내면을 괴롭히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결국 평화를 얻는 순간으로 이어졌다.
특히 “아이는 그의 품 안에서 죽어있었다네(the child he held in his arms is dead, 괴테의 시 中)”라는 독백 뒤, 파도처럼 몰아치던 ‘마왕’의 독주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지용은 불안함에 떠는 아이에서부터 마왕의 달콤한 유혹과 집요한 추적 등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지용의 피아노는 이상에 가까울 만큼 아름다웠으나 그 이면에는 은밀한 고독과 절망, 비극이 감춰진 듯 했다.
성민제 ‘바스프레소를 위하여’
성민제의 무대는 네 대의 더블베이스로 채워졌다. ‘더블베이스가 독주를?’ 아마 많은 이들이 의아했으리라. 민첩하고 빠른 연주가 어려운 탓일까. 더블베이스에 대해서는 저음역의 반주악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성민제는 이러한 편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블베이스만으로도 다채로운 연주를 들려줬다. 네 대의 더블베이스는 각기 제1·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역할을 맡아 무대를 완성했다. 이를 위해 연주자들은 각 성부 별로 개방현의 조율을 다르게 했다. “더블베이스 네 대의 기준음을 다르게 조율하면 성부 간의 대비가 뚜렷해진다. 고음과 저음이 선명해지면서 다른 악기로 연주되는 것처럼 구별된다”는 게 성민제의 설명.
이날 성민제는 ‘마왕’을 비롯해 대중에게도 친숙한 ‘송어’와 ‘악흥의 순간 2번’ ‘거리의 악사’ 등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엮어냈다. 더블베이스 특유의 따뜻한 음색과 깊은 울림은 ‘악흥의 순간’에서는 로맨틱함을, ‘거리의 악사’에서는 고독한 풍경을 연출해내기도 했다. 연주자들의 뛰어난 테크닉이 빚어낸 ‘마왕’ 역시 일품이었다.
정재일 ‘마왕 시나위’
형식만 놓고 보자면, 가장 혁명적인 무대였다. ‘시나위’라는 제목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이날 정재일의 무대에는 소리꾼 정은혜를 비롯해 다양한 국악기 연주자들이 함께 올랐다. 여기에 4인조 오케스트라까지 더해져 크로스오버의 진수를 선보였다.
유일한 클래식 비전공자인 정재일은 프로듀서에 가까운 시각으로 슈베르트에 접근했다. 그는 ‘마왕’의 선율을 변주하거나 그로부터 받은 영감을 투영해내기도 했다. 극작가 배삼식의 도움을 받아 ‘마왕’의 텍스트를 새로 풀어냈으며 이는 화면을 통해, 또 정은혜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됐다.
슈베르트와 시나위, 그 사이에는 ‘마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왕’의 미스터리하고 마력적 분위기는 한국의 샤머니즘과 일맥상통했다. 정재일이 “한국적 성악”이라 칭한 정은혜의 소리는 흡사 무당의 것 같기도 했다. 정은혜는 주술을 외듯 노래를 하다가도 짐승처럼 거친 소리를 내고, 길게 가성을 뽑아내는 등 다이내믹하게 곡을 이끌었다. ‘신내림’을 받는 듯한 그의 소리는 관객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시나위’라는 타이틀답게 즉흥성이 강조된 무대였다. 징과 장구, 아쟁 등의 전통 악기에 피아노와 스트링콰르텟, 판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중간 중간 들려오던 ‘마왕’의 선율이 짜릿함을 배가했다.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20분 동안 쉼 없이 이어졌다.
세 사람은 ‘언타이틀드’라는 제목의 즉흥곡을 선보이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정재일은 일렉트릭 기타를, 지용과 성민제는 각각 피아노와 더블베이스를 연주했다. 한 사람이 폭주(?)를 시작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두 연주자도 함께 에너지를 끓어 올렸다. 그러다가도 세 사람은 이내 숨을 죽이며 밸런스를 맞췄다. 즉흥임이 믿기 힘든 만큼 훌륭한 앙상블이었다.
‘디토 페스티벌’은 ‘공감하는 클래식’을 지향하는 음악 페스티벌로 지난 2007년 시작돼 매년 6, 7월 경 관객들을 찾고 있다. 지난 6일 리처드 용재 오닐의 ‘겨울나그네’로 포문을 연 이번 페스티벌은 오는 30일까지 LG아트센터와 예술의 전당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 스테판 피 재키브, 마이클 니콜라스, 스티븐 린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해 슈베르트의 음악을 새롭게 들려준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언타이틀드’ 트레일러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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