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하고 오해하고 집착하다가 이별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흔하디흔한 멜로드라마로 보일법한 이야기는 감독이 설정한 여성캐릭터에 의해 독특한 분위기를 획득한다.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는 컴퓨터 운영체제(OS), 즉 실체가 없는 존재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스파이크 존즈는 시치미 뚝 떼고 진짜처럼 믿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 아니라 삶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걸 존중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라 말한 누구가의 생각을 빌리자면 ‘그녀’는 굉장한 리얼리즘 영화다.
지구상에 71억 인구가 있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진정 필요한 것은 나의 목소리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다. 오히려 그 많은 숫자들이 외로움을 배가 시킨다. 수많은 사람 중에 내 마음을 보듬어 줄 이 한 명 없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쓸쓸해지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관계에 집착할 확률이 높다. ‘그녀’의 남자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처럼.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손글씨 편지 닷컴’에서 일하는 대필 작가다. 탁월한 편지 쓰기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진심을 담은 연서는 쓰지 못한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오다가다 만난 여자들과도 잘 섞이지 못한다. 무미건조한 그의 삶이 ‘OS’를 구입하면서 변화를 맞는다. 사만다라는 이름의 OS는 컴퓨터 주제(?)에 감정을 느낀다. 자유자재로 말하고 눈치껏 상대의 기분도 살핀다. 경험을 통해 성장도 한다. 무엇보다 그 어떤 잔소리도 구속도 하지 않는다. 실체만 없을 뿐이지, 세상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인 셈이다. 관계 초반, 이들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는 테오도르다.
사랑에서 약자는 더 사랑하는 자라고 했던가. 감정을 느끼며 성장하는 사만다는 급기야 테오도르에게 사랑을 느낀다. 테오토르의 말동무는 될지언정, 그의 욕정은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도 한다. 아마, 전세계에 존재하는 사랑 관련 서적을 5초 만에 읽어냈을 사만다(그녀가 책 한 권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백분의 1초다)는 책 속에서 이러한 문구를 발견했을 것이다. ‘사랑에서 섹스는 중요하다!’ 결국 인간 대리인을 섭외, 테오도르와의 간접 성관계까지 시도한다. 처음 마주한 사랑 앞에서 사만다는 ‘사랑이 뭔 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낭랑 18세 같다.
사랑이 흥미로운 것은 그 관계가 생물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사만다가 한 차원 높은 존재로 발돋움 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역전된다. 테오도르가 그녀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사랑은 붕괴된다. 나만 바라보는 줄 알았던 사만다가 수 천 명과 동시에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테오도르의 표정은 어쩜 저리도 허망한지.
사랑은 상대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원초적인 욕구의 발로일 것이다. 나만의 ‘그녀/그’이길 바라듯, ‘그녀/그’만의 내가 되길 원하는 것이 사랑이고, 또 그래야만 사랑은 성립된다. 그것이 무너진 사만다와 테오토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당신이라는 책 속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요.”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던진 이 마지막 대사 앞에서 자꾸 배회하게 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란 ‘당신이라는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싶어 안달하다가, 차츰 나라는 책에 더 집중하게 되는 과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테오도르의 욕망에 복무하던 ‘대상(her)’으로서의 사만다가 서서히 ‘주체(she)’가 되어가면서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난다.
하지만 테오도르도 이 사랑에서 얻은 게 있다. 사만다가 떠난 후 테오도르는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겁쟁이가 아니다. ‘가짜’ 감정으로 타인의 사랑 편지만 쓰던 테오도르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담아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그렇게 그도 성장한다.
‘그녀’가 당신의 마음을 두드린다면, 그것은 특별한 연애담처럼 보이는 이야기 안에서 보편적인 감성을 제대로 길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SF 외피를 입은 ‘그녀’는 굉장한 리얼리즘 영화다.
그나저나, 관계에 있어 눈에 보이는 실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섹시한 스칼렛 요한슨에게 OS 목소리를 맡김으로서 스스로를 배반하는 역설을 드러낸다. 스칼렛 요한슨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풍만한 몸매를 상상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니까.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나도 한마디!][텐아시아 뉴스스탠드 바로가기]
[EVENT] 뮤지컬, 연극, 영화등 텐아시아 독자를 위해 준비한 다양한 이벤트!! 클릭!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