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입하기 힘든 비호감 캐릭터를 공감시키는 성숙된 연기력에 호평 쏟아지다
사람이 살다보면 인생을 바꿀 만한 기회를 여러 번 맞게 된다. 타고난 환경과 능력 때문에 주어진 기회의 생김새는 다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빛나게 할 기회는 꼭 한번 마주하게 된다. 그 기회를 잡느냐 마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열망이 크고 많은 준비를 해왔다면 인생을 바꿀 것이고 그만큼 열망이 크지 않고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면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선택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꾸준한 노력과 적절한 타협을 할 줄 알아야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절대 아니다. 자신의 욕망과 자존심만으로 밀어붙이다가는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된다.
SBS 특별기획 ‘세 번 결혼하는 여자’(극본 김수현, 연출 손정현)의 여주인공 은수(이지아)를 보다보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고 싶은 것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의 차이를 고민하게 된다. 첫회부터 본방사수를 해온 나는 하고 싶은 대로만 살다가 인생이 계속 꼬여 가는 은수의 거듭된 불행을 보면서 행복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은수는 한국 드라마에서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캐릭터다. 전남편 태원(송창의)이 “하고 싶은 대로만 산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물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딸 슬기(김지영)를 행복하게 해주려 노력하기보다 슬기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랄 정도로 이기적인 구석이 많은 문제적인 인물이다. 두 번째 이혼을 결정하고 친정에 왔을 때도 과묵한 아버지(한진희)가 마당에서 홀로 울고 있자 “아빠 미안해”라고 말하기보다 “아빠 나 괜찮아”라고 말할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슬기 새엄마 채린(손여은)을 악녀라 말하지만 사실 진정한 악녀는 은수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은수는 시크함으로 겉모습을 무장하고 자존심만 지키려다 낭패를 보는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김수현 작가의 안타까운 시선을 극대화한 인물이다. 지극히 상징화된 캐릭터인 탓에 아무리 여주인공이지만 방송 내내 동정보다는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은수의 선택과 행동들을 시청자들이 공감하기 힘들었던 것.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 뚜렷한 의미를 찾지 못하면 가차 없이 뒤돌아 버리는 은수의 모습은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어떻게 표현하든 욕먹을 ‘비호감 캐릭터’인 것. 그 어떤 여배우가 연기해도 사랑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악조건 가운데서 뚝심 있게 호연을 펼친 이지아의 내공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겉은 화려한 것 같지만 속은 공허하고 뜨겁게 타올랐다가 일순간 차갑게 돌변하는 이중적인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냈다. 방송 초 캐스팅 논란이 있었지만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은수는 화려하면서도 차가운 외모에 수많은 사연을 담은 듯한 아우라를 지닌 이지아에게 맞춤옷 같은 캐릭터였다.
이지아는 개인적인 연기 욕심을 부리기보다 김수현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살려내며 은수가 겪어나가는 희로애락을 담담하게 형상화해냈다. 드라마 속 많은 캐릭터들이 말하듯이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있는 것처럼 잘났다가 서서히 무너져 가면서 인생을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흔들었다.
난 특히 그 어느 누가 가르치려 해도 꼿꼿이 자존심을 지키던 은수가 딸 슬기에게 말 그대로 ‘한 방’ 먹을 때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슬기가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나 같은 애 만들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고 “난 절대 이혼은 안할 것이다”고 2연타를 날리자 은수가 혼자서 가슴의 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릴 때 나도 모든 시청자들과 함께 연민의 눈물을 흘렸다. 태어난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슬기와 홀로서기를 선택하는 결말은 역시 김수현 작가다웠다.
나는 은수가 태어난 아이에 대한 모정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한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너무 상처를 많이 받은 슬기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또한 아기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은 엄마의 배려였으리라. 과거의 은수 같았으면 두 아이 끼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만큼 은수도 인간적으로 성장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인물을 하나씩 하나씩 해체해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김수현 작가의 명불허전 필력에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다. 또한 힘든 여정을 통해 배우로서 스펙트럼을 넓힌 이지아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김수현 작가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김작가의 작품을 시청자들이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 통속성과 메시지의 적절한 조화일 터. 이번 작품은 결혼과 사랑에 대해 젊은 세대들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에 치중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초반에 미지근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야기가 주는 묵직한 메시지에 시청자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
과연 김작가가 젊은 세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뭘까. 그건 시청자들마다 의견이 다를 듯하다. 인생을 절반 정도 살아본 내 입장에서 보기에는 ‘인생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원하는 대로 풀리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만 너무 사랑하면 다른 사람과 삶을 공유할 수 없다. 함께 살고 싶으면 좀더 배려하고 양보해야 한다’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따뜻한 봄날 이미 어느 경지에 오른 70대 노작가의 따끔한 조언.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글. 최재욱 대중문화평론가 fatdeer69@gmail.com
사진제공. 3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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