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토커’의 인디아로 삐딱한 소녀의 붉은 욕망을 보여준 그녀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선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로 등장한다. 점점 되바라질수록 은근히 끌린다.

영화 ‘스토커’에서 미아 와시코브스카

갑자기 양로원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온 늙은 에브너(할 홀브록)는 마당에 누워서 인사하는 소녀와 마주친다. “넌 누구니?”라고 묻자, 롤리타처럼 앳된 소녀는 태연하게 “전 파멜라에요. 일광욕 중이죠”라고 답한다. 이 영화는 홀브록의 관록 연기가 빛나던 2009년작 ‘댓 이브닝 선’이었다. 고집불통 할아버지에게 불쑥 나타나 태연하게 말을 건네던 이 소녀는 미아 와시코브스카였다. 십대 소녀는 데이트나 사적인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늘어놓았다. 깜짝 놀랄 정도의 미모는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골 소녀에겐 묘한 매력이 엿보였다. 그렇게 풋풋했던 미아는 198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에서 태어난 후 성장했다. 사진작가인 폴란드계 어머니와 화가인 오스트레일리아계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았다. 아홉 살부터 발레리나를 꿈꾸며 발레 수업을 받았지만, 열네 살 때 사고로 상처를 입은 후 발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바로 배우로 전향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서버번 레이디’(2006)에 처음 출연했고, 미드 ‘인 트리트먼트’(2008)에 출연하면서 할리우드와도 인연을 맺었다. 조니 뎁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당시 앨리스 역의 신인 배우 미아에 대해 많은 기사를 썼다. 예를 들면 그녀의 성은 정확하게 ‘바시코브스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미아의 연기가 그렇게 돋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아니라 숙녀 앨리스는 어딘가 어색했다.

영화 ‘댓 이브닝 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스트리스’ ‘에브리바디 올라잇’ 스틸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오히려 그해 가을에 개봉했던 ‘에브리바디 올라잇’(2010)에서 긴 생머리 조니로 등장할 때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 살이 된 그녀는 ‘로미오와 줄리엣’(1996)에 나왔던 클레어 데인즈와 어딘가 비슷했다. 굳이 지적하자면, 나이가 들면 점점 미운 오리처럼 변하는 그런 스타일 말이다. 다만 금색 눈썹이 하얀 피부 속으로 사라지는 덕분에, 가끔 눈썹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신기했다. 영화에서 닉(아네트 베닝)의 딸로 나온 그녀는 동생과 함께 생물학적 아빠 폴(마크 러팔로)을 만나면서 상황이 막장 드라마처럼 꼬인다. 이 복잡한 가족 영화는 줄리안 무어나 아네트 베닝의 것이 아니라, 사실 “게이 엄마들이 지겹다”고 항변하는 미아의 성장 드라마였다. 여기서 그녀는 청바지와 스니커즈로 향긋한 청춘을 발산했다. 그 후 ‘제인 에어’와 ‘레스트리스’에서 좀 더 변신을 시도하며 다양한 로맨스를 펼쳤다. 제인 에어 같은 고전 미인(운명적인 사랑)으로 피어나거나 암 판정을 받은 소녀 애나벨(숏컷 헤어)로 등장해 당돌한 사랑을 나누었다. 영화의 완성도에는 불만이 좀 있었지만, 그녀가 보여준 가능성은 충분했다. 남장 여자의 이야기 ‘앨버트 놉스’에서 속물적인 하녀나 ‘로우리스’에서 샤이아 라보프의 마음을 훔친 새침떼기도 나쁘지 않았다. 단지 글렌 클로즈나 제시카 차스테인의 지독한 존재감 때문에 그녀는 그저 애송이로 보였을 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기다렸던 것은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였다. 인디아 역의 미아가 니콜 키드먼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씨엘의 ‘나쁜 기집애’ 가사처럼 여왕벌로 군림하거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된 미아가 필요했다.

영화 ‘스토커’(왼쪽)와 ‘오직 사랑하는 이들’ 스틸

지나치게 저평가를 받은 ‘스토커’는 사실 엿보기(관음증)에 관한 영화였다. 인디아는 섹스와 신성한 피(살인)에 눈을 뜨고, 관객은 그녀의 욕망을 끊임없이 훔쳐본다. 영화 속의 기괴한 살인은 인디아에겐 성장통이지만, 관객에겐 그녀를 욕망한 대가로 얻는 처벌이나 다름없다. 엔딩에서 인디아가 태연하게 삼촌 찰리를 총으로 쏘고, 정원 가위로 경찰의 목을 자를 때, 다분히 그녀를 훔쳐보는 ‘피핑 탐’들을 의식한다. 그녀의 총구는 놀랍게도 우리를 향하고 있다. 미아가 입증한 것은 간단하다. 검은 머리 미아는 롤리타가 아니다. 남성 관객을 위한 향락은 없다. 그렇게 인디아는 남성의 욕망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캐릭터였다. 철저하게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한다. 그런 역할을 하나 추가한 것이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였다. 이 영화는 이브(틸다 스윈튼)와 아담(톰 히들스턴)을 위한 뱀파이어 연애담이라서 미아를 위한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통제 불능 애바로 잠시 뻔뻔하게 등장해 안톤 옐친의 피를 쪽 빨아버린다. 도도하게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스릴 만점의 배드 걸이라는 것을 알린다. 이 스타일이 무척 돋보이니, 국내에 방문했을 때 선보인 멍청한 헤어스타일(바가지 머리?)은 잊어도 좋다. 현재 제시 아이젠버그와 호흡을 맞춘 ‘더블’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소피 바르트의 ‘마담 보바리’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맵스 투 더 스타즈’도 이미 촬영을 마친 상태다. 사극과 현대극, 멜로와 스릴러. 다양한 장르를 쉽게 오가는 것은 그녀만의 무서운 장점이다. 그럼에도 조금 더 나쁜 언니로 거듭나서 수컷들을 마음껏 쥐락펴락하면 좋겠지!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박수정 soverus@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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