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스칼전

“어디 있었지?”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집에서 급하게 음반을 찾기 시작했다. 베보 발데스의 ‘Live At The Village Vanguard’(2006)를 다시 듣고 싶었다. 순전히 ‘마리스칼’전을 보고 온 후유증이자, 베보의 피아노를 듣고 싶은 금단 현상이었다. 쿠바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베보는 올해 3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영화 ‘치코와 리타’에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건데, 하비에르 마리스칼 전시(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치코와 리타’ 메이킹 필름(2010)이 상영되고 있다. 마리스칼이 ‘치코와 리타’를 손수 그렸기 때문이다. 혹시 마리스칼이라는 이름이 낯설다고 해도,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전시장에 가면 어디선가 본 디자인들이 활짝 웃으며 환영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로 유명한 코비나 마지스 사의 훌리안이 마리스칼의 아이다. 디자이너 마리스칼은 스스로를 놀이처럼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아트 플레이어라고 칭한다. 그가 왜 아트 플레이어인지 알고 싶다면, 이 전시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전시의 출발은 스케치 룸에서 시작된다. 아마 입구부터 다소 놀라게 될 것이다. 그의 스케치 벽(?)을 뚫고 안으로 계속 들어가기 때문이다. 디자인이나 예술이 어려운 개념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제약 없는 상상력과 삶의 기쁨을 담은 색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천적 난독증으로 모든 생각을 그림으로만 표현했던 마리스칼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됐는지를 엿보는 기회다. 혹시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다면, ‘치코와 리타’ OST를 추천한다.

책 ‘폴 스미스 스타일’(왼쪽)과 ‘좀 재미있게 살 수 없을까?’

마리스칼 덕분에 디자인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당장 펼쳐보는 것도 좋다. 이번에는 영국의 디자이너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자. 난독증 때문에 “측면으로 생각한다(빠르게 빙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폴 스미스는 ‘폴 스미스 스타일’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다. 이것은 취향(수집광)의 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실 그의 전시를 본 사람이라면 더욱 이해하기 쉬운데, 그는 책과 수집품들을 늘 정신없이 늘어놓는다. 책을 옆으로 정리하지 않고, 책장 없이 위로 쌓아 올리는 습관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스타일에 공감을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좀 재미있게 살 수 없을까?’라는 부제를 단 고성연의 ‘영국의 크리에이터에게 묻다’를 훑어보자. 17명의 인터뷰(디자이너, 건축가, CEO, 크리에이터들)를 담은 책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미친 듯이 정독을 하면 곤란하다. 그저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가볍게 넘겨보자.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나 예술작품이 나오면 조금 관심을 보이는 방식이 좋을 것 같다. 물론 이 책에서 소개되는 괴짜들은 자신의 감각을 믿고 끊임없이 도전해 성공한 사람들이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다. 긱(자기만의 괴짜성)의 정신으로 장인이 된 사람들이다. 추상 조각가 앤소니 카로나 건축계의 여제 어맨다 레베트, 런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토머스 헤더윅 같은 인물을 소개한 것이 흥미를 더한다. 영국에 다시 가서 이들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 나만의 감각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도 샘솟는다.

연극 ‘레드’

끝으로 미술에 대한 연극을 소개한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다. 연극 ‘레드’는 러시아 출신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와 조수 켄의 대화만으로 구성된 2인극이다. 로스코의 추상 미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 연극을 꼭 봐야 할 정도로, 로스코의 본질을 연극 안에 담아냈다. 이 연극은 표면적으로 마크 로스코의 씨그램 벽화 사건이 모티브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로스코는 앤디 워홀이 이끄는 팝 아트의 도래가 못마땅한 아버지 세대를 상징한다. 전 세대를 죽이는(극복하려는) 아들 세대의 부친살해 전통이 극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다. 하지만 성숙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대 간의 이해와 화합이 이루어진다. 이 연극의 묘미는 자연광 없는 동굴과도 같은 로스코의 작업실을 재현한데 있다. 배우들이 직접 페인팅을 하기 때문에, 실제 미술가의 화실을 슬쩍 훔쳐보는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 이 연극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도대체 언제 붓을 놓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DMZ 영화제에서 코리나 벨즈의 다큐멘터리의 ‘게르하르트 리히터 회화’(2011)를 본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리히터가 언제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확신하는지 궁금했다. 극의 초반부에 조수 켄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로스코는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하지 않지만, 레드를 살아있음에 대한 열망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그 답변으로 충분하다. 로스코 역은 강신일, 켄 역은 강필석, 한지상이 맡았다. 1월 26일까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붉은 물감의 향연은 계속 된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 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박수정 soverus@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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