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속 황정음

KBS2 ‘비밀’에서 비극의 여인, 강유정을 연기하는 배우 황정음을 향한 찬사가 뜨겁다.

강유정은 연인에게 버림받고, 그 과정에서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이를 잃고, 또 삶의 유일한 끈이었던 아버지까지도 허망하게 잃어버린 가여운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강인한 여인이다. 어떠한 비극이 자신의 삶을 옥죄어도 그녀는 남탓을 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보려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인물을 겹겹이 싸버린 아픔과 그 속에서도 다시 솟아나려는 뜨거운 의지는 때로는 보는 이의 숨통을 조이게 만드는데, 황정음은 그런 강유정의 비극의 서사를 무리 없이 끌어왔다.

모든 감정선의 디테일을 살려 노련하게 연기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강유정의 아픔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표현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황정음의 배우로서의 행보 초반을 떠올려보면, ‘비밀’ 속 그녀의 모습은 격세지감이다.

‘골든타임’(위)과 ‘자이언트’ 속 황정음

2002년 걸그룹 슈가로 데뷔했고, 2005년 드라마 ‘루루공주’를 시작으로, 또 2007년 ‘사랑하는 사람아’와 ‘겨울새’ 등으로 본격적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그는 걸그룹 시절의 상큼함과는 또 다른 도회적 외모로 눈길을 끌기는 했지만, ‘발연기’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연기자로 뚜렷한 성과가 없었던 황정음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실제 연인 사이인 SG워너비 멤버 김용준과 MBC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덕분에 황정음이라는 이름 석 자를 다시 한 번 대중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이후 당시만 해도 흥행 메이커로 불리었던 김병욱 PD의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시트콤 연기 속에 녹여 뚜렷한 색깔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의 황정음을 만든 것은 이후의 행보다. 세간은 황정음을 여전히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보여준 철없는 막내딸로만 기억하고 있을지언정, 그는 그런 통통 튀는 청춘의 이미지를 함께 가져가면서도 시대극이나 주말 가족극, 의학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 속에 몸을 던져 자신을 변주시켜왔다.

스스로는 단 한 번도 배우로서의 사명감을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았지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증명했다.

그러나 용감한 도전 이면에도 아픔은 있었다. ‘지붕뚫고 하이킥’ 이후 그가 도전한 시대극 ‘자이언트’ 때까지만 해도 황정음은 여전히 연기력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실제 당시의 황정음은 시트콤 속 캐릭터를 벗어나지 못한 듯, 정극 연기를 하는 상대배우들과의 호흡이 엇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절절한 감정신에서도 이후로도 줄곧 황정음의 문제점으로 지적을 받았던 아기 목소리를 내는 발성을 보여줬고, 감정이 아닌 테크닉이 앞선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하지만 ‘자이언트’에서 맞은 매는 그를 혹독하게 키웠나보다. 그 다음 선택한 주말극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 첫 주연을 맡은 그는 시트콤스러운 모습을 완전히 벗어 캐릭터의 톤을 서정적인 극과 잘 맞추어나갔다. 지금처럼 엄청난 찬사를 받지는 못했지만, 무난한 점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의학드라마 ‘골든타임’ 속 황정음은 그 스스로가 이미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진 듯한 인상을 전했고, ‘돈의 화신’에서도 그의 주가는 점점 상승세를 이어갔다.

‘비밀’ 속 황정음

그리고 비로소 그녀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비밀’을 만나게 됐다.

황정음은 이미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부터 연기자로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비밀’에서는 테크닉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진실된 연기로 보는 이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깊이가 생긴 것이다.

물론 ‘비밀’의 황정음이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여전히 설익은 지점들은 존재하고, 인물의 굵직굵직한 감정들은 전달을 하지만 세세한 디테일까지 살아있다고는 평가할 수 없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발성에도 여전히 한계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정음은 ‘비밀’을 통해 배우로서의 신뢰도를 얻게 됐다. 그녀의 연기가 아직은 다소 서툴지언정, 그녀의 강유정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고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황정음의 강유정이 시청자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감정이입은 노련한 테크닉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고 결국 그것이 신뢰받는 배우가 될 수 있는 까닭이 됐다.

‘비밀’의 황정음, 그녀를 아직 만개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황정음이 만개하는 순간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다.

덧붙여, 연기력 논란을 딛고 타인의 감정을 움직일만한 연기를 보여준 과정들은 여러 배우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다. 특히 자신이 잘 하는 것 하나에만 목을 매며 두려움에 안주하는 연기자들에게는 더더욱 귀감이 될 행보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제공.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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