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정말 죽고 싶었어요”



엄살은 아니었다. 호탕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는 조인성의 모습에서 오수의 고독감은 어느 정도 비워져 있었지만 그로서는 작품의 깊이와 무게감을 온 몸으로 안고 있던 6개월의 시간은 정말이지 ‘숨도 못 쉴 만큼’의 무게를 맛봤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혹독했던 <그 겨울, 바람이 분다>(극본 노희경, 연출 김규태, 이하 그 겨울)를 보내고, 며칠간 약간의 해방감과 큰 허탈감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그와 함께 작품의 여정을 돌아봤다.

Q.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눈물을 많이 쏟았다고 들었다.

조인성 : (김)범이 붙잡고 많이 울었다. 마지막 장면을 찍고 나니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비디오로 영이에게 얘기하는 신이 마지막이었는데 근처에 헬기가 5분에 한 대씩 뜨면서 두 페이지 분량의 대사를 소화하기가 많이 힘들더라. 불안해하면서 찍고 마무리하다보니 마지막에 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Q. 제대 후 작품 선택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조인성 :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웃음) 특별한 의도는 없었는데 찍기로 했었던 영화 ‘권법’이 계속 미뤄지는 바람에 원치 않게 계속 쉬게 됐던 사연이 있었다. 영화를 하러 나왔는데 자꾸만 밀리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다른 걸 선택하자니 이미 캐스팅 끝난 작품이 많아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쉬는 시간이 많아졌더라.



Q. 처음 <그 겨울>을 선택하고 촬영에 들어갈 땐 어떤 마음이었나

조인성 :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처음엔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대본을 읽어보려고 활자를 보면 막막해지더라. 어느 포인트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낯설었다. 연기 선생님을 찾아가 하나하나 감정을 끌어올리면서 연습했다. 그러면서 ‘이 대본은 1차원으로 읽으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죽은 희주에 대한 감정, 사기를 쳐야 한다는 압박감, 영이를 사랑하게 된 후 생기는 죄책감, 무철에게 쫓기는 긴장감까지…. 6~7개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역할이라 나중엔 “작가님이 나에게 왜 이러실까?”라는 생각마저 들더라.(웃음)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배종옥 선생님이 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며 본인도 ‘거짓말’을 찍을 때 죽고 싶었지만 “죽지는 않는다”며 위로하시더라. 정말 죽진 않았다.(웃음)



Q. 극중 오수의 눈물 연기가 적지 않은 화제가 됐다. 남자배우지만 마치 여배우처럼 눈물 연기에 강하다는 평가가 많다.

조인성 : 눈물 연기할 때 가장 부담스럽긴 하다. 우는 것에 대한 회자가 늘 많이 되고 패러디도 되는 편이라서. 이번엔 좀 다르게 담으려고 노력했다. 작가님이 “같은 연기를 하더라도 네가 나이가 먹고 달라져서 보는 분들도 다르게 느끼실 거야”라고 얘기해주셨다. 시청자들이 내 감정을 따라오기 시작하면 어떻게 울어도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9부 정도까지 찍었을 때 작가님이 ‘이러다 배우들 죽겠다’ 싶었던지 그만 울라고 하시더라. 물론 그 후에도 대본엔 ‘운다’는 지문이 많았지만.(웃음)

Q. 스스로 평가해도 멋있다고 느껴진 장면이 있나

조인성 : 9부에서 영이를 구해주고 조직폭력배의 머리를 벽에 대고 긁는 모습이 모든 남자배우들이 한번쯤 해보고 싶은 로망이 담긴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Q. 오수와 오영의 로맨스 장면을 20-30대 여성 팬들이 무척 좋아했다. 손꼽을 만한 로맨스 장면은

조인성 : 산장에서 오수가 영이에게 마치 아빠처럼 양말을 신겨주는 장면이 있었다. 남자친구이자 아빠의 모습을 보여준 장면인 것 같다.대본을 보며 아버지가 아이들의 양말을 신겨주는 다정하고 꼼꼼한 모습이 문득 떠오르더라. 내가 좀더 어렸을 때는 그 장면을 이해 못했을 것 같은데, ‘아, 내가 이제 연기를 이해하면서 하는구나’란 뿌듯함이 있었다.



Q. 사는 데 별 의미를 두지 않던 오수가 끝까지 살고 싶어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조인성 :’왜 수가 살고 싶어하는 걸까. 엄마라도 만나고 싶어하는걸까’란 생각을 내내 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수는 어머니에게 버려지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죽었고 상처만 받은 채 의미 없이 하루하루 살지만 어쨌든 나도 살면 안돼는 거냐, 라고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 그러니까 ‘너희들도 살아’라고 얘기하고 싶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데, 결국 드라마가 하고픈 얘기는 이런 부분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살아나가라, 결국 사랑을 통해 살고 싶어하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



Q. 마지막에 진성(김범)에게 칼을 맞는 장면은 재촬영까지 했다고 들었다.

조인성 :수를 찌르는 장면에서 범이가 감정이 확 터지지 않아서 자책하다보니 좀 힘들게 촬영을 했었다. 끝나고 ‘잘 했어’라고 얘기를 해주니 엉엉 울더라. 그래서 내가 범이를 꼭 안아줬던 기억이 난다.본인의 연기에 욕심이 날 때 잘 되지 않으면 착잡해지는데 그걸 상대방이 배려해줬을 때는 참 고마운 느낌이지 않나. 아마 범이도 그런 기분을 좀 느꼈던것 같다. 이런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다.

Q. 오수라는 캐릭터가 아직 조인성 안에 많이 남아 있나

조인성 : 쫑파티 다음날 집에 있는데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노 작가님께 문득 전화를 드렸는데 눈물이 계속 나더라. 2시간 넘게 수화기를 붙잡고 울었다. 아무 이유 없이 하염없이 울면서 “몇 신만 더 써 달라”고, “더 잘 하고 오겠다”고 하니 선생님이 아무 말 없이 받아주시면서 너무 쏟아붓지 말라고, 배우로서 명줄 준다고 그러시더라. 누가 들으면 ‘너만 배우냐’라며 웃을지 모르지만, 그땐 왠일인지 눈물만 났다.



Q. 결말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었다.

조인성 :이미 해피엔딩임을 공유하고 있던 상황이라 오수가 죽는 것처럼 처음에 묘사된 것은 긴장감을 주기 위한 연출이었던 것 같다. 마치 동화 속 사랑이야기처럼. 한편으론 영이와 수가 너무 힘든 사랑을 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좀 몽환적인 느낌을 준 것 같다.

Q. <그 겨울> 때문에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많이 높아졌겠다. 미련도 있고.

조인성 : 그래서 지금이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들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순간이 안 올 수도 있으니 잘 즐기려고 한다. 또 온다면 너무 감사하겠지만.



Q. 당분간 드라마는 못 하겠다는 생각도 들겠다

조인성 : 묻고 싶은 부분이다. 내가 몇개월 있다 연말쯤 다시 또 다른 드라마를 한다면 그게 득일지 실일지 모르겠다. 빨리 작품을 하라고는 하시는데 이렇게 몰입도 높은 작품을 하고 나서 또다시 멜로 드라마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다. 시청자들에게도 잊을 만한 시간을 줘야 하지 않나.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을 표출해내는 연기를 하는 편이라 내 걸 버리고 연기하지는 못한다. 나로서는 기다릴 명분이 생긴 것 같다.(웃음)

Q. 남자배우로서 어떻게 나이들어가고 싶나.

조인성 : ‘안티에이징’이란 말이 참 무섭다. 나이 드는 걸 멈춘다는 건 죽음을 뜻하는 얘기지 않나. 자연스럽게 나이드는 모습이 40, 50이 되어서도 드러날 수 있으면 그게 행운 아닐까 싶다.

Q. 지금 연기에 굳이 점수를 준다면

조인성 : 70점 정도 주고 싶다. 나머지 30점은 앞으로 10년마다 10점씩 채워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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