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끝났다. 지난 7월 29일부터 3일 동안 진행된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이하 지산)은 이제 수많은 이들의 기억과 기록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행사를 취재했던 매체가 할 수 있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과연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느냐다. <10 아시아>는 시간순의 나열 대신 3일 동안 가장 흥미롭고 인상적인 순간들로 올해의 지산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에 스테이지를 달궜던 여러 뮤지션들의 무대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의 리뷰와 일본에서 온 실력파 밴드 ONE OK ROCK과의 인터뷰, 올해 지산 최고의 무대였던 UV의 공연에 대한 리포팅으로 좀 더 명확한 그림을 남겨본다.




짐승 사운드의 향연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셈인가. 지산에서의 첫 날, 3면이 막힌 그린 스테이지는 헤비니스를 추종하는 격렬 팬들을 따로 수용 관리하기 위한 울타리 역할을 했다. 극렬하게 긁어대는 헤비 리프와 절규에 가까운 보컬의 포스트록 그룹 엔비의 공연부터 시작된 이 짐승 사운드의 향연은 펑크의 얼개에 하드코어적 파워를 담은 아폴로 18의 무대를 거쳐, 말이 필요 없는 한국 스래시 메탈의 거두 크래시로 이어진 뒤, 말도 안 되는 스피드와 가공할 파괴력의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아타리 틴에이지 라이어트의 무대로 마무리되었다. 이 땀내 나는 짐승 취향의 관객들은 몇 시간 동안의 헤드뱅잉 끝에 뒷목 잡고 쓰러졌으니, 이튿날 지산을 수놓은 새들의 지저귐은 그래서 평온했나보다.





돌고래만 들을 수 있습니다
초코파이가 노래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고. 첫 솔로 싱글 ‘걸어온다’를 지산에서 공개한 2AM 진운 역시 그런 이심전심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진성에서 가성으로 넘어가는 파트에서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이크 사고를 걱정했지만 다시 진성 부분에선 쩌렁쩌렁한 목청을 자랑했다. 하여, 이것은 사고가 아니다. 가성이 너무 높아 인간의 가청 범위를 넘어선 사건이다. 물론 그 때문에 관객들은 ‘마치 파도에 모래성이 쓸려가듯 기억들은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끝내려 한다’는 서정적 가사를 귀로 듣지 못했지만, 무슨 상관인가. 열린 마음은 그 모든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을. 혹 공연을 보고서도 듣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록페스티벌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닫힌 마음을 탓하자.





나 잘해써? 쿠루리
해외 뮤지션들이 서툰 한국어로 건네는 인사는 록페스티벌의 흔한 광경이다. 하지만 “여러분, 조아~? 안녕, 쿠루리이무니다”로 시작된 쿠루리의 한국어 퍼레이드는 예의 수준이 아니라, 거의 만담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알린 그 곡,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O.S.T ‘ハイウェイ(하이웨이)’에 쏟아진 함성만큼이나 키시다 시게루의 “안뇽, 오빠. 안뇽, 온니(언니). 안뇽, 모두. 사랑해요. 재미써요?”에 이어진 웃음소리도 컸다. 원래 라이브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유난히 음이탈이 많았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오고 시퍼써요. 최고, 최고, 고마워. 한국마를(한국말을), 나 잘 해써? 조아? 조아? 조~조~조~ 조아?”라며 천진난만하게 묻는 그들에게 관객들이 들려 준 대답은 당연히, “조~아~!”





명랑한 UV가 지구를 구한다
2011년 7월 30일 밤 11시,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 한켠에서는 소리 없이 강하게,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다 UV 보러 가는 사람들이야? 아하하, 거~짓말” 누군가의 말처럼 그린 스테이지로 향하는 인파는 거짓말같이 많았다. 하지만 게르만족 대이동이 그랬듯 그 밤, 지산의 질척한 땅에 기록한 수만의 발자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히 기록될 것이다. ‘Love & Peace’라는 록페스티벌의 정신을 가장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증명한 UV와의 영접. 마치 신을 향한 그것인 듯 “UV! UV! UV!”를 연호한 사람들과 “음악 잘 하는 친구들, 요리 잘 하는 친구들”로 구성된 ‘UV LAND’가 주고받은 보라빛깔 정신적 교감. 자외선의 위협에 노출된 지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러 떠났던 UV는 이 날 지산에서 또 한 번 세계를 구했다. 그들의 음악이 장난 같은가? 그 무대를 보았다면, 결코 웃을 수 없을 것이다. 명랑한 UV가 지구를 구한다! 이것이 UV의 록이다!





델리스파이스와 옐로우 몬스터즈, 드러머를 찾아라
올해 지산을 찾은 유명 해외 아티스트만큼 많은 이들이 기대한 무대가 바로 델리스파이스의 컴백이 아닐까. 그런데 낯선 드러머의 모습에 놀란 사람들도 있을 듯. 최재혁은 어디 갔냐고? 둘째 날 빅탑 스테이지 첫 무대를 장식한 옐로우몬스터즈의 무대에서 드럼 세트를 부술 듯 열정적인 펑크 비트를 선사한 그 드러머,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지 않던가. 최재혁은 이번 지산 무대에 마이앤트메리의 베이스 한진영과 검엑스의 기타&보컬 이용원과 함께 결성한 새로운 프로젝트 밴드, ‘옐로우 몬스터즈’로 섰다.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와 윤준호, 최재혁이 속한 프로젝트 밴드 ‘오메가3’로 나뉘어 활동했던 델리스파이스인 만큼 개별 활동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3년 만에 무대에 선 그들을 기다린 팬들에겐 조금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브랜든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록페스티벌 메인 스테이지에서 맨 앞 펜스를 확보해야 할 이유는 백 가지 정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대가 인큐버스나 스웨이드라면 이유는 단 하나로 소급한다. 가장 가까이서 브랜든 보이드 혹은 브랫 앤더슨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 브랫이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어필했다면 브랜든은 노래에만 집중하는 것 같으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셔츠를 벗는 등 무심하듯 시크하게 매력을 어필했다. 특히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음악에 취해 희열을 느끼는 그의 모습은 섹시하거나 아름답기 이전에 어딘가 성스러울 정도다. 심지어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과 적당한 수염은 누군가를 계속 연상케 하니 이것이 지상, 아니 지산의 복음이라.





It`s Raining
올해의 지산을 지배했던 월드스타는 테크노의 거장 케미컬 브라더스도, 7년 만에 재결성한 스웨이드도 아닌 비였다. It`s Raining. 쏟아지는 비는, 질척거리는 땅바닥은,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의 전유물이라고 굳게 믿던 이들에게 사흘째 되던 날 떨어진 물 폭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스트였다. 특히 인큐버스의 무대 초반에 쏟아진 비는 레인부츠와 우의로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몇몇 관객들은 해탈한 표정으로 상의와 신발을 벗고 온몸으로 비를 맞이했다. 과연 무엇이 비를 대하는 현명한 태도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휴식을 바라며 올해 처음 지산을 찾았던 이라면 다음과 같이 투덜댈 수밖에 없다. 왜 할리우드 놔두고 지산에 오냐고, 비는.





이것이 일반인 코스프레다
록페스티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탈의 무대’다. 푸른 초원과 함께 하는 지산은 더욱 그렇다. 이브닝드레스부터 비키니, 킬힐에서 맨발까지, 이곳이 남의 눈을 가장 많이 신경 쓴다는 대한민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유로운 모습으로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록페스티벌이다. 그런데 너무 차려입은, 지나치게 자의식을 드러낸 차림새를 촌스럽다고 비웃는 이들이 있었다. 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듯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 영락없는 이천시 마장면 영농후계자 같았던 김지수. 그리고 한겨울엔 부인의 모피코트를 입고 방송국을 활보한다는 전설의 패셔니스타로서의 면모를 분당에 두고 온 유영석이 그들이다. 특히 유영석은 프레스 룸 소파에 앉아있었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 했다는 슬픈 전설마저 전해지니…





DJ DOC의 무리수
수많은 수라장을 거친 늙은 사자에게도 첫 록페스티벌 메인 스테이지는 낯설고 두려운 무대였나 보다. 첫날 케미컬 브라더스 직전 빅탑 스테이지에 오른 DJ DOC는 “저희 쫄았거든요. 예전에 싸이가 펜타에서 병 맞았다더라고요”라는 농담으로 부담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사실 평소의 페이스대로만 해도 얼마든지 지산을 장악할 수 있는 DOC였지만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무리수로 이어졌으니 ‘Street Life’ 이후 바지를 내리는 장난을 치고야 말았다. 눈살을 찌푸릴 광경은 아니었으나 또 딱히 보고 싶은 라인은 아니었으니 이것만큼은 DOC답지 않은 에러였다. 형들,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내 건강은 소중하니까요
더웠고, 비에 젖은 땅은 질척거렸다. 쨍하게 맑았던 작년의 지산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올해는 다소 지치고 힘든 날씨였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발휘되는 기지가 있다. 덥고 습한 날씨에 지나치게 열광하다 보면 자칫 탈진해 실려 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쉽다. 공연 사이 사이 멀티비전에는 ‘안전을 위해 물을 마시자’는 경고가 수시로 띄어졌지만 손에 든 물통은 번거로운 것이 사실. 그 때,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 맥주를 달고 다닌 심슨처럼 머리 양쪽에 물통을 달고 빨대로 이어 물을 마시는 한 남자. 자체 이동 급수를 실현한 참신함도 대단하지만, 더욱 인상적인 것은 애티튜드였다. 신기함과 부러움에 힐끗 거리는 사람들의 눈길에도, 대포처럼 자신을 겨눈 카메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짝다리로 서서 문자를 확인하는 그 위풍당당함. 나도 모르게 달려가 “저도 한 모금만!”을 외칠 뻔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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