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첫사랑이 아니었던 사람이 쓴 소설. 루시드 폴의 첫 소설집 <무국적 요리>에 대한 첫인상이다. 그래서 8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소설집은 루시드 폴이라는 음악가가 들려주던 위로나 치유를 기대했던 이들이라면 약간의 당혹감마저 느낄지 모를 독특한 상상의 세계를 품고 있다. “평소에 좋아하던 가수이자 작가인 시코 바르키가 <부다페스트>라는 소설을 냈어요. 그 책을 번역하고 싶어서 출판사를 알아보았는데 그 때 인연을 맺은 담당자 분이 출판사를 내시게 되면서 제게 책을 내보자고 권하셨죠.” 스스로 “소설을 많이 읽고 자란 문학 소년도 아니었고 지금도 문학보다는 다른 책을 많이 읽는”다고 밝힌 루시드 폴은 번역을 하면서 소설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한 소설을 끊임없이 읽다 보니, 정말 재밌는 거예요. 창조자로서 어떤 세상을 만들고 구조적으로 디자인 하고 캐릭터들을 움직이고 관계를 만드는 게 신기하더라구요. 나도 이런 얘기를 재밌게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시작이 재미였기 때문일까. 첫 소설집에 대한 주위의 반응 중 그를 가장 신나게 한 것도 재밌다는 반응이다. “디어 클라우드의 용린이한테서 너무 재밌어요 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예요. 잘 썼다, 감동적이다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재밌다는 칭찬이 뿌듯하더라구요.”
많은 경우 소설가의 첫 소설은 자기 이야기이기 쉽다. 하지만 <무국적 요리>에 담긴 이야기들은 작가의 자기 투영보다는 상상의 세계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소설가가 혹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 이가 쓴 소설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으며 루시드 폴에게 소설가라는 이름이 남게 된 것 같다. 그가 이렇게 작가의 이름, 즐거움, 카타르시스를 갖게 된 계기는 음악인으로서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데서 비롯되었다. “작년에 음악 활동을 거의 쉬었는데 그 시간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어요. 쉬면서 계속 생각한 게 음악 자체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은데 내가 하고 있는 건 굉장히 작은 영역이더라구요. 가사에 대해 사람들이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할 때도 있고 오독할 때도 있고 나조차도 표현하고 싶은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 하기도 하고. 결국 음악인으로서 나의 정체성과 한계가 뭔지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본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그 결과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여러 문장에 눈길이 머물게 될 ‘탕’을 시작으로 마지막 문장에 푸핫! 하고 웃음이 터질 ‘행성이다’, 그리고 “글을 최대한 말 같이 표현하기 위해” 부산 사투리를 성조를 살린 표기법으로 표현한 ‘싫어!’ 등 다루는 이야기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시간도 장소도 불분명해 낯설고 새롭다는 점에서 닮았다. 루시드 폴이 추천한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그가 좋아하는 이 작품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낯선 세상을 독자적인 스타일로 그린 영화들이다.
1. <프레리 러브> (Prairie Love)
2011년 | 더스티 비아스
“주인공 남자가 평생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러브 레슨이라는 테이프 같은 것만 반복해서 듣는 일종의 사랑 부적응자예요. 제목은 역설적 의미인데, 겨울에 미국 동부에 눈이 많이 내리면 따뜻한 서부로 옮겨가서 겨울을 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해요. 그 여정 중에 예상치 못한 썬더스톰 같은 것을 만나 죽기도 하는데, 그 때 죽기 전에 사람들이 두세 명씩 껴안고 있는 상태로 죽었대요. 그걸 ‘초원의 사랑(prairie love)’이라고 한대요.”
바그랜트(제레미 클락)는 눈이 많이 내리는 도로에 쓰러진 남자 노닥을 발견한다. 그는 감옥에서 곧 출소를 앞둔 여자(홀리 린 엘리스)와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바그랜트는 노닥 대신 그녀를 찾아가게 된다. 길을 잃은 세 영혼이 노스다코타의 툰드라에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를 그리는 블랙 코미디로 2011년 선댄스 영화제에 공식 초청 되었다.
2. <또 다른 결승전> (The Other Final)
2003년 | 요한 크래머
“스위스에서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본 다큐멘터리인데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브라질과 독일이 결승전을 하던 날, FIFA 랭킹 꼴찌인 부탄과 몽세라가 축구 시합을 하는 이야기예요. 스포츠라는 게 항상 1위, 승자를 가리는데 혈안이 되기 마련인데 이들은 승패의 긴장감보다 일단 즐거워요. 실력도 어설퍼서 경기 중에 막 헛발질을 하는데 보고 있으면 되게 재밌어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이 예선에서 탈락하자, 응원할 팀이 없어진 요한 크라이머 감독이 이색적인 경기를 기획했다. 당시 FIFA 랭킹 꼴찌인 히말라야의 부탄과 카리브해의 국가 몽세라의 축구협회에 연락해 경기를 갖자고 제안한 것. 요한 크라이머 감독은 한 인터뷰를 통해 “축구는 모두가 대화할 수 있는 언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3. <팔사 로라> (Falsa Loura)
2007년 | 카를로스 레이첸바크
“브라질 영화인데 스위스 프리브룩 영화제에서 봤어요. 흔히 여신이라고 말할법한 굉장히 매력적인 금발 여성이 나오는데 엄청 예쁘지만 굉장히 못 사는 빈민층에 심지어 좀 멍청하기까지 해서 남자들에게 계속 이용당해요. 신분 상승을 하고 싶지만 계속 좌절하는 과정을 통해 빈부 격차가 심한 브라질의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열려 있고 유쾌한 모습을 굉장히 잘 섞은 영화예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 ‘실마라’는 방화범으로 수감되었다 나온 아버지를 부양하며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동경하던 팝 스타 브루노의 콘서트에 갈 기회를 얻게 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2007년 제작된 영화로, 상파울로 비평가 협회가 수여하는 각본상을 수상했다.
4. <박사가 사랑한 수식> (博士の愛した數式)
2006년 | 코이즈미 타카시
“이 영화를 제가 어느 계절에 봤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봄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따뜻한 봄날 야구장에서 굉장히 해맑은 표정으로 루트라는 백넘버를 달고 뛰어가는 아이를 보는 박사의 표정이나 시골의 풍경들, 한신 타이거즈 광팬인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게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남아있어요.”
불의의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후 기억력이 80분간만 지속되는 천재 수학자 박사(테라오 아키라)와 그의 열 번째 가정부로 매일 아침 낯선 사람 취급을 받는 싱글맘 쿄코(후카츠 에리), 그리고 그의 아들이 나누는 조금은 독특하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그린 영화. 오가와 요코가 쓴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5. <매트릭스> (The Matrix)
1999년 | 앤디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
“시리즈 전체를 DVD로 사서 여러 번 본 영화예요. 왜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떤 공감 같은 걸 느낀 것 같아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딱 보여줄 때, 동의하면서 맞아, 이런 게 있지 라고 하게 되잖아요. 우리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상식이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그걸 보여주는 방식이 선(禪)적이라고 느꼈어요.”
인공두뇌를 가진 컴퓨터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를 무대로 한 불세출의 SF 액션 시리즈. 시뮬라시옹 이론부터 다양한 종교적 상징과 철학적 인용을 아우르는 스토리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서 영향을 받은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을 구현한 영상이 압권이다. 21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 중 하나로 기억될 영화.
음악에 대한 루시드 폴의 고민은 지금도 온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재미와 행복감을 오랫동안 갖고 가려면 평이 좋다고 우쭐하지도 말고 나쁘다고 우울하지도 말고 계속 용감하게 하고 싶은 대로 쓰자”는 마음을 갖게 한 소설 쓰기를 통해 음악 역시 조금은 “홀가분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앞으로 제 음악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궁금해요. 그래서 4월에 하게 될 공연이 되게 중요해요. 쉬면서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녔는데 그러면서 느낀 게 공연 자체나 좋은 사운드 보다 티켓을 살 때의 마음, 그걸 들고 공연장에 갈 때의 기분, 나와서 어두워진 거리를 걸을 때의 느낌 같은 게 더 중요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에 공연하는 곳은 무대랑 객석이 최대한 덜 분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골랐어요. 종로 한복판에 있으니 날씨 좋은 봄날 고궁이나 시립미술관 같은 곳을 들렀다가 오셔도 좋고 공연장에 있는 전시 공간을 즐겨도 좋을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요한 건 결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잠시 멈춰 서고 오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소설이든 음악이든 흥미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창작자 루시드 폴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또 즐거움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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