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깨지고, 깨어나다
인생이라는 책에서는 늘 새로운 페이지를 마주하게 마련이다. SBS <청담동 앨리스> 지앤의류 디자인 팀장 신인화의 삶 역시 그랬다. 재벌가의 자제로 넉넉하게 자라 본인의 실력을 발판으로 성공해 늘 당당함과 여유가 배어있던 신인화였다. 하지만 그녀도 “생애 처음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겨” 심장의 한 편이 말랑해지며 평탄했던 마음속에 또 다른 삶의 페이지로 넘어가는 순간을 겪었다. 그리고, 그녀를 오롯이 받아들인 배우 김유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미술을 하는 미대 학생이었어요. 제 인생의 메인은 미술이었죠.” 펼친 페이지 위에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몇 개의 드로잉을 마친 뒤였던 스물다섯, 호기롭게 채색하며 채워나가야 할 그 시기에 김유리는 십여 년을 공들여 그린 책장을 넘기고 아무것도 없는 새 바탕에 ‘연기’라는 밑그림을 서툴게 시작했다.

연기를 만난 미대생, 용기를 내다
신인화에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생애 첫 경험이었다면 김유리에게는 연기가 그랬다."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EsOXyE67bQXjYIUHwMmUQl.jpg" width="555" height="185" border="0" />

김유리는 <청담동 앨리스>에서 한세경(문근영)에게 “타고난 처지”와 안목의 상관관계를 설파한 신인화의 대사에 대해 “김유리가 말한다면 좀 다르게 말했겠지만, 어쨌든 사람에게 타고난 기질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다. 초등학생 시절 구성을 가르쳐주시던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유리는 디자인을 해도 좋겠다”는 말을 들었던 자신 역시 태어난 기질로 인생의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와 대학시절을 모두 미술로 보냈고, 화구 박스를 창고에 넣어버릴 만큼 반대를 했던 아버지 탓에 미술을 잠시 쉬었던 중학 시절에도 ‘그래도 나는 미술 할 거야’라며 그 뜻을 남겨두었었다. 그러나, 어느날 찾아온 연기가 김유리의 중심에 단단하게 박혀있던 미술을 밀어냈다. “우연히 연기 수업을 들었어요. ‘내가 도대체 누구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던 순간을 마주했는데, 엄청난 쇼크를 받은 거예요. 그래서 휴학계를 내고는 연기 수업에 집중했어요. 내 생애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죠.”

0.0001밀리미터의 차이까지 알아채는 타고난 눈썰미와 기질이 그녀를 시각 디자인의 길로 이끌었지만, 김유리는 이를 박차고 연기 수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해내는 것에 서툰 스스로에 대해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1년 가까이 계속된 클래스 내내 자신을 물고 늘어졌다. 처음으로 스스로와 치열하게 싸우고 좌절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페이지의 시작. 데뷔를 꿈꾸지 못하고 학교로 돌아가려던 찰나, 기회가 찾아왔다. “이금림 작가 선생님께서 차 한 잔 하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또 곧이곧대로만 듣고 조그만 떡 하나 해서 정말 차 마시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대본 더미를 꺼내 오시면서 읽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연이 닿아 촬영 현장에서 ‘원, 투, 쓰리’가 뭔지도 몰랐던 ‘초짜’가 첫 작품 KBS < TV소설 – 강이 되어 만나리 >로 데뷔했다. 그 후 들어간 회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후 3년을 꼬박 쉬기도 했다. 하지만 긍정에 긍정을 더하며 이겨내려 해도 나아지지 않아 “바닥을 쳤던” 시간을 거치는 동안 그녀의 진심은 무르익었고, 꿈에 대한 무게는 덜었다.

“연기를 선택했던 건 뭔가 홀린 순간”

김유리│깨지고, 깨어나다

김유리│깨지고, 깨어나다
“연기를 선택했던 건 정말 뭔가에 홀린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홀려 있는 상태고요. (웃음)” 김유리는 인터뷰 중에 며칠 전까지 연기했던 신인화를 변론하고 그녀의 삶을 설명할 때에 가장 열심히 눈을 밝히고 목소리의 옥타브를 올렸다. 비교적 늦게 시작한 배우의 길에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 역시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김유리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흠뻑 몰입했던 작업을 업으로 삼게 된 것 자체를 즐긴다. 타고난 기질에 의해 디자인의 길을 걷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 연기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홀로 이것저것을 상상해 보는 걸 즐겼다”던 김유리에겐 지금 이 길을 걷는 것 역시 “타고난” 기질 혹은 성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작품을 만나는 순간순간이 스스로 “깨지고, 깨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앞으로 또 어떤 상상을 하고 어떤 용기를 내어 다가가 자신만의 새 페이지를 열게 될까.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