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은 다른 너와 나의 이야기" />EIDF 2012 토 EBS 저녁 6시 50분
상상해 보자. ‘바람직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따라 붙을 법한 듣기만 해도 시원한 180센티미터의 키를. 그런데 잠깐. 당신의 상상 속 이 키의 주인공에 13살, 게다가 소년도 아닌 소녀가 비집고 들어 설 자리 하나 비어있는가. 아마도 “평범하지 않아” 쉽게 그려지지 않거나, “징그러워” 아예 그려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은 다수가 말하는 보편의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문제”와 “결함”이 된, ‘커도 너무 큰’ 그녀들의 시련기다. 소녀에게 평균 이상의 큰 키는 “결혼도 못 할” 충분한 이유가 되며 부정과 혐오의 표현으로 “거인”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들이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서 정상을 재단해 내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한 그녀들의 시련은 끝이 없다.
성장 제어를 위해 수술과 약물의 힘을 빌리거나 자신의 키를 장점 삼아 운동선수나 모델의 길을 걷는 것이 그나마 그녀들이 택할 수 있는 자구책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사회적 표준 근처에 어떻게든 닿으려는 개개인의 의지로 이 문제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대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지로 미약하지만 궁금증을 확대해 본다. 다시 말해 “키가 커 유리하기 때문에 농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소녀들 앞에 놓인 선택지의 제한을 줄여 나갈 때 비로소 그녀들은 자신을 조금씩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수해 보이는 사연에서 공통의 경험을 끄집어 내 되돌아보게 하는데 다큐멘터리의 탁월함이 있다면 은 비단 그녀들만의 세상사가 아니다. 종종 다수의 시선과 생각이 곧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물 취급 받으며 이질감을 느껴야할 조금은 다른 너와 나의 이야기, 그 한 조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글. 정지혜(TV평론가) 외부필자
상상해 보자. ‘바람직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따라 붙을 법한 듣기만 해도 시원한 180센티미터의 키를. 그런데 잠깐. 당신의 상상 속 이 키의 주인공에 13살, 게다가 소년도 아닌 소녀가 비집고 들어 설 자리 하나 비어있는가. 아마도 “평범하지 않아” 쉽게 그려지지 않거나, “징그러워” 아예 그려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은 다수가 말하는 보편의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문제”와 “결함”이 된, ‘커도 너무 큰’ 그녀들의 시련기다. 소녀에게 평균 이상의 큰 키는 “결혼도 못 할” 충분한 이유가 되며 부정과 혐오의 표현으로 “거인”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들이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서 정상을 재단해 내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한 그녀들의 시련은 끝이 없다.
성장 제어를 위해 수술과 약물의 힘을 빌리거나 자신의 키를 장점 삼아 운동선수나 모델의 길을 걷는 것이 그나마 그녀들이 택할 수 있는 자구책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사회적 표준 근처에 어떻게든 닿으려는 개개인의 의지로 이 문제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대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지로 미약하지만 궁금증을 확대해 본다. 다시 말해 “키가 커 유리하기 때문에 농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소녀들 앞에 놓인 선택지의 제한을 줄여 나갈 때 비로소 그녀들은 자신을 조금씩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수해 보이는 사연에서 공통의 경험을 끄집어 내 되돌아보게 하는데 다큐멘터리의 탁월함이 있다면 은 비단 그녀들만의 세상사가 아니다. 종종 다수의 시선과 생각이 곧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물 취급 받으며 이질감을 느껴야할 조금은 다른 너와 나의 이야기, 그 한 조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글. 정지혜(TV평론가) 외부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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