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도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영화 의 마지막, 처제 은모(서우)의 오해로 보험사기 혐의를 받아 구속된 중식(이선균)은 선배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의 아내이자 은모의 언니가 은모의 실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리지 말자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안고 가겠다고. 어쩌면 남은 것이라고는 철거 대책 위원회 대표로서 사람들에게 얻던 명망이 전부였을지 모를 그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감수하고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택을 한다. 그래서 그는 선한 목자라기보다는 진정한 로맨티스트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포기한 채, 단 하나의 사랑을 선택하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서 날개를 잃고 땅바닥에 떨어진 인간적인 로맨티스트.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어느 때보다 서늘한 표정을 보여줬던 이선균은 MBC 이후 굴레처럼 씌워진 키다리 아저씨의 로맨스 이후를 보여준다.

현실에 있을 법한 좋은 사람, 멋진 남자
이선균│키다리 아저씨의 로맨스, 그 이후
이선균│키다리 아저씨의 로맨스, 그 이후
“ 끝나고 를 했는데 왜 그렇게 비슷한 역할만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분명히 다른 역할인데.” 조금은 불만 섞인 그의 말처럼 MBC 의 동경부터 조금씩 누적된 로맨틱한 남자의 이미지는 의 한성을 통해 이선균을 규정하게 되었고, 대중들은 이후 작품에서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먼저 발견했다. 물론 이것은 어떤 사람을 연기하든 일종의 최대공약수와 같은 평범함의 디테일을 추구하는 그의 연기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의 한성이 백마 탄 왕자님에게 현실에 있을 법한 편안함을 입히는 방식으로 구체화되었다면, 의 영수는 원작 속 무색무취의 캐릭터에 숨 쉬는 인간의 결을 새기며 완성되었다. 그 둘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진폭은 다르지만 그 좌우를 오가는 진폭 가운데에 자리 잡은 상식적인 인간의 고갱이는 동일하게 공유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연기 방식과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논외로 치더라도 영수, 영화 의 재혁, MBC 의 해윤에게는 공통적으로 재생산되는 판타지가 있다. 여자들이 바라 마지않는 좋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너무 뜨겁지 않은 온도로 자신의 이성과 윤리관을 유지하며 제자리를 지키고, 동경을 제외한다면 모두 심지어 사랑에 성공한다. 토이의 ‘좋은 사람’에 사랑의 성공을 덧입힌 이 서사는 정확히 말해 여자보다는 남자의 욕망을 대변한다. 비록 언제나 의연하지만은 않지만 그들은 철든 어른이자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직업인이다. 그들은 여성에게 자상하고 로맨틱하지만 기실 자신이 쥔 것들을 상대방을 위해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선균, 좋은 사람의 굴레를 벗어나 놀다
이선균│키다리 아저씨의 로맨스, 그 이후
이선균│키다리 아저씨의 로맨스, 그 이후
의 중식이, MBC 의 현욱이 그 이전의 인물들과 다른 건, 그래서 단순히 성격의 차원이 아니다. 과거 그는 연기에서 ‘완벽한 남자가 아닌 완벽하려고 하는 남자의 균열’을 보여줬지만 최근의 그는 불안한 균열을 품은 어른이 아닌, 사랑 때문에 자신의 룰을 무너뜨리고 허우적거리는 못난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현욱이 다른 곳도 아닌 주방에서 유경(공효진)의 눈에 입을 맞출 때 이미 그의 세계 한 귀퉁이는 무너져 내렸다. 라스페라를 그만두는 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추락한 자리에는 진짜 사랑이 남는다. 비록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버럭대는 더러운 성격이지만, 자신의 스승에게 “주방에서 연애를 하게 됐어요”라고 쑥스럽게 고백하다 면박을 당하는 현욱은 그래서 더 여리고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말하자면 이젠 뜨거워 넘치기도 하는 감정의 진폭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선균 본인은 “어차피 한국 드라마는 남녀 간 연애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한다”고 로맨틱 가이의 이미지가 반복되는 이유를 설명하지만 사랑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드라마 안에서 연애가 빠질 수는 없다. 중요한 건 드라마가 백 편이면 수 백 가지로 연결될 연애의 서사를 어떻게, 또 얼마나 공감 가게 그려내느냐다. 그리고 세상의 눈높이만큼 주저앉은 키다리 아저씨 이선균은 자신이 누적해왔던 것과는 또 다른 공감의 로맨스를 만들어냈다. 그 두근거림은 쉽게 올인하지 않는 어른의 세계, 혹은 이선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쾌감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최신작인 는 그의 말대로 “반전이나 이런 거 없이 공식대로 가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면에서 나 처럼 예상 밖의 서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대신 좋은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 배우가 쩨쩨하고 치사한 현실의 로맨스 안에서 얼마나 제대로 놀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충분히 흥미롭다. 상상 속의 연적에게 느끼는 질투를 만화를 그려 해소하고, 연애 상대가 섹스 경험이 없다는 것에 대해 안심하는 정배에게는 그간 이선균이 보여준 평범한 중도의 감정선보다 훨씬 깨알 같은 디테일이 박혀있다. 그리고 이 로맨스가 빤하지만 꼭 필요한 감동의 결말을 향해 갈 때, 다시 한 번 정배는, 이선균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 대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선택한다. 그 과정이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이 정말 아끼던 것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압축적으로 얼굴 안에 담아내고 결국 사랑에 올인하는 이선균의 연기는 극의 흐름까지 안정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선균은 자신의 배역 안에서 여전한 로맨티스트, 아니 로맨티스트를 넘어선 로맨티스트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좋은 배우라는 뜻이기도 하다. 적어도 사랑 없는 세상, 로맨스 없는 드라마의 시대가 오지 않는다면.

글. 위근우 eight@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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