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와 밴드는 꼭 챙겨가. 상처가 덧날 수 있으니까. 화생방 훈련 때는 괜히 숨 참지 말고. 내무반 생활? 설명할 게 너무 많지만 우선 만화 <짬>을 읽어두면 도움이 될 거야.” 군대 가는 후배들이 군 생활 팁을 가르쳐달라고 할 때마다 항상 교과서처럼 추천하던 텍스트는 주호민 작가의 <짬>이었다. 그만큼 과장 없이 군 생활의 에피소드를 디테일하게 풀어낸 이 만화는 수많은 예비역들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이 한 편으로 주호민 작가는 메이저 만화가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하지만 군 생활이라는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경험을 담백하게 풀어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가 과연 그 너머에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재밌었지만 전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군대스리가>나 <짬 시즌 2> 같은 작품 위주로 후속작이 등장하는 것도 이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하지만 그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와 무한동력장치 제작에 몰두하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담은 <무한동력>으로 그 모든 우려를 날려버렸다. “다큐멘터리를 즐겨 봐요. 우주나 역사를 소재로 한 전문적인 다큐멘터리부터 <인간극장>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휴먼다큐까지 가리지 않고 섭렵하죠. <무한동력> 역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무한동력장치를 만드는 아저씨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고요.” 사실 어떤 뛰어난 창작자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건,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그 안에서 신선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다.

최근 네이버에 연재한 <신과 함께>가 그의 경력 안에서 발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신들의 이름은 줄줄 외우면서 정작 한국의 신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신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어서 그런 신화와 저승관을 많은 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죠.” <신과 함께>에서 주호민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저승차사는 세 명이 함께 다니며 이들의 이름이 강림도령, 이덕춘, 해원맥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자연스레 인식시키는 동시에 독특한 소재에 매몰되지 않고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잔잔한 감동 속에 풀어내는 내공을 보여준다. 특히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은 <무한동력>을 거쳐 <신과 함께>에서 더욱 깊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이번 ‘그의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주호민 작가가 쌀쌀해진 날씨를 맞아 추천하는 따뜻한 곡들을 소개한다.




1. K-Ci & JoJo의 < All My Life-Their Greatest Hits >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함께 들으면 좋을 음악”으로 주호민 작가가 꼽은 첫 번째 곡은 K-Ci & JoJo의의 ‘Tell Me It`s Real’이다. “가는 음색과 거친 음색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듀오입니다. 흑인 버전 녹색지대랄까요. 하하. 멜로디가 귀에 착 감겨 자꾸 흥얼거리게 되는 곡이애요.” 업타운 레코드의 전설적 그룹 Jodeci 출신인 헤일리 형제의 감성 듀오 K-Ci & JoJo는 종종 무대 위나 바깥에서 보여주는 악동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는 존재들이다. 특히 곡목인 ‘Tell Me It`s Real’로 시작되는 추천곡의 코러스 파트에서는 이들의 탁월한 음색이 이루는 완벽한 화음을 경험할 수 있다.



2. Raul Midon의 < State of Mind >
유독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그가 뽑은 두 번째 아티스트는 스티비 원더의 노래와 조지 벤슨의 기타를 겸비했다고까지 평을 듣는 흑인 음악계의 보석, 라울 미동의 ‘Expressions Of Love’이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기타 연주에 완전 반해버린 곡이에요. 특히 이 노래 후반부의 하모니카는 스티비 원더가 연주하는데, 스티비 원더와 라울 미동 모두 맹인이에요. 눈으로는 서로를 볼 수 없겠지만 귀로는 서로를 완벽하게 보고 있겠지요.” 주호민 작가의 말대로 라울 미동은 맹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스티비 원더의 뒤를 잇는 뮤지션으로 꼽는 건 단지 그러한 신체적 핸디캡 때문만은 아니다. ‘Expressions Of Love’가 수록된 2006년 데뷔 앨범 < State of Mind >에서 라울 미동은 편하게 귀에 감기면서도 풍부한 재즈 리듬이 살아 있는 음악을 들려준다. “입으로 트럼펫 소리도 내는데 정말 신기한 뮤지션이에요. 입으로 내는 트럼펫 소리를 하니 뜬금없이 故 백남봉 선생님 생각도 나네요.”



3. Babyface의 < MTV Unplugged NYC 1997 >
“베이비페이스와 K-Ci & JoJo, 그리고 뉴 에디션이 함께 부른 곡이에요.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러브송인데 옆구리가 시려오는 요즘 날씨에 솔로 분들은 누군가에게 이 노래로 마음을 전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낭만적인 노래에요.” 주호민 작가가 고른 세 번째 곡인 ‘I Care About You’은 그의 설명대로 베이비페이스, K-Ci & JoJo, 뉴 에디션이라는 걸출한 보컬리스트들이 함께 화음을 맞췄다는 것만으로 꼭 들어봐야 할 곡이다. < MTV Unplugged NYC 1997 > 앨범에서 이들 뮤지션이 라이브로 전하는 감동은 실로 굉장한데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불을 뿜는 고음역과의 격렬한 애드리브는 명불허전이다. 다만 그런 만큼 혹시라도 이 노래를 ‘직접 불러’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마음은 당장에라도 접길 바란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그건 무리수다.



4. Barry White의 < Just For You >
주호민 작가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곡에 대한 느낌과 기억을 이야기하는 타입인데 배리 화이트의 ‘Can`t Get Enough Of Your Love Babe’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브루스윌리스가 주연한 영화 <식스틴 블럭>의 엔딩곡으로 나온 곡인데 너무 좋아서 스태프롤이 끝까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배리 화이트의 투박한 음색이 매력적인 곡이죠.” ‘Can`t Get Enough Of Your Love Babe’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배리 화이트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 곡으로 레너드 코헨을 연상케 하는 남성의 굵은 저음이 돋보이는 내레이션 도입부를 지닌 곡이다. 특히 배리 화이트는 절절한 소울 보컬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타입인데 이 곡을 통해 빠르진 않더라도 신나게 리듬을 타는 배리 화이트의 여유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5. Quincy Jones 의 < Just Once >
주호민 작가는 이번 ‘그의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전해왔는데 바로 다음 달 결혼 소식이다. 퀸시 존스의 ‘Septembro (Brazilian Wedding Song)’은 그 기쁜 마음을 담아 추천한 곡이다. “퀸시 존스가 위대한 아카펠라 그룹인 Take6와 함께 부른 곡이에요. 가사 없이 허밍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곡으로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Brazilian Wedding Song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도 한데 저 10월 달에 결혼해요. 그래서 골랐습니다. 하하하.” 솔로들에게는 따뜻하기는커녕 찬바람 부는 곡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감성적인 톤의 허밍만으로 이토록 감동을 줄 수 있는 곡은 흔치 않다. 그것은 분명 퀸시 존스라는 탁월한 뮤지션의 멜로디 감각 덕분일 텐데, 특히 이 곡 ‘Septembro (Brazilian Wedding Song)’에서는 블록버스터 프로듀서 이미지가 강한 그의 미니멀한 감성을 읽어낼 수 있다.




“가장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훈육의 느낌을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지옥을 그리면서 훈육의 느낌을 줄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일 수도 있는데 최대한 독자를 가르치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주제의식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어요.” 앞서 <신과 함께>를 비롯한 주호민 작가의 작품에 대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 어떤 착한 만화도 그 주제를 독자에게 강요하게 되면 불편할 뿐이다. <신과 함께>가 저승의 피고인 김자홍의 착한 삶을 옹호하고, 소대원을 억울하게 죽게 만든 소대장에게 벌을 주는 인과응보의 틀을 가졌으면서도 촌스럽거나 불편하지 않은 건, 바로 독자를 가르치지 않으려 하는 주호민 작가의 고민 덕분일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웃음 안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에 대해 앞으로 좋은 작품을 낼 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는 이제 없을 것 같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라면, 며칠 전 완결된 <신과 함께> 1부 저승편 이후, 2부 이승편이 나올 2달 여 동안의 우리의 기다림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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