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걷는 배우와 자신이 직접 길을 닦는 배우가 있다면 배종옥은 분명 후자에 가까운 타입이다. 과연 그녀의 먹먹한 눈빛이 아니었다면 상처 때문에 사랑은 없다고 되뇌지만 결국 또 한 번의 사랑에 빠져 아픔을 감수하는 KBS <거짓말>의 성우를 만날 수 있었을까. 특유의 당찬 이미지에 노처녀의 수더분함이 더한 그녀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젊은 남자와 유부남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성연 같은 캐릭터가 등장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건, 이처럼 전에 없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며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녀가 조금씩 나이 먹어 가는 과정과 함께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자신의 남편을 친구에게 빼앗기지만 주저앉아 우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독하게 복수하는 막장 드라마의 방법 대신 가정에 매몰되어 있던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찾는 SBS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를 보자. 물론 김수현 작가라는 당대의 거장의 필력에 힘입은 바가 크겠지만 젊은 시절의 도회적 이미지에 조금씩 나이의 연륜을 쌓아 지금의 얼굴을 만든 배종옥과 함께 40대 아내는 그 너머에서 온전한 한 명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어색하지 않은 여성스러움을 가졌으면서도 아줌마 특유의 그악스러움을 갖춘 MBC <천하일색 박정금>의 박정금 같은 캐릭터를 궁리할 때, 배종옥 이상의 캐스팅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말하자면 그녀가 나이 먹는 과정은 그저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과정이었던 다른 여배우들의 그것과 달리, 여성의 매력과 역할 자체를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원숙한 목소리와 음악 세계를 보여준 다음 뮤지션들의 그것처럼.
너무나 진부하지만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획득한 가수라는 표현만큼 이소라의 위치를 잘 드러내는 말은 없는 듯하다. 특유의 재지한 보컬로 ‘난 행복해’, ‘청혼’ 같은 곡들을 가요 차트 수위에 올리던 그녀는 동시대의 김동률, 김현철 등이 그러했듯 90년대 고급 가요를 이끄는 한 축이었다. 특히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한 6집 <눈썹달>을 기점으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 색깔만으로 이소라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르렀고, 그 발전은 배종옥이 추천한 이소라의 7번째 앨범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연륜이 쌓일수록 독창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종옥이 이소라의 7집 앨범을 첫 번째로 꼽은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난 행복해’를 부를 때부터 이소라는 언제나 노래를 정말 잘 부르는 가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색이 더 확실해지는 것 같아 좋아요. 결국 아티스트는 자신의 색깔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잖아요? 그래서 최근 앨범이 더 좋더라고요.”
“뭐, 전설이죠.” 배종옥의 이런 말에도 불구하고 사실 엘라 피츠제럴드는 그 탁월한 보컬 기교와 오랜 시간 이룬 업적에도 불구하고 ‘A Lover`s Concerto’ 한 곡으로 한국에 이름을 알린 동시대의 재즈 보컬 사라 본에 비해 대중적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폭넓은 음역으로 화려한 스윙 장르를 소화해낸 그녀의 실력은 빌리 홀리데이, 사라 본과 함께 3대 여성 재즈보컬리스트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배종옥은 그녀의 수많은 앨범 중 독특하게 라이브 앨범 < Complete Ella In Berlin: Mack The Knife >를 꼽았다. “엘라 피츠제럴드는 정말 너무 앨범이 많아서 어떤 걸 추천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앨범은 자신 있게 좋다고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Summertime’이나 ‘Mack The Knife’ 같은 곡이 참 좋은데, 그 곡들을 실제 공연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게 좋죠.”
“저희 세대에서 나나 무스쿠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거 같아요.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배종옥이 세 번째로 선택한 또 한 명의 여가수는 20세기의 뮤즈라고까지 불리는 나나 무스쿠리다. 소위 7080세대가 사랑하는 팝 넘버인 ‘Amazing Grace’, ‘Try To Remember’ 등을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도 커다란 인기를 얻은 그녀는 대중 가수임에도 어떤 여성 성악가에도 뒤지지 않는 맑은 음색과 탁월한 가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최고의 보컬리스트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다른 이의 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할 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목소리로 더 익숙하게 기억하는 ‘Why Worry’는 록 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동명의 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해 불렀다. “나나 무스크리는 사람 마음을 참 편하게 해줘요. ‘Why Worry’가 특히 그런데,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을 때 들으면 정말 좋아요.”
수잔 베가라는 뮤지션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포크다. 1985년 데뷔 앨범을 내던 당시, 그녀는 담백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에 문학적인 가사를 얹어 읊조리던 포크 록의 새로운 대안이었다. 댄스 음악이 주를 이루던 80년대 미국에서 어쿠스틱 포크를 고수하던 그녀는 최근 < Beauty & Crime > 같은 신보에서 여전히 포크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고집이라 볼 수 없는 건, 그녀가 예나 지금이나 포크 록의 현재진행형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차분한 선율이 매끈하게 흐르는 ‘Edith Wharton`s Figurines’ 같은 곡에서는 그녀의 원숙한 목소리와 여전히 포크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음악적 성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소라 씨도 그렇지만 수잔 베가도 꾸준히 앨범을 내면서 자기 색깔을 점점 더 짙게 한다는 게 참 좋아요. 언제나 수잔 베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목소리, 소리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확실한 자기 음악을 하는 사람의 노래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생각해요. 연기도 그렇구요.”
아무래도 성량이 좋은 여성 보컬 위주로 고른 만큼 배종옥의 리스트에는 유독 재즈 보컬리스트가 많은데, 캐나다 출신의 다이애나 크롤도 그렇다. “아유,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노래까지 잘 불러요. 거기다 피아노도 정말 잘 치구요. 그냥 예쁘게 부르는 게 아니라 중성적인 보컬이라 더 독특한 거 같구요. 재즈 보컬리스트 중에서도 참 특이한 것 같아요.” 그녀의 설명대로 다이애나 크롤은 1999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재즈 보컬상을 받으며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꼽히지만 또한 건반 연주에 능한 재즈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특히 그녀의 최근작인 < Quiet Nights >에 수록된 귀에 착착 감기는 발라드 넘버들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깊어지는 그녀의 음색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이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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