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영역에 뛰어드는 것이 겁나지 않느냐”는 물음에 김여진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저는 오히려 겁을 낼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요. 해 보면 재미있고, 또 그만큼 내 삶이 풍부해지는 건데 뭐가 그렇게 두렵겠어요. 두려움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 굉장히 중요한 핵심이에요.”

세 딸 가운데 유독 순했던 첫째, 공부를 잘 해 고향 마산에서 중학교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모범생, 부모님은 물론 스스로도 의대에 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소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 독일 문학에 빠져들었고 단식 투쟁까지 거쳐 독문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갖게 된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이 있고 힘이 센 사람이 있다면 왜 꼭 머리 좋은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져야 할까. 머리만 좋아서는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는데”라는 근본적 의문은 그를 투쟁의 현장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꼬박 4년을 노동자 연대, 빈민연대 활동에 쏟아 부은 뒤 “내 안에 아무 것도 없이, 나를 꽉 채웠던 걸 통째로 비워낸 다음” 김여진이 만난 세계는 연기였다. “포스터라도 붙이게 해 달라”며 무작정 찾아간 극단에서 처음 무대에 섰고,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취화선>의 기생 진홍과 <박하사탕>의 홍자에서 최근 MBC <내 마음이 들리니>의 미숙에 이르기까지, 김여진의 연기에서 느껴지는 남다른 생기는 어쩌면 그렇게 오롯이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고 만들어 온 삶의 태도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불교계 시민단체에서 기아ㆍ질병ㆍ문맹 퇴치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연기자인 동시에 트위터를 통해, 혹은 현장에 나가 다양한 사회 문제에 귀를 기울이는 시민이기도 한 김여진은 4월 7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제 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식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모든 운동은 말 그대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여성영화제에 오신 분들도 ‘주제의식을 가지고 진지하게 정좌해서 봐야 한다’는 의식보다는 그 자체를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대로 김여진이 추천한 영화들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좀 더 깊은 눈’을 가진 작품들이다. “저는 섬세함에 반하는 편이에요. 사람들이 보통 3초 정도 바라보고 지나가는 것도 3분 정도 빤히 보다 보면 그 사이에 있는 작은 결, 흔적, 추억까지 보이거든요.”




1.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Sex, Lies, And Videotape)
1989년 | 스티븐 소더버그

“제 인생의 첫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이에요. 열아홉,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 꾐에 빠져서 보러 갔던 첫 19금 영화이기도 해요. (웃음) 사실 별로 야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제가 그 전까지 봤던 영화들과 너무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남자 주인공이 사랑의 허구, 거짓말 때문에 약간 결벽증이 생긴 사람이라서 섹스는 하지 못하고 섹스에 대한 인터뷰만 계속 하거든요. 그런데 그 인터뷰 속의 사람들이 더 솔직해지는, 그야말로 소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 남부 작은 도시의 한 중산층 가정, 존(피터 갤러거)과 앤(앤디 맥도웰)은 겉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부부지만 앤은 알 수 없는 불안과 허무함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고 존은 처제 신시아(로라 산 지아코모)와 외도를 벌인다. 어느 날 존의 친구 그레이엄(제임스 스페이더)이 찾아오면서 지루하던 일상은 물론 이들의 삶 자체가 크게 요동치게 된다.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89년 칸 영화제 대상, 남우주연상, 국제 비평가 대상을 수상했다.



2.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2000년 | 왕가위

“양조위를 정말 좋아해요. 제 기준에서는 동서양을 다 통틀어 최고의 연기를 하는 배우예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걸 연기하는 건 거짓말이고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를 잘 하려면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해요. 의식이 수면 위에 있는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물 아래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한다는 건 무의식을 키워놓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캐릭터로 연기를 하고 다른 캐릭터로 변화할 때 자기가 아예 다른 걸 한다고 생각하면서 흉내를 내요. 아주 어설프게. 하지만 양조위를 보면 그 사람 안에 있는 게 정말 무한한 우주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1962년 홍콩, 지역 신문의 편집장 차우(양조위)는 부인과 함께 상하이 주요 거주 지역의 새 집으로 이사한다. 그는 곧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젊고 아름다운 여인 리춘(장만옥)과 그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출장이 잦은 리춘의 남편과 종종 집을 비우는 차우의 부인 때문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두 사람은 곧 친한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3. <색, 계> (Lust, Caution)
2007년 | 이안

“<화양연화>와 <색, 계>에서 양조위가 맡았던 두 캐릭터는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거예요. 그 두 캐릭터의 표정을 스틸로 찍어 놓으면 거의 비슷할 거예요. 그런데 <화양연화>에서는 정말 섬세하고 유약하던 도시남자가 <색, 계>에서는 공권력의 핵심에 있고 냉혹하면서도 짐승 같은 면이 있는 남자가 되죠. 같은 얼굴로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정말 그 캐릭터 안에 있다는 거죠. 특히 <색, 계>에서는 이 배우가 얼마나 집중하고 몰입했는가, 그러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것도 알 수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굉장히 섬세하고, 저는 섬세함이라는 면에 좀 반하는 편이에요. (웃음)”

1930년대 말 2차 세계대전의 와중, 배우가 되고 싶었던 여대생 왕치아즈(탕웨이)는 예상치 못했던 운명의 이끌림에 따라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의 암살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처음 만남은 물론 3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재회에서도 서로 끌린 두 사람의 관계가 거듭될 수록 이는 점점 경계를 풀고 `막 부인`이라는 가명으로 그를 대하던 왕치아즈 역시 걷잡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4. <밀양> (Secret Sunshine)
2007년 | 이창동

“이창동 감독님은 제가 워낙 좋아하는 감독님이세요. 그런데 <밀양>은 지금까지의 모든 작품 중에서 제일 좋았어요. 정말 새로운 느낌의 영화였고, 세상을 정말 예리한 눈으로 보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출연했던 <박하사탕>도 그랬지만 <밀양>도 정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한 면을 이만큼 떠다가 탁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마지막 신에서부터는 한 30분 동안을 꺼이꺼이 울었던 것 같아요.”

<밀양>은 지독한 고통에 관한 영화다. 남편을 잃은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간 신애(전도연)는 평범한 여자로 보인다. 그가 아들마저 잃게 된 사건 역시, 어쩌면 지금 이 세상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사소한 비극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그 고통과 더불어 종교와 구원, 그리고 용서의 주체에 대해 불필요한 힘을 주지 않고도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답보다는 질문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5. <디 아워스> (The Hours)
2002년 | 스티븐 달드리

“가장 훌륭한 여성영화이자 정말 재미있는 영화에요.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만, 줄리안 무어라는 세 배우의 최고치를 본 것 같은 작품이기도 하죠. 극 중에서 세 사람의 캐릭터가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이 다 다르고 나와도 정말 다른 사람들인데 굉장히 나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걸 표현한 연출 기법도 훌륭했고, 배우들 역시 어느 영화에서도 그 정도의 연기를, 그렇게 사실적이고 진실된 연기를 보여준 적은 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그래서 ‘저 배우들은 참 행복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저런 영화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에 사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1951년 미국 LA의 가정주부 로라(줄리안 무어), 그리고 2001년 미국 뉴욕의 출판 편집자 클래리사(메릴 스트립)의 하루.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매개로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되는 세 여성의 삶은 전혀 다르지만 여성이라면 본능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지점들을 드러낸다. 시적이고 정적인 동시에 놀랍도록 극적인, 잔잔한 수면 아래 처절할 정도의 파동을 섬세하게 잡아낸 작품.




사실 MBC <100분 토론> 출연을 비롯해 배우가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칫 왜곡된 시선으로 비춰지거나 커리어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도 김여진의 답은 명쾌하다. “저는 저답게 살고 있어요. 운동만 하면서, 혹은 연기만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았고 두 가지를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들이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나 철학을 가지고 연기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에요.” 사람이 사람답게, 자신이 자신답게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일 같지만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그래서 “저 같이 엉뚱한 배우 하나 정도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냥 여자, 사람, 배우”라고 말하는 김여진의 웃음이 각별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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