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경상도 부산출신 기자와 전라도 군산 출신 배우가 서울 삼청동 어느 카페에서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이거 참 ‘위험한’ 인터뷰입니다. 3월 31일 개봉을 한 영화 는 88올림픽이 끝난 다음해, 당시 금기와도 같은 사랑에 빠져버린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의 러브스토리입니다. “광주거리를 걷는 꿈”을 꿨다는 말에 “악몽을 꾸었구먼”이라 대답하는 장인과 경상도 사람은 “간이 안 맞아”고 말하는 시아버지는 평행선을 그리지만 그럴수록 이 아날로그 시대의 사랑은 더욱 간절해지기만 합니다.

영화 의 세팍타크로 형사로 등장해 영화 의 허를 찌르는 변학도, 도시가스 위치를 정확히 아는 영화 의 형사와 영화 의 찌질한 처남, 개봉을 앞둔 까지. 어눌한 전라도 사투리에 큰 변화 없는 표정. 그러다 관객들을 뒤집히게 만드는 폭소의 맥까지. 이제 그를 좀 알 것 같다고요? 장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겨우 이 배우의 새벽 풍경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아침은 꽤나 뜨거울 것 같습니다.

100: 는 아무래도 현준이 전라도 출신 남자라는데서 오는 편안함이 있었겠어요.
송새벽: 시나리오는 너무 재밌는데 사실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뭐랄까, 걱정이 좀 있었어요. 저는 전라북도 군산인데 여기 설정은 전라남도 광주잖아요. 남도는 악센트나 성향이 대부분이 좀 더 세고 강하거든요. 말의 리듬도 다르고. 그런데 저는 북도사람이니까 이 두말이 짬뽕되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걱정이 먼저 들더라고요. 공부도 좀 하고 남도 고향인 연기자 선배들에게 좀 배우고 그랬죠. 나름 변신이에요. (웃음)

“어렸을 때는 만 100번 넘게 봤어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100: 어린 시절을 보낸 군산은 어떤 곳인가요? 근대의 모습이 꽤나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요. 일본의 쌀 수출항으로도 쓰인 곳이고 그래서 일식 적산 가옥도 많아 독특한 풍경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송새벽: 예. 그야말로 교과서에 쓰인 대로 호남평야, 쌀 창고!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유독 드라마 촬영이나 같은 영화 촬영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가끔 와 카메라다! 하면서 촬영 구경하고 그랬죠. (웃음)

100: 어렸을 때부터 영화나 드라마 혹은 연기에 관심이 있으셨던가요?
송새벽: 아니, 전혀요. 그냥 비디오가게 가서 이거 재미있겠다! 빌려보는 수준이었죠.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연기자에 대한 꿈도 없었고 그냥, 평범했어요. 저도 오늘날 이제꺼정,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 일이 뭐가 좋아서 하지? (웃음)

100: 하하. 뭐가 좋아서 하세요?
송새벽: 이게 아닐까 싶어요. 음… 어느 공연의 대사를 빗대어서 말하자면, 살아있음을 느껴요. 심장이 쿵쾅쿵쾅 대는 느낌들? 무대에서나 카메라 앞에 있을 때나.

100: 지금껏 영화관객들에게 본 배우 송새벽은 사실 에너지가 막 끓어 넘치는 배우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끓어오르는 사람들 툭 건드려서 힘 팍 빠지게 만들면서 웃음을 만드는 편이라면 모를까. 그래서인지 어쩐지 내성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리 씨가 전근가도 그 정도 테러 밖에 못하고. (웃음)
송새벽: 이제껏 출연했던 영화들만 봤을 때는…. 아 그러네요. 예전에 라는 공연을 했을 때 우인 중의 하나인 남원부사 역을 했는데 굉장히 원초적인 에너지의 사람이었어요. 아! 그 때 공연을 보셨어야 하는데. … 그런 때도… 있었다. 그런 말씀입니다.

100: 영화의 배경이 89년인데 그때 군산에서 누렸던 문화적인 가장 큰 혜택은 뭐였어요?
송새벽: 제가 79년생이니까, 11살 초등학교… 책받침? (웃음) 당시 유덕화, 장국영 같은 배우들 코팅 책받침 같은 거 학교 앞에 많이 팔았잖아요. 이번 영화에 박남정 형님도 나오지만 허리우드 극장, 군산극장, 제일극장 같은 데는 홍보용으로 책받침 나눠줬던 기억이 나요. 특히 책받침을 좋아했어요.

100: 예전에 끝나고 와 했던 인터뷰에서 이 어린 시절 인생을 뒤 흔든 영화라고 하셨는데요.
송새벽: 예. 정말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극장에 가서 봤는데 당시에 임청하, 장국영을 안 좋아하는 애들은 없었잖아요. 홍콩영화 마니아는 아닌데 유독 그 영화를 푹 빠져서 봤어요. 한 100번 넘게. 지금도 집에 소장하고 있고 가끔씩 보고 싶을 때 꺼내보고 그래요. 2편도 나왔는데 제목이 인거예요. 마니아 급 팬으로서 제목이 이게 뭐여~, 했죠 (웃음)

100: 왜 그 영화가 그렇게 좋으셨는데요?
송새벽: 그야말로 한 여자를 위한 사랑, 그런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저에게 크게 왔던 것 같아요. 마지막에 두 사람이 드디어 상봉을 하잖아요. 천설봉에 천년마다 한번 피는 꽃을 먹이면 중원을 떠나 천년을 살수 있다는 전설 때문에 10년 동안 한결 같이 그 어떤 사람이 와도 다 물리치고 기다린 장국영이 만개한 꽃을 꺾어가지고 다가가는데 오해한 임청하가 백발을 쏴아악 날리면서 쿵쿵쿵쿵! 장국영이 퍽 쓰러지잖아요. 그때 장국영이 품에서 꽃을 꺼내면서 하는 대사가, 내가 뭣을 잘못했든 이것 하나만은 알아줘요. 모두 다 당신을 위해 그랬다는 걸. 하- 사실 평범한 대사일 수도 있는데 그 영화의 모든 것이 너무 강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어요. 물론 사춘기적인 감수성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언젠가 이런 사랑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 했어요.

100: 보통 남학생들이 홍콩영화를 보면 액션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던데 특이하게도 멜로 부분에 더 집중해 보셨네요.
송새벽: 예… 굳이 따지자면 액션보다는 멜로를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아요.

“연극은, 휴- 개뿔 아무것도 몰랐어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100: 에서 이시영 씨와 연애하는 장면 찍으면서 좀 오글거렸겠다 했는데 웬걸, 원래 멜로형 인간이셨군요.
송새벽: 저는요… 이런 거… 되게 해보고 싶었어요! 요새는 핸드폰 하나로 다 되잖아요. 손때 묻혀서 편지 쓰고 이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80년대 후반의 청춘남녀들이 너무 부럽더라고요. 삐삐도 없는 시절에. 시간 딱 맞춰서 전화해야하고. 아날로그적인 게 제 성향 상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물론 지금보다 덜 편리한 시대였지만 사랑의 감정, 애틋함 이런 게 너무 부럽더라고요. 너무 예쁜 거예요.

100: 학창시절에 그런 연애 해보셨을 거 아니에요?
송새벽: 학교 다닐 때는 정말 조용-하게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는 한번 말을 하면 우아 새벽이 말한다, 새벽이 말한다, 그랬을 정도였죠.

100: 말하기가 귀찮으셨어요?
송새벽: 어휴, 아니죠. 저도 답.답. 했죠. 지금 생각하면 왜 학창시절을 그렇게 보냈을까 후회될 정도로 무미건조했어요. 반면에 조용히 다녀서 좋았던 건 분명 있었어요. 그때 제 머리 속이 복잡했거든요. 세상에 대한 사춘기적인 ‘다가옴’ 있잖아요. 혼자 있는 게 좋았죠. 아! 작렬하는 태양! 세상이 왜이래!

100: 그러면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배우에 대한 생각을 한 번도 안하셨어요?
송새벽: 단 한번도. 저는 손들고 발표를 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대학 들어가서 연극극회인 ‘마당’에 들어가 놀았어요. 연극을 좋아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좋았고 연극은 그저 그 사람들이 하는 거였어요. 그 부대낌이 너어-무 재밌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어쩜 그렇게 진국들만 모였는가 싶을 정도로. 지금 생각해봐도 스무 살 극회활동 하던 시절이 최고였어요. 최고.

100: 사람들이 좋아서 시작했고 같이 노니까 너무 좋고?
송새벽: 예, 그렇게 시작한 거예요. 연극은, 휴- 개뿔 아무것도 모르고. (웃음)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아 따분해 따분해, 미치겠다, 답답해 있다가 대학교 때 그 선배들 만나서 빵! 터진 거죠.

100: 그 때부터 사는 게 재밌어지기 시작하신 거예요?
송새벽: 아! 그 표현이 딱이네요. 사는 게 진짜 재밌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진짜로.

100: 그런데 재미로 할 수 있는 시기는 끝나기 마련이잖아요. 그걸 결국 잘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마련인데. 가장 슬픈 게 그 일이 재밌고 좋은데 잘 못할 때잖아요. 그런데 이 일을 어쨌든 직업으로 삼고 가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은 언제쯤 드셨어요?
송새벽: 서른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저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던 거고 나중에 무대에 서보니 아! 이것도 재밌네? 해서 연기를 시작했고, 군대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더 해보고 싶다고 2002년도에 대학로 연우무대에 오디션을 보고 들어가 극단생활을 했죠. 물론 스무 살 때도 극회활동 하면서 군산 내에 있는 ‘사람세상’이라는 극단에 있었던 적이 있지만 이제 좀 마음이 다르더라고요. 남자들은 특히 군대 다녀오면 내가 뭘 먹고 살아야하나 하는 고민이 있잖아요. 그때 제 삶에 대한 책임감이 더 들었고 그런 고민을 시작한 게 서른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100: 극단 생활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객지 생활의 시작이기도 하잖아요.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겠어요.
송새벽: 그건 저 말고도 모든 대학로 연기자 분들이 다 마찬가지시고. 물론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생활을 버틸 수 있는 환경이고. 그래서 이것저것 잡일도 많이 했죠.

100: 그렇게 힘들 때 버틸 수 있는 힘은 뭐였나요?
송새벽: 극단 식구들도 다 어렵잖아요. 벌이가 안 되니까. 어떤 선배는 결혼해서 애도 있고, 어떤 사람은 결혼을 아예 생각 할 수도 없고 그런 동료들과 함께 지내면 전우애보다 더 찐한 무언가를 나눴던 것 같아요. 서로 으ㅆㅑ으ㅆㅑ 했던 게 큰 버팀목이 되었던 거죠.

100: 너무 힘들어서 다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라고 생각한 적은 없으셨어요?
송새벽: 그럴 법도… 한데. 단 한번도! 없었어요. 예전에 엄마가 저랑 제 여동생 키우실 때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세발의 피, 네발의 피, 오발의 피구나. (웃음)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잘 먹고 다니고, 잘 데 있고. 다만 결혼할 나이가 가까워지니까 책임져야 될 여자가 생긴다면 부담이 좀 있겠죠. 하지만 어쨌든 나는 행복한 거더라고요. 게다가 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좋았어요. 행복했어요. 자유로웠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송새벽으로서 할 수 있는 연기, 그게 다”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100: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난 감독의 영화 (‘Between’ 편)에 나오신 걸 봤어요. 좀 놀랐던 게, 그간 소비되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그 스크린 위에 있더라고요.
송새벽: 아… 그 영화를 보셨다니…. 쑥스러워지네? (웃음)

100: 주인공 남자는 아이와 아내를 잃고 그 반복적인 평범한 날들의 일상을 견뎌내야 하잖아요. 유머도 없는 시종일관 황폐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어떤 경험이었을까요?
송새벽: 의 시나리오를 딱 받았을 때 정말 나랑 닮은 구석이 많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감독님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너는 결혼도 안하고 애도 없는데 뭐가 닮아? 하시는 거예요. 결국 부산에서 영화를 보니 비단 저 뿐이 아니라 이 시대 혹은 대한민국의 남자들과 닮은 모습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라는 걸 알았어요. 사회가 낳은 아들 같은. 그래서 가슴이 많이 아팠죠.

100: 마지막에 꿈처럼 나타난 아이와 조우하며 “내가 널 안아도 되겠니?”라고 하는 장면이 잊히지가 않아요.
송새벽: … 저는 그 장면을 찍을 때… 너무 슬퍼서, 컷이 떨어졌는데도 계속 울고 앉아 있었어요. 내가 널 안아도 되겠니? 별말 아닐 수도 있는데 너무 하염없이 눈물이 나는 거예요. (잠시 침묵)…. 울고 있는 저에게 감독님이 와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왜요? 라고 묻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제 생각에는, 우리가 이런 영화를 찍고 있고, 이런 이야기를 증명해야하고, 이런 슬픔을 견뎌내게 만들어서 감독으로 미안하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아요.

100: 살면서 어떤 것을, 어떤 존재를 완벽히 잃어버렸구나 하는 기억이 있으세요?
송새벽: 3년 전에 거의 저를 키우시다시피 하신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 분 다 한 해에 돌아가셨어요. 그 한해가 저로서는 정말 힘들었죠. 무덤가에 뫼셨을 때 그야말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건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장례식장에서 수의 입으시기 전에 할머니 이마를 딱 만졌어요. 일하는 아저씨가 시신 만지는 거 아니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저 할머니 이마가 생각보다 너무 너무 차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그 이마를 만지면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늘을 보며) … 잘 계시죠? (웃음)

100: 손자가 그동안 아주 성공하셨어요! 사실 송새벽 씨에게 2010년은 특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으로 대한민국 영화대상, 대종상 영화제, 디렉터스 컷 어워즈 등등 2010년 신인상이란 신인상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고 CF도 찍고. 여기저기서 송새벽! 송새벽! 이런 한 해 이었는데요.
송새벽: 저는 진짜로 시상식장만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번은 후보에만 들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정말 큰맘 먹고 한말이거든요. 사실 신인상이라는건 이민정 씨나 소지섭 씨, 강지환 씨처럼 주연급 신인에게 주어지는 게 대부분이잖아요. 그래서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런데 연말에 상을 너무 많이 주셨잖아요. 아! 나한테 왜이러시지? 이래도 되나 하다가 그런데 또 언제 이래보나, 하고 (웃음)

100: 그 해를 지나고 보니까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삶에서 좀 변화가 있나요? 부담도 좀 느셨을 것 같기도 하고.
송새벽: 진짜! 변화가 없어요. 정말. 변화도 없으니 부담도 없어요. 이를테면 연초에 길을 걸어가는데 아… 모자도 안 썼고 상도 받았고… 좀 알아봐 줄만도 한데 너어-무 못 알아봐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놨어요. (웃음) 뭘 알아봐야 변화가 있죠. 똑같아요. 물론 좋은 변화는 있어야겠죠.

100: 그래도 그런 상들이 삶에 부담으로 오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송새벽: 신경을 쓰지 않는, 아니 정확히 안 쓰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거에 취하면 아무것도 없으면서 어깨에 기왓장이 올라가고 목에 깁스하고 그러다가 무너지는 배우도 여럿 봤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고. 겸손 한 척이 아니라 진짜 겸손에 대해서 배우고 싶어요. 아, 진짜 겸손한 척, 하는 사람은 너무 재수 없잖아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송새벽 “무대 위나 아래에서나 똑바로 사는 거, 그거면 족해요”
100: 사실 이미 송새벽 말투라는 것이 대중들에게 인식될 만큼 유행이 되고 있는데 혹 이런 이미지가 그저 소비되고 끝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혹은 본인 스스로의 경각심 같은 건 없으신가요. 혹은 우리들이 모르는 많은 다른 카드들이 준비되어 있나요.
송새벽: 저다운 뭐가 있다는 이야기조차 듣기엔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충고나 걱정을 들을 때마다 저라고 왜 부담이 안 되겠어요. 나 그런가? 진짜 그런가? 그럼 어떡해야 되지. 스트레스를 좀 받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결론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송새벽으로서 할 수 있는 연기를 하자 그게 다 인 것 같아요.

100: 그게 오히려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일수도 있겠네요. (웃음) 혹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배우로서 살아가는 한 이것만은 지키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으세요?
송새벽: 무대 아래부터 똑바로 살자. 무대 위나 카메라 앞이나 아래에서부터 이어진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래에서 쓰레기, 양아치처럼 살다가 무대 위에서 막 순진한 척 하면 관객들은 다 알아요. 어떻게든 미묘하게 다 보이거든요. 그걸 눈치 못 채게 하려고 아래서부터 잘 살아야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거, 재수 없잖아요. 어쨌든 제 인생인데. 그 나름의 진실들을 관객들이 보실 수 있는 흐뭇한 풍경이면, 저는 그저 족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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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백은하 one@
편집. 장경진 thre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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