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적인 거, 재미없잖아요.” 이선균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기 톤에 대해, 격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나직하고 울림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의 연기관에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진폭이 크지 않은 미니멀한 연기를 통해 언제나 자신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살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이선균이라는 배우를 선명하게 인식시켰던 ‘태릉선수촌’의 동경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멀어져가는 청춘의 한 자락을 보내는 순간에도 악다구니를 쓰기보다는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체념의 한 마디를 남겼다. 그것은 결코 몰아치는 감정의 격랑은 아니지만, 언제나 잔잔할 것 같았던 수면 위로 퍼진 섬세한 파장은 오히려 더 큰 감정의 울림을 전달했다. 그에게 로맨틱 가이라는 이미지를 안겨줬던 MBC <커피프린스 1호점>의 한성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분방한 유주(채정안)를 사랑으로 지켜봐 주는 그는 기다림과 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미움까지 과도한 액션이 아닌 미묘하지만 선명한 디테일로 표현해냈다. 본인은 “한성에 비하면 훨씬 남자답고 아예 다른 인물”이라 생각했던 SBS <달콤한 나의 도시>의 영수가 결과적으로는 이선균에게 한성의 이미지를 더욱 고착시킨 건 그 특유의 진폭 적은 보통 사람의 느낌을 이들 캐릭터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의 연기 중 가장 공격적인 캐릭터였던 MBC <파스타>의 현욱과 그 이후 나온 <옥희의 영화>의 진구처럼 과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을 통해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더욱 또렷하게 자리 잡는 건 그래서다. 말하자면 로맨틱한 왕자님에게 현실적인 질감을 부여했던 이 배우는 고집 센 요리사(<파스타>)가 자신의 원칙을 깰 때의 순간 역시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찌질’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진구에 이르러 이 배우는 일체의 드라마를 지운 상태에서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은 보통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런 그가 가창력을 과시하기보단 “힘 빼고 불러서 듣기도 편하고 공감도 잘 되는” 노래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다음 이선균이 추천하는 곡들은 화려한 기교보다는 특유의 감성을 통해 추운 겨울을 밝히는, ‘추운 겨울에 들으면 좋은 음악’이다.




1. 지누의 < Jinujoke >
이선균은 테마에 맞는 곡을 검색이나 다른 이의 추천으로 고르기보다는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곡들을 추천했는데 가장 먼저 고른 지누의 ‘엉뚱한 상상 (White X-Mas를 기다리며)’ 역시 그렇다. “그… 지누가 부른 크리스마스 노래 있잖아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아무래도 겨울에는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노래가 어울리는 거 같아요.” ‘엉뚱한 상상’은 ‘White X-Mas를 기다리며’라는 부제처럼 착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올 거라는, 꼭 엉뚱하지만은 않은 상상력의 곡이다. 하지만 모두가 기억하듯 이 곡이 발표된 건 더운 여름이 시작된 시기였고 이 곡은 그야말로 앨범 제목 그대로 엉뚱한 ‘Joke’로서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다만 시기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차트 순위권에 오르지는 못했는데, 그 아쉬움 때문인지 지누는 이듬해 12월에 발매한 < Crossover >에 다시 이 곡을 수록했다.



2. Wham의 < The Final >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역시 이 곡이죠.” 맞는 말이다. 그의 두 번째 추천곡 ‘Last Christmas’가 아니라면 12월마다 거리를 울리는 스피커 중 반 정도는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만큼 왬이 부른 이 곡의 멜로디는 시간이 지나도, 심지어 왬이라는 그룹이 팝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조차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조지 마이클이라는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와 팀의 이미지를 담당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만든 이 듀오는 그야말로 90년대의 보이 밴드와 21세기의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비주얼과 가창력, 댄스 음악 모두를 선취한 그룹이었다. 비록 서로의 활동을 위해 팀을 해체하긴 했지만 그들이 남긴 임팩트, 기억, 그리고 ‘Last Christmas’ 같은 히트 넘버들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당장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지 않은가.



3. Various Artists의 < Love Actually O.S.T >
이번 플레이리스트에는 유독 크리스마스송의 클래식이라 할 만한 곡들이 많은데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역시 그러하다. “머라이어 캐리가 부른 곡이지만 저는 < Love Actually O.S.T >에 수록된 버전으로 추천할게요. 영화 속에서 여자아이가 ‘you’라고 손짓하며 부르는 그 곡으로.” 분명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그 자체만으로도 스테디셀러지만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올리비아 올슨이 커버하며 그 인기와 인지도가 새롭게 갱신된 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제목이기도 한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라는 가사와 함께 극 중 조안나가 손가락으로 샘을 가리킬 때 노래의 메시지와 영화의 서사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4. 들국화의 <2집 너랑 나랑>
“우선은 들국화 2집에 수록된 ‘또다시 크리스마스’를 추천하는데, 기본적으로 들국화 2집 전체가 겨울에 듣기 정말 좋아요.” 집에서 막내라 누나, 형들이 듣는 음악을 들으며 자란 이선균은 매일 LP로 들국화니 산울림, 김현식, 유재하, 신촌블루스를 들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겨울을 맞아 들국화의 ‘또다시 크리스마스’를 추천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들국화 2집은 겨울에 듣기 좋은 서정적인 곡들을 잔뜩 담고 있다. 그들의 1집이 ‘행진’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록 넘버를 통해 특유의 걸쭉함을 담아냈다면 2집의 경우엔 ‘또다시 크리스마스’나 ‘제발’ 같은 포크록 타입의 곡들이 더 서정적이고 차분한 감성을 전달한다.



5. Stevie Wonder의 < Number Ones (Deluxe Edition) >
“아무래도 겨울에 어울리는 곡을 골라야 하니 스티비 원더의 곡 중 하나를 추천하고 싶은데”라며 이선균이 어렵사리 최종적으로 고른 곡은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다. 사실 스티비 원더만큼 말도 안 되게 좋은 곡을 말도 안 되게 많이 만든 뮤지션도 드물 것이다. 그것을 사랑스러운 느낌의 러브송으로 한정해도 그럴 것이다. 이선균 역시 ‘Isn`t She Lovely’ 같은 곡들 사이에서 고민하며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골랐는데, 사실 스티비 원더의 다른 명곡들처럼 이 역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명곡이다. 특히 스티비 원더의 경우 새 시대의 악기였던 신시사이저를 자유자재로 다뤘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데 이 곡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에서도 단순한 듯 하면서도 감성적인 신시사이저 연주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파주>나 <옥희의 영화> 같은 작업이 더 취향에 맞아요. 휑한 느낌의 연기가 편한 것도 있고. 그러다 이번엔 좀 다른 걸 해보고 싶었고 마침 <쩨쩨한 로맨스>가 들어온 거죠.” 이 영화에서 그는 예술가적 자의식은 충만하지만 정작 잘 팔리지는 않는 만화가 정배 역할을 맡아 스토리 작업을 대신해줄 칼럼니스트 다림(최강희)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빤한 이야기일 수 있죠. 다들 해피엔딩인 걸 알며 보는 것도 있고. 하지만 그 과정에 자잘한 감정이 쌓여가며 다양한 재미를 주는 거 같아요.” 그의 말대로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쩨쩨한 로맨스>에게서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틱하거나 과장된 사건 없이, 단지 소소하고 쩨쩨한 일상 안에서 공감할만한 웃음과 사랑을 만들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12월과 함께 하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심지어 그 쩨쩨한 디테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선균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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