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우성│현실을 똑바로 그리는 실화 영화들
감우성│현실을 똑바로 그리는 실화 영화들
감우성은 부드럽지 않다. 모난 구석 하나 없이 반듯한 이목구비와 단정한 미소에 한없이 포근하게만 느껴졌던 이 남자는 사실 한 순간도 만만했던 적이 없다. 사랑에 빠지면서 모든 걸 버리는 재벌 3세일 때도, 너그러운 왕자님보다는 잘 삐져서 현정(김규리)을 긴장시키는 남자친구()였다. 또는 결혼한 애인의 숨겨진 남자로 사는 일상을 감내하다가도 한 순간 울컥하는 예민한 대학 강사()였다. 특히 SBS 의 동진은 친절하지도 않은데다 속까지 알 수 없는 까칠한 남자였다. 이혼 후에도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 은호(손예진)와의 엉킨 실타래를 끊지도 다시 매듭짓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동진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다쳤다. 동화책 속의 러브스토리가 아닌 일상에서 숨쉬고, 현실과 맞닿아 있는 연애를 보여준 에서 감우성이 아닌 동진은 상상할 수 없었다. 평범한 얼굴 뒤로 감정을 숨기지만 종종 뾰족한 가시를 드러내기도 하는 가장 보통의 남자.

그러나 연기를 통해 극단적인 감정의 파고를 겪고, 특별함이 자산이 될 수 있는 배우에게 평범하다는 평가는 자칫 장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배우치고는 평범하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감우성은 어떤 질문에도 돌려 말하거나 인사치레로 답하는 법이 없다. 천만관객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후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행보에 대해서도 “다 과거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아요. 그때는 운명이라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냥 다 과거예요”라고 담담하게 말할 정도로 자신의 데이터를 객관화시키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여전히 멈추지 않고 그리는 그림에 대해서도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 그 시간에 술 마시고 그러는 거 보다 훨씬 생산적이니까요”라고 효율성에 입각한 답변을 내놓는 감우성의 입매는 야무지다.

듣기 좋게 치장한 말이나 허울만 좋아 금세 허공으로 흩어지는 칭찬과는 거리가 먼 감우성처럼 그가 당신에게 추천하는 영화들도 ‘가짜’가 없다. 그래서 사랑이나 전쟁, 비극 등 모습을 달리할 지라도 각각이 가진 울림은 저마다의 묵직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어떤 판타지보다 현실을 똑바로 보아내는 실화에 끌리는 그의 성향은 감우성을 설명하는 데 한 목소리를 낸다. 그는 결코 부드럽거나 달콤하지는 않지만 ‘진짜’ 남자 혹은 배우라고.
감우성│현실을 똑바로 그리는 실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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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lvira Madigan)
1967년 | 보 비더버그
“실화만이 가지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잘 만들어낸 이야기도 충분히 감동을 주지만 ‘진짜’라는 게 가지는 깊이는 특별하잖아요. 배우도 실제 있었던 일을 연기하면 더 진짜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진짜를 더 진짜처럼 하고 싶은 욕심이랄까요? 은 학창시절에 봤던 굉장히 오래된 영환데도 아직도 기억나는 건 바로 그 덕분인 거 같아요.”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결말은 어떤 모습일까? 자주 연인들의 결합은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기에 함께 죽음을 맞는 식스틴(토미 베르그덴)과 엘비라(피아데게드 아르크)의 마지막은 아름답다. 그리고 귀족 출신의 장교와 서커스단의 소녀의 러브 스토리는 많은 이의 가슴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리지만 사랑에 있어선 누구보다 강했던 엘비라를 연기한 피아데게드 아르크는 20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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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Deer Hunter)
1978년 | 마이클 치미노
“가 개봉할 당시는 한창 전쟁영화 붐이 일던 때라 등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정말 많이 나왔어요. 그래도 어린 시절의 제게는 이 세상 최고의 영화로 남아 있는 게 예요. 거기에 큰 몫을 한 배우가 로버트 드니로구요. 그의 최근작들은 실망스러운 경우도 많았지만 그 때 로버트 드니로는 정말 굉장했죠. 이름만 나와도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최고의 배우죠.”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고문 방법 중 하나인 러시안 룰렛과 전쟁은 닮았다. 누가 죽고 살지 모르는 확률게임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삼총사인 마이클(로버트 드니로), 닉(크리스토퍼 월켄), 스티븐(존 세비지)은 베트남전에도 함께 참전한다. 그러나 포로로 잡혔다 탈출한 이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도 모두 전처럼 살아갈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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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Mission)
1986년 | 롤랑 조페
“실화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영화죠. 로버트 드니로, 제레미 아이언스, 리암 니슨 등 쟁쟁한 배우들이 나오지만 무엇보다 절 사로잡은 건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었어요. 평소에도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데 에서도 정말 엄청났죠. 특히 원주민들이 영화 종반부에 몰살당하는 장면은 영상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음악이 있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과라니족의 모든 것을 짓밟는 서구의 군대는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근대화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오만한 것인지 선연하게 보여준다. 1750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브라질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살육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 분쟁의 결과였고, 원래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은 39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의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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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Kekexili: Mountain Patrol)
2004년 | 루 주안
“보통 영화는 DVD로 구입해서 보는데 우연히 기대하지 않고 본 영화들이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아요. (웃음) 는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보게 됐는데 주연배우를 빼고는 실제 주민들이 연기를 했어요. 티벳의 마운틴 패트롤들이 밀렵꾼을 잡는 여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데 참 아이러니해요. 밀렵꾼을 잡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들에게서 압수한 가죽을 팔 수 밖에 없거든요. 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것 같죠?”

가가서리 혹은 커커시리는 티벳에 위치한 고원의 이름이다. 이곳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영양의 밀렵이 성행하는데, 이들을 ㅉㅗㅈ는 산악 경비원들의 삶은 고되기 이를 데 없다. 나라에 고용된 처지도 아니고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지만 티벳의 자연을 지키는 이들의 고군분투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끝없이 펼쳐진 고원의 압도적인 풍광마저 잊게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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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Nobody Knows)
2004년 | 고레에다 히로카즈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안타까울 정도로 슬픈 이야기인데,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매우 따뜻하고 아름답기까지 해요. 특히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난 뒤 지하철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연기는 얼마나 오래 어떤 스킬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계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게 가장 훌륭하다는 것을요.”

작은 아파트에서 쫓겨나지 않게 트렁크나 옷장에 숨어 지내는 동생들과 자신들을 버린 엄마를 대신에 아이들을 돌보는 맏이 아키라(아기라 유야). 그러나 이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이 난다. 1988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야기라 유야는 57회 칸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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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업을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실제 있었던 일을 작품으로 하면 더 진짜처럼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훨씬 더 열정적으로. 진짜를 더 진짜처럼 하고 싶은 바람이랄까요?” 실제 발생했던 ‘묻지마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신작 에서 감우성은 가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스스로 사형을 집행하는 강력반 형사다. 서늘한 포스터 속 그의 모습은 본인이 봐도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다. “한국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형사의 클리셰를 깨고 싶었다”는 감우성이 만들어낸 오정수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의미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느낌이에요. 전에는 내 앞에 당장 주어진 것을 해내기에 급급했거든요. 그런데 마흔이 되면서 주위도 좀 둘러보고, 작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좀 더 크고 넓게 보려고 해요. 늘 뭔가 증명하기위해 불안했다면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살려구요.” 누군가는 가 그에게 최고의 시절을 안겨줬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의 영광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막 새로운 출발선을 그어 놓은 감우성에게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장거리 주자의 승부처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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