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가 있다. 등을 지거나 마주보고 있는 이들은 적이다. 다만 필요에 의해 같은 길 위에 섰을 뿐, 둘 사이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강패(소지섭)와 수타(강지환)는 영화를 찍기 위해(), 한규(송강호)와 지원(강동원)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만났다. 조직의 중간 보스인 강패는 오래 전에 꾸었던 배우의 꿈 때문에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시키고 싶어 하는 배우 수타와 맞붙는다. 촬영장이라는 한 공간에 두 남자의 다른 속셈은 부딪치고 얽혀 서로에게 깊은 흉터를 남긴다. 그러나 한규와 지원의 공간에선 흉터 대신 온기가 자리 잡았다. 치열하게 싸우던 남자들은 마침내 의형제가 되면서 평화를 맞이한다.

이 남자들을 만나게 하고, 싸움을 붙였다가 마침내 화해시킨 이는 바로 장훈 감독이다. 에 이어 로 또 두 남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는 강패와 수타가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없어요. 상대방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볼 뿐이죠. 는 역시 두 남자가 나오지만 접점을 이루는 지점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요. 좀 더 인간적이죠.” 상대를 재물로 각자의 복권을 노리는 한규와 지원은 함께 살게 되면서 이념과 목적에 가려져 있던 서로의 외로움을 목격하고, 인간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이민 간 딸의 전화를 받는 한규의 뒷모습에 지원은 안쓰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지원이 말없이 끓여 놓은 삼계탕에 한규는 감동할 수밖에 없다. 끝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강패와 수타의 비극은 한규와 지원에 이르러 새로운 전개를 맞게 되었다.

“처음 현장에 들어갔을 때는 영화가 뭔지도 몰랐고, 그저 좋은 사람들과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작업을 한다는 게 좋았”던 장훈 감독은 이제 두 번째 장편영화를 내놓았다. 그리고 어느새 그가 들려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관객들의 기대감은 아직은 짧은 필모그래피와 반비례한다. 다음은 “영화를 만들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라는 그가 매혹 당했던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영화들이다.
1. (The Sixth Sense)
1999년 | M. 나이트 샤말란
“, 까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을 좋아해요. 특히 는 반전을 알고 봤는데도 너무 재밌었어요. 그 때는 스릴러 영화들에 빠져 있을 때였거든요. 한동안 반전 스릴러에 꽂혀서 시나리오도 그쪽으로 한참을 썼죠. (웃음) 그러다가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써보고, 다른 영화들도 보면서 영화에 반전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구나, 반전이 없이도 좋은 얘기들을 많이 할 수 있구나란 걸 깨달으면서 좀 벗어났죠.”

물론 는 반전영화의 대명사다. 그러나 크로우 박사(브루스 윌리스)의 정체를 둘러싼 비밀을 알고 보더라도 충분히 스릴러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진부한 공포영화의 클리셰들을 솜씨 좋게 요리하면서 자신만의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아이의 입에게서 나오는 하얀 입김만으로 관객을 서늘한 충격으로 얼어붙게 한다.

2. (Let The Right One In)
2008년 | 토마스 알프레드슨
“은 와 함께 작년에 본 가장 재밌었던 영화예요. 진짜 와, 너무 슬프고 아름다운 동화죠. 다소 잔인한 장면들이 있어서 무섭다는 분들도 계시는데 무섭다기보다는 굉장히 특별한 한 편의 동화 같지 않나요? 사랑에 관한 영화도 좋아해서 자주 보는데 저는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이런 쪽의 취향과 더 맞는 것 같아요. 꼭 비극적일 필요는 없지만요. (웃음)”

그 후로 소년과 소녀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모든 걸 버리고 사랑을 위해 떠나기엔 소년은 아직 너무 약하다. 눈처럼 순결한 소년에게 세상은 뱀파이어 소녀를 지키며 살아가기엔 너무 거칠다. 그래서 이 둘이 함께 떠나는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비극을 예감케 하며 한없이 슬프다. 영하 30도의 혹한을 견디며 영화에 임한 어린 두 배우, 카레 헤데브란트와 리나 레안데르손의 계산하지 않은 연기가 눈처럼 반짝인다.

3. (Plein Soleil)
1960년 | 르네 클레망
“두 남자가 등장하는 영화로 가장 재밌게 봤던 건 예요. 에서도 이 영화의 느낌들을 많이 참고했죠.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알랑 드롱이 방에서 억지로 친구로 관계가 엮어진 필립의 옷을 입고 거울을 보는데 뒤에서 필립이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 때 모리스 로네의 눈빛이나 알랑 드롱의 멋진 모습이란! 알랑 드롱은 연기가 묻힐 정도로 너무 멋져서 손해 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에서도 강동원 씨를 멋지게 보이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한계가 있더라구요. 탈을 씌울 수도 없고. (웃음)”

가진 것 없는 리플리(알랑 드롱)는 부잣집 아들 필립(모리스 로네)의 모든 것을 원한다. 그의 돈과 신분, 우아한 취향과 여자까지도. 결국 리플리는 필립을 죽이고 그가 가진 것들을 가로채지만 그토록 원하던 필립이 될 수는 없다. 살인과 거짓말의 악행을 벌이는 리플리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건 알랑 드롱의 멋진 외모 뿐만은 아니다. 많은 것을 욕망하지만 좌절당하며 사는 우리를 리플리에게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4. (Elvira Madigan)
1967년 | 보 비더버그
“굉장히 슬픈 멜로 영화예요. 이 연인들의 사랑은 가난이라는 현실에도 균열이 가지 않아요. 오히려 먹을 것을 살 돈이 없어서 숲에서 산딸기를 따먹거나 피크닉 바구니에 와인과 빵을 싸가지고 들판에서 즐기는 둘의 마지막 만찬 같은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어요. 결말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그것조차도 너무나 낭만적이죠. 둘이 가난 때문에 겪는 일들이 너무 현실적으로 와 닿는 한편 아름답기까지 해요. 제가 봤던 사랑영화 중에 제일 인상적인 영화예요.”

귀족 출신의 장교와 서커스단에서 줄을 타는 소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고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한다. 오로지 둘 만의 사랑을 위해 가정도, 인기도 모두 뒤로 한 채.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와도 창문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엄연한 실화지만 현실에선 너무 드물어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속 연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둘의 사랑을 완성한다.

5. (The Mission)
1986년 | 롤랑 조페
“ 같은 종교적인 영화도 좋아해요. 김기덕 감독님의 영화도 그렇고 훌륭한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들을 보면 현실에서 초월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런 느낌들이 영화를 보는 것을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주죠. 영화마다 느낌을 받는 지점들이 다 다르고, 층위가 다양한데 종교적으로 초월적인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인 거 같아요.”

종교만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던 1750년,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브라질의 국경지역에는 원주민 과라니족이 살았다. 서구 기독교의 수호자들이 이들을 계몽하고 선교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결국 그들의 오만함은 과라니족의 땅을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종교와 신념에 대한 묵직한 물음에 제 39회 칸 영화제는 그랑프리로 답했다. 서로 대척점에 선 신부를 연기한 로버트 드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을 보는 순간은 특별해진다.
“에는 지금의 한국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있어요.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영화에 힘 있게 들어와서 전체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장훈 감독의 바람대로 는 시종일관 터지는 웃음 사이사이 묵직한 울림으로 한국 사회를 중계한다. 남북 분단이 낳은 남파공작원 지원과 전 국정원 요원 한규에서부터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 문제까지 장훈 감독이 이들을 다루는 목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와 다르게 밝은 톤으로 가려고 의도했다”는 장훈 감독은 비극에 잘 맞는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키기도, 바꿔보기도 하면서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험들은 한 단계씩 거칠 때마다 매번 다른 무기들을 하나씩 제작해내고 있다. “전에 했던 걸 반복하는 건 의미가 없다. 내가 봤을 때 재밌고,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계획의 성공 여부는 자신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발견되는 그의 신무기들 덕택에 전망이 밝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편집.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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