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석을 인터뷰한 날은 그가 MBC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한 날이었다. 4시간이 넘는 녹화로 그는 지쳐 있었고, 목소리도 다소 건조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연기에 대해 말하는 순간부터 그의 눈은 빛났고,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할 수 있을 만큼의 경력과 인지도를 가진 스타. 동시에 대학에서 연기를 강의하고, 끊임없이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 정보석이 지난 25년 동안 TV 드라마의 중심에서 설 수 있었던 이유를 그 자신의 말을 통해 들어보라.‘무릎 팍 도사’ 녹화에서 말한 고민은 뭐였나.
정보석 : “노래가 안 돼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노래가 안 된다고? 랩도 잘하는 보사마 아닌가. (웃음)
정보석 : 아니다. 난 정말 노래를 못한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노래 같다. ‘무릎 팍 도사’에서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주고 노래하라고 했는데, 노래 부르다 음 나가는 거 보니까 그냥 포기하라고 하더라. (웃음)
“난 연기를 못했으니까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했다” ‘무릎 팍 도사’에서는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물어보는데, 지난 연기 인생을 정리하는 기분도 들었겠다.
정보석 : 그렇다. 특히 녹화 전에 작가들과 사전 인터뷰를 할 때 내 살아온 이야기를 쭉 하니까 망각하고 있던 것들을 되돌아보는 기분이 들더라. 내가 그 때 이렇게 했구나하는 생각도 들고. 한 번씩 자신을 되돌아보고 정리한다는 건 굉장히 좋은 기분이더라.
어떤 부분을 망각했던 건가.
정보석 : 내 의지. 예를 들어 연기가 힘들어지거나 연기를 잘못하면 관성이 생기고 연기를 있는 습관대로 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된 부분이 있었다. 과거의 연기에 대해 다시 보게 되고.
연기를 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정보석 : 매번 그러면 안 되겠지만, 연기에 대해 지칠 때가 있긴 하다. 나는 다들 연기하지 말라는 걸 오기를 갖고 연기를 시작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연기를 할 때 너무 경직 돼 있을 때도 있었고. 연기를 잘 해 보려고 대본이 나오면 열 두색 볼펜을 사용해서 읽을 때마다 줄치고 분석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준비하면서 내가 준비한 것만 맞추기 급급하니까 연기가 경직되더라. 그러면 그럴 때는 또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고, 지칠 때도 있다. 그러면 그 부분을 돌아보면서 다시 극복해야 한다.
을 하면서는 어떤가. 김병욱 감독의 작품은 시트콤처럼 웃기지만 드라마처럼 진지한 부분들이 많아서 캐릭터를 잡기 수월하지 않았을 것 같다.
정보석 : 처음 할 때는 대본을 아무리 읽어도 답을 못 찾았다. 첫 회에서 차창 밖으로 돈을 건네주다 계산을 잘 못해서 망신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 연기할 때는 돈을 줄 때 멋있는 척 폼을 재면서 했다. 그런데 해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더라. 그것 때문에 김병욱 감독과도 얘기를 많이 했었다. 지금도 그렇고.
보석이라는 캐릭터는 캐릭터 중 가장 멍청하고 어설프다는 점에서는 웃음을 유발하기 쉽지만, 내면적으로는 억눌린 게 많고 슬픈 일도 많다. 그 사이를 조절하기가 어렵겠다.
정보석 : 보석이는 평소에는 남들에게 주눅 받고 사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런데 족구를 잘해서 족구를 할 때는 장인어른인 순재에게도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 때 원래 보석이와 다르게 무조건 멋있게만 보여줘서는 안 된다. 거기서 보석이의 원래 캐릭터를 놓치면 그 상황에서 시청자가 공감할 수 없는 전혀 엉뚱한 보석이가 나온다. 이런 에피소드가 나올 때는 굉장히 조심스럽다. 첫 회에서 보석이를 그저 남자답고 멋있다고 해석하면서 그런 오류를 겪었던 거고, 계속 조율해 나가고 있다.
그만큼 캐릭터 연구가 중요했을 텐데, 의 정보석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정보석 : 얘는 바보가 아니다. 분명히 자기가 지금 처한 입장을 알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자괴감도 느낀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을 털어놓거나 자존심을 세울 곳도 없고. 이 캐릭터의 리얼리티는 거기서 봐야 한다. 이 사람은 살아오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젠 뭘 하든 자기가 잘 안됐다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속에 담은 말 안하고, ‘그냥 여기서 얘기 듣고 끝내자’라는 생각이 있다. 매 순간 자존감을 느끼거나 자존심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 생각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게 사는 게 습관이 돼서 묻혀서 사는 거다. 세경이와의 관계도 그런 캐릭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본다. 보석이 입장에서는 자기나 세경이나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아픔이나 눌림 같은 게 내면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세경이에게 “세경 씨까지 나를 무시해”란 말을 하는 건가. (웃음)
정보석 : 자기 입장에서 친구하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사람인데 세경이가 장인어른의 계산을 도와주면서 “얘마저”하는 감정이 생겼을 거다. 그러면서 얘가 적이 되고 나보다 우위에 서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격하게 되고. 거기서 세경이가 부사장 자리를 빼앗을 것 같다는 망상도 하는데, 그렇게 캐릭터의 감정선을 잡아서 약간 과장됐지만 웃음을 줄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게 시트콤의 웃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디오로 세경이 행동을 녹화해서 일일이 트집 잡는 에피소드가 나올 때 화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서 더 나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화해를 한 뒤에는 세경이에게 계속 말을 걸고. (웃음)
시트콤에서 당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속으로 억눌리고, 참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SBS 에서도 겉으로는 유약하지만 속으로는 ‘임을 향한 행진곡’을 부르며 학생 운동 시절을 잊지 않으려는 인물이었다.
정보석 : 아무래도 현실에 바탕을 둘 수 있는 인물을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의 보석이도 이 사람이 이렇게 인생을 살아온 건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보라면 결혼도 못했을 거고, 이 번듯한 집 딸과 결혼하려면 자기만의 매력이 있었을 거고. 그런데 이런 인물이 장인어른에게 눌려 살고, 뭘 하려다가도 포기할 때는 그런 이유가 있었을 거다. 수도 없이 트집 잡히고, 잘한 일도 욕먹는 일도 있을 거다. 그러면 자신감도 잃어버리고, 뭘 하려는 것보다 안 하려는 게 생겼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어떤 역을 하든 정보석만의 관점이라는 게 뚜렷한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배역이 사도세자나 공민왕처럼 고뇌하는 인간들이었다는 점도 그렇고.
정보석 : 내 내면 속에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아픔이나 눌림 같은 거. 분명히 선호하는 부분도 있고. 사도세자나 공민왕을 만났을 때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병상에서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연기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도 셰익스피어가 그리는 인간의 고민에 끌린 건가
정보석 : 그 때 읽었던 게 였는데,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었는데도 그 자리를 포기했지만 결국 자신과 집안이 몰락했던 사람의 이야기다. 이런 과정에서 인물이 생각하는 의로움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의 변화나 내면의 성격 변화가 그려지는 과정이 좋았다.
데뷔 후로 흔들림 없이 좋은 경력을 쌓았는데, 그런데도 불안하고 비극적인 부분에 끌리는 이유는 뭘까?
정보석 : 내 성격적인 부분에서 오는 불안 같은 건 아니다. 만약 배우가 자기 노력으로 자립할 수 있다면 나는 불안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배우는 작가가 선택하고, PD가 선택하고, 궁극적으로는 대중이 선택해야 한다. 대중이 선택하지 않는 배우를 누가 쓰겠나. 그러면 관객에게 선택 받는 배우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하고, 지금 세상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배우로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니까 불안하고 쫓길 수밖에 없다.
보통 대중은 탤런트가 중년이 되면 연기력도 안정이 되고 연기하는 캐릭터도 어느 정도 정해져서 더 이상 불안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당신은 나이 들수록 더 불안하고 복잡한 인물을 그리게 되는 것 같다.
정보석 : 배우는 자기 노력으로 자립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런데 다만 주변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연기를 하면 그 역시 도태된다. 10대나 20대는 배우와 관객이 같이 호흡을 하면 호흡을 하지, 책임을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40대를 넘으면 대중이 나를 있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책임감도 느끼게 한다. 내가 선택 받는 입장에 있지만 선택 받기 위해 야합해서는 안 되고, 타협해서도 안 된다. 내 세계를 개척하는 게 중요하다. 나를 원하는 관객들의 성향을 읽어내야 하는데, 반대로 지금 관객의 성향만 쫓으면 에너지를 잃는다. 관객은 나이 들고 삶이 바뀌는데 나는 그 사람들의 대중적인 반응만 쫓아다니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배우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40대가 넘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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