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명함이 없는 건 가끔 불편하고 아무 때나 전화가 울리지 않는 건 참 좋아요.” 마흔 하나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어딘가 히피 소녀 같은 느낌의 그가 말했다. 박성혜 전 싸이더스 HQ 본부장, 그는 꼬박 15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끝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스타의 매니저로 살았다. 김혜수, 전도연 등 수많은 배우들이 그와 함께 일했고 포토그래퍼였던 지진희를 끈질긴 설득 끝에 배우로 발굴한 사람도 그다. 거친 매니지먼트 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이자 능력과 신의를 인정받은 매니저로 한 때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 연예기획사의 중추에까지 올랐지만 2008년 봄, 그는 그동안 이룬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훌쩍 떠났다.

“어릴 때 토요일 밤이 되면 엄마가 항상 ‘성혜야, 한다’고 부르셨어요. 누가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연예계라는 곳 자체가 저에게는 판타지 세계였거든요. 팝을 듣기 시작한 중학교 때부터는 나 때문에 새벽까지 AFKN을 봤어요. 그 시절 일기를 보면 ‘프린스는 신이다. 그는 정말 대단하다.’ 같은 내용이 적혀 있어요. (웃음) 그래미 어워드에서 ‘퍼플 레인’을 연주하는 걸 보고 엄청 감동했던 거죠.” 그리고 와 팝을 사랑했던 소녀는 대학 졸업 후 짧은 회사 생활과 우여곡절을 거쳐 “가수 매니저 하는 줄 알고 갔다가” 배우들의 매니저로 15년을 살았다. 민감하고 자기주장 강한 창작자들과 연기자 사이에서 일을 조율하는 것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견뎌냈다. “제가 공부를 대단히 잘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거라곤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 사람들과의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능력뿐이었거든요.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여기가 한번 승부를 걸어볼만한 곳이라고 생각했죠.”

매니저로 일하는 동안 그는 함께 일하는 배우들 앞으로 들어오는 시나리오나 대본을 모두 읽었다. “어떤 배우에게 캐스팅이 들어왔을 때가 있고, 작품에 맞는 배우를 추천해 달라는 경우가 있어요. 읽으면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배우의 방향을 생각해 보죠. 좋은 작품과 좋은 배우가 만났을 때의 보람은 정말 커요.” 전도연의 MBC ‘간직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를 행복하게 떠올리고 MBC 때는 최한결이라는 캐릭터에 반해 공유로부터 “누나, 부담스러워요. 저는 최한결이 아니라 공유에요!”라는 농담 섞인 구박까지 들었다는 그가 함께 일한 배우들이 빛나 더욱 좋아했던 작품들을 어렵게 골랐다.
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MBC
1999년. 극본 정성희, 연출 이승렬
“장편 시대극에 타이틀 롤, 모험이었지만 대본에서 굉장한 흡인력이 느껴졌어요. 이승렬 감독의 연출력도 있으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시청률이 정말 잘 나와서 국민 드라마가 됐죠.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을 즐겁게 한 건강하고 밝은 이야기라 좋았어요. 사실 김혜수 씨는 MBC , 을 오래 했고 KBS 도 1년을 했으니 장편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인데 사람들이 김혜수라는 배우를 너무 오래 봤다고 느끼지는 않는다는 게 그녀의 힘인 것 같아요. 버라이어티한 느낌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도 결코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 없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배우에요.”
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KBS
2004년. 극본 이경희, 연출 이형민
“임수정 양의 이미지와도 잘 맞았지만 시청자로서도 푹 빠져서 본 작품이에요. 드라마 같지 않은 캐릭터와 스토리, 비주얼이 인상적이었어요. 원래 드라마에서 화려한 비주얼이 많이 들어가면 그림만 둥둥 뜨는 느낌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그 분위기에 맞는 배우들의 연기 톤과 대사가 그 세계를 다르게 만들어줬어요. 소녀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중성적인 느낌에 뽀얀 얼굴의 임수정과 레게 머리를 한 소지섭의 포스터 이미지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고 차무혁과 송은채라는 캐릭터들에게는 왠지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어요.”
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박성혜│나와 함께 했던 배우들이 더욱 빛난 드라마
MBC
2007년. 극본 도현정, 연출 김윤철
“ 의 은수 역으로 정유미의 캐스팅 요청이 들어왔을 때 매니지먼트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MBC 을 만든 김윤철 감독 작품의 여주인공이고, 시놉시스를 봐도 이 정도 캐릭터라면 안 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정작 정유미는 드라마 출연 경험이 없어서 겁을 좀 내는 바람에 주위에서 많이 설득했어요. 영화와 드라마는 시스템이 다른 데다 정유미가 연기를 ‘꾸며서’ 하질 못하는 스타일이라 고생도 했지만 작품은 정말 좋았어요. 스토리는 통속적이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비롯해 모든 요소들이 이렇게 촌스럽지 않고 밀도 높을 수가 있다니, 너무 놀라웠죠.”

업계의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자리를 내놓고 그가 간 곳은 뉴욕이었다. 15년 동안 스타들을 챙기며 정신없이 지내느라 남들 다 하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그는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일상과 노는 법을 배웠다. 백 번도 넘게 넘어지며 혼자 자전거를 배웠고 블로그를 만들고 아침 일기를 썼다. 뉴욕 바텐딩 아카데미에 가서 자격증도 따고 춤추는 게 즐겁다는 사실을 서른아홉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그가 내놓은 책 는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 류의 과시용 자서전도, 이니셜이 난무하는 가십성 신변잡기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을 알고 용기 있게 뛰어든 세계에서 뭔가를 이루어냈던 시간들과 시행착오에 대한 담백한 기록에 가깝다.

“이제 인생 1막이 끝난 느낌이에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실제로 했고, 또 충분히 했으니까 후회 없고 이만하면 만족해요. 그리고 책을 쓰다 보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애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또 뭘 하고 싶은지를 돌아보는 계기도 됐구요.” 그는 요즘 초등학교 때까지 쳤던 피아노를 다시 배운다. 매니지먼트 개론서도 준비할 생각이다. “음악을 원래 좋아하는데 음악적 다양성이 무시되고 있는 한국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그걸 바꿔놓을 만한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 중이에요. 새로운 업계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니까 아기가 된 기분이에요. (웃음)”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간절히 원하고 자신과 치열하게 부딪힌 이들에게만 내려지는 축복일 것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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