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여름이 지나야 가을이 온다
500일의 여름이 지나야 가을이 온다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 와 은 각각 제 삶의 한 시기를 지배했던 영화였습니다. 유명인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속물성과 지독한 외로움을 목격하는 사람으로서의 딜레마를 느낄 때쯤 보았던 는 사랑했던 대상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짜릿한 일인지를 알려주었고, 잠시 직장을 떠나 뉴욕에서 생활 하던 중 보았던 그렉 아라키 감독의 은 다시 한 번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매혹을 느끼게 해주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얼마 전, 이 두 영화에서 가장 명징한 인상을 남겼던 배우들을 한 영화에서 보는 행운이 있었으니 바로 지난 21일 개봉한 의 주인공인 주이 디샤넬과 조셉 고든-레빗이었습니다. 15살 나이에 에 기사를 쓰게 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에서 주이 디샤넬은 희대의 명반들을 침대 아래에 남기고 집을 떠난, 그리하여 남동생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팜므파탈의 누나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 두 남자의 재회를 담은 에서 조셉 고든-레빗은 소년과 청년 사이에 놓인 옴므파탈의 남자로 등장합니다. 이 치명적인 매력의 남녀가 만나 벌어지는 500일간의 연애이야기라니! 사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에 대한 기대는 하늘 저 위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연애를 권하는 달콤한 데이트무비라기 보다, 오히려 그 판타지에 속지 말 것을 경고하는 리얼리티 쇼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그 현실을 돌파할 힘을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계절이 지나면 마치 기억상실증 걸린 것처럼 잊어버리고 마는 잔인한 간절기의 풍경, 그러나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봄날을 지나 잔인함으로 수렴되는 그 여름날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조용한 가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는 경쾌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달콤한 열매들은 일정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수확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허진호 감독의 를 다시 한 번 꺼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봄날은 가고 500일의 여름을 지나고서야 맞이하는 가을. 어쩌면 망각이라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질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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