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같았다. 차승원의 얼굴을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의 이몽학 역을 위해 도자기로 붙인 날카로운 송곳니 때문만은 아니다. “웃을 때에는 나이가 드러난다”고 엄살을 피우지만 누군가의 피로 영생을 유지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40이라는 숫자로부터 멀어보였고, 짙은 수염과 핼쑥한 얼굴은 그의 주위에 어딘가 비현실적인 자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뱀파이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런 세련된 외모와 상반된 연륜 있는 목소리와 여유 때문이다. 1998년 SBS 의 보조 MC로 등장한 이후 최근 신작 에서 얼굴과 딱 어울리는 ‘35살’ 형사 김성열을 연기할 때까지 그는 정말 수많은 활동을 했지만 그 시간의 흔적은 오직 눈빛과 목소리의 깊이로만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그 시간의 깊이를 인간의 언어로 구체화한 인터뷰다. 참고로 인터뷰 장소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다.KBS 에 출연한 거 보고 좀 놀랐다. (웃음) 뉴스 스튜디오라는 공간 안에 있는 게 이질적이더라.
차승원 : 그렇지? 일단 안 편하다. 아나운서들은 편하게 하라고 하는데 나는 그분들이 안 편하니까. (웃음) 실제로는 다리를 꼰 자세가 편한데 그렇게는 못하고, 또 손을 올릴까 내릴까 고민하기도 하고. (웃음) 뭐, 그렇다고 그 자리가 싫진 않다. 일단 국민 다수를 상대로 하는 방송이니까. 어느 섬에 있는 아주머니도 일 나가기 전에 볼 수 있는 거고. 다만 그러다 보니 자극적이지 않게 말하려 노력하게 된다. 말실수 하지 않으려고 너무 몸을 사리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그 자리에선 웬만하면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말을 해야지.
“내가 봐도 나는 전혀 푸근하게 생기지 않았다” 인터뷰어에 따라 대화 스타일이 많이 바뀌는 타입인가?
차승원 : 많이 다르다. 패션지와 인터뷰할 때는 욕도 섞어 이야기하고 그런다. 그쪽 사람들은 봐온 지 굉장히 오래됐으니까. 지금 편집장하는 사람들은 내가 처음 모델 할 때 기자나 수습기자 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말하는 게 되게 다르지. 달라야 하는 거 아닌가?
프로모션을 위해 보편적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필요한 건데 이번 작품 은 그런 보편적 관객층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
차승원 : 예전에 하던 영화들은 아까 말한 섬에 계신 할머니들도 즐길 수 있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공감할 얘기는 못한다. 그게 내게 안 어울리거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모두가 공감하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점차 그 색깔을 내 걸로 만들고 인정받는 거다. 음식으로 말하자면 모두가 먹을 수 있는 밥 같은 음식이 있고 식성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특별한 음식이 있지 않나. 후자를 찾아가고 싶다. 20대에는 특별하지 않은 음식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20대에 그런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차승원 : 예전에는 남들이 내게 바라는 이미지라는 걸 굉장히 무시했다. 그런 걸 안 하려고 노력했던 편이고. 그건 모델 때 많이 해봤으니까. 만약 모델 때 이미지를 영화에 그대로 가져갔으면 일상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나왔을 텐데 그 때는 일상적인 연기에 흥미를 느꼈다.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차승원 : 이제는 그런 캐릭터를 하면 흥미를 느끼지 못할 거 같다. 물론 열심히는 하겠지만 뭔가 내가 안에서 찾아내서 끄집어내는 맛은 없을 것 같다. 만약 휴머니즘에 입각한 영화에 내가 출연한다면 그 느낌이 날까? 내가 오늘 나온 방송을 모니터 해봐도 나는 전혀 푸근하게 생기지 않았다. 찍었을 때 이런 리뷰가 올라왔다. ‘열심히는 했다. 하지만 안 불쌍해 보이는데 어떡할 거냐’고. 내가 아무리 푸근한 척 하면서 정말 열심히 애정을 가지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날 푸근하게 안 봐주는데 어쩔 건가.
그래서 을 선택한 건가.
차승원 : 다분히 인위적인 느낌이 나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서 골랐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약간 어둡고 끈적이고 도시적인 색감을 느꼈다. 내겐 그런 게 어울린다. 취향이 그렇다. 히치콕 영화나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굉장히 영화적이고 과장된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그런 성향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활 연기를 할 때보다 조금 인위적인 작품을 할 때 더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에도 휴머니즘은 있다. 가족애에 대한.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맥시멈의 것이다. (웃음)
“에선 무조건 멋있어 보이려고 의도했다” 그것 때문인지 의 김성열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의 형사 이미지와는 달리 ‘대놓고’ 멋있게 나온다. (웃음)
차승원 : 전적으로 내가 의도했던 바다. 이 영화를 리얼리티에 입각한 스릴러가 아닌 인위적 냄새가 나는 스릴러라고 봤기에 외피 역시 일반 작품의 형사처럼 꾸미고 싶지 않았다. 아까 색감 얘기를 했는데 그게 인물 스타일에서도 묻어나오는 거다. 어떤 리뷰를 보니 김성열에 대해 치열하게 두뇌를 쓰는 형사라기보다는 패션 잡지에 나오는 남자 같다고 했는데 의도한 거니까 괜찮다.
사실 그래서 시선이 김성열로만 쏠리는 면이 있다. 그러면서 그가 허우적대는 모습에 더 이입하게 되는 것 같고.
차승원 : 그렇다, 허우적이다. 얘가 초반에 냉철했다가 나중에 자기 아내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라는 걸 알고 허둥대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경찰대 동기인 동료가 과잉 진압한 것을 곧이곧대로 증언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사람이 정작 가족이 연루되자 더한 사람이 되더라는 것을.
그것이 아내에 대한 사랑 혹은 과거에 딸을 지키지 못한 죄의식 때문이라고 보나.
차승원 : 아마 두 가지 경우 모두일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우선 자기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아빠지 않나. 그에 대한 원죄 의식이 있는 것 같다. 자기의 실수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아닌가. 그걸 어떻게든 돌리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아내를 지키는데 더 집착했던 것 같다.
과거 딸이 살아있을 때 찍은 비디오를 보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스타일리시한 형사와 애틋한 부성애를 가진 아빠의 모습 모두가 어울린다.
차승원 : 지금 나이니까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다. 만약 20대에 이런 영화를 했으면 좀 쌩한 느낌이 났을 거다. 눈에 힘만 ‘이빠이’ 주고. (웃음) 지금은 어느 정도 완충이 된다. 나름대로 연륜도 생기고 가족과의 정도 더 알아가고 사회생활도 많이 했으니까.
그러면서 40대 배우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새롭게 개척해나가는 느낌이다.
차승원 : 그런데 왜 나만 40대인 것처럼 그러는지 모르겠다. 불혹이라고.
안 그래 보이니까 나이가 더 강조되는 것 아닐까.
차승원 : 자꾸 불혹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우리나라가 그 세대를 보는 시각이 아직 치우쳐있다는 뜻이다. 예전부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우리나라 40대가 되게 멋대가리 없게 그려진다고 생각했다. 삶에 치이고…
배도 나오고? (웃음)
차승원 : 그런 게 나는 너무 싫었던 거지. 그 나이 대 남자들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을 텐데 왜 저런 방식으로만 쓰일까. 배우라는 직업이 작품 안에서 나라는 도구의 쓰임새를 생각하는 일인데 그걸 올드하지 않게 써보고 싶었다. 단순히 20대 같은 몸매를 만들자는 게 아니라.
인터뷰,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인터뷰,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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