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모자를 쓰지 않은 김지운 감독의 사진이라니, 이건 정말 ‘레어’ 아이템이다. 김지운 감독과 함께 제 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이하 JIMFF) 트레일러 음악작업을 했고 이번 제천행을 함께 한 뮤지션 모그(Mowg) 역시 “턱시도 입는 해외 영화제를 제외하고 김지운 감독의 맨 머리는 처음 본다(웃음)”고 진술하는 이 생경한 비주얼은 최근 김지운 감독이 보여주는 행보를 보면 꽤나 일관성 있는 선택이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던 사람이 눈을 보여주고, 에스프레소만 마시던 사람이 술자리에도 어울리고, 늘 까다롭게 고심한 마지막 카드만을 꺼내놓던 그의 영화에 어느 순간 과정의 고뇌가 보였다. 재능과 총기가 넘치던 젊은이가 어느 순간 여유와 넉넉함을 지닌 어른이 되어갈 때, 우리는 그런 이가 만든 결과물들을 거부할 힘이 전혀 없다.

“뻔하고 지루한 트레일러를 탈피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변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올해 JIMFF의 트레일러는 온기와 냉기, 습기와 윤기, 퓨처리즘과 클래식이 균형감 있게 자리 잡고 있다. 제천으로 오는 길 “네비게이션이 있지만 쓸 줄 몰라 국도로 접어들었는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더라”라고 말하는 이 아날로그 남자가, 피아노의 주문으로 고장 난 로봇을 깨우는 아름다운 디지털 화면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보았다.

어떻게 올해 JIMFF의 트레일러를 만들게 되었나.
김지운
: 조성우 집행위원장이 매년 영화제 와서 뭐라도 좀 하라고 괴롭혀왔다. 이거 저거 시켜도 안 하니까 올해는 결국 트레일러를 만들라고 하더라. (웃음) 사실 다른 제안들은 거절해도 상관없었는데, 이건 영화를 만드는 거니까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감독으로서 어떤 영화든지 늘 만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동안에 이런 저런 영화제 트레일러 보면서 좀 새롭게, 재미있게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혹시 해외영화제 트레일러 중에 인상적으로 본 게 있었나?
김지운
: 시체스 영화제 트레일러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킹콩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위에 올라가서 비행기도 잡고 뭐 그런 거였는데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트레일러 제작기간은 어느 정도였나.
김지운
: 제안을 받고 한 45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6월 한 달을 새 영화 준비 때문에 미국에 가 있어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스태프들 모으고 준비하고 하루 꼬박 촬영하고 이후 편집, 후반 작업해서 열흘 만에 만들어진 트레일러다.

“심은경은 총기가 느껴지는 배우다”

영화제에서 요구한 특별한 사항은 없었나.
김지운
: 그런 건 없었는데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제천영화제의 상징인 물, 음악, 호수 같은 아이콘을 신경 안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너무 따르면서 만들려고 보니 별로 재미가 없었다. 모든 매체 중에 가장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것이 영화인데, 영화는 ‘감정’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예술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게 ‘음악’이라는 생각에서 이번 트레일러의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 결국 심플하게 음악과 영화를 잇는 소재가 뭐가 있을까 고민 하던 중에 개봉을 못하고 있는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 내가 만든 <천상의 피조물>의 주인공이었던 로봇을 생각해 냈다.

환경영화제도 아니고 이런 재활용이라니. (웃음)
김지운
: 이미 1억 넘게 들여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로봇이 있는데 아깝지 않나. 당연히 써야지. (웃음) 이 로봇의 이름은 ‘인명’이었다. <천상의 피조물>이 절에서 일하던 안내로봇이 득도에 이른다는 이야기였는데 인명은 그의 법명인 셈이다.

비옷을 입은 소녀(심은경)가 로봇을 한참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피아노 쪽으로 달려가는데 왜 소녀는 그렇게 로봇을 보고 있었던 걸까?
김지운
: 편집하면서 생략된 부분이 좀 많이 있다. 원래 풀 스토리로 보자면 근 미래에 한 소녀가 쓰던 애완로봇을 버리러 간 폐기장에서 근사한 로봇을 발견한다. 처음엔 리모컨도 눌러보고 건드려도 보고 이거 저거 해보는데 안 움직이자 죽었다고 생각하고 두리번거리던 중에 피아노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쳐본다. 그런데 그 소리에 로봇이 반응하는데 부모가 부르는 클락션 소리에 뛰어가다가 돌아보니 로봇이 천천히 움직이고 피아노로 걸어가고 금방 꼬마가 쳤던 멜로디를 그대로 따라 친다. 결국 소녀가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로봇을 쳐다본다. 그리고 남겨진 로봇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그 옆에 잠자고 있던 다른 구식 로봇들이 깨어나 움직이는 이야기였다.

최근작 <불신지옥>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심은경과의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김지운
: 임필성 감독과 <헨젤과 그레텔> 찍을 때부터 현장에도 놀러 가고 사무실도 가까이 있어서 자주 보아왔던 배우다. 마치 예전에 문근영을 보던 느낌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문근영이 천재적으로 가진 게 있었다면 심은경은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지고 있달까. 어쨌든 총기, 같은 게 느껴지는 배우다. 한번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맥스 앤 더 정크맨>은 흔들리는 마음의 지점들을 담을 예정이다”

신작으로 알려진 <맥스 앤 더 정크맨>은 언제쯤 촬영에 들어가나.
김지운
: 일단 완성된 시나리오를 미국 쪽에 넘겨놓은 상태다. 느와르 영화니 아무래도 계절적으로 겨울이 필요하다. 내년 1월 달에 촬영이 못 들어가면 9월 이후로 기다려야 하니까 1월엔 들어가야지.

촬영을 필라델피아에서 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그 도시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김지운
: 느와르를 표방하고 있는 범죄물이고 느닷없이 파멸되어버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좋은 공간이면 했다. 그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하기에는 유럽스타일의 오래된 도시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라 처음엔 런던을 생각했는데 제작사에서 미국에서 찍으면 좋겠다고 해서 가장 적합한 곳을 찾다 보니까 필라델피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 달 정도 갔다 왔는데 필라델피아는 상당히 어둡고 우울한 느낌이 있는 도시였다.

원작이 있는 경우, 각자마다 그 원작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찾기 마련이다. <맥스 앤드 더 정크맨>에서 김지운 감독이 발견한 가장 큰 매력은 뭐였을까?
김지운
: 어쩌면 <달콤한 인생>이랑 비슷한 지점일 수 있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잘 잡아낸 영화였다. 남자도 여자도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정황들이 많이 있더라. 그리고 그런 것을 아주 나지막이 집요하게 쭉 가져가는 것이 좋았다. 어떤 상황에 몰리고 그 상황에서 흔들리는 마음의 지점들을 담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캐스팅이 있나.
김지운
: 확정된 건 아니지만 주인공인 형사 역에는 클라이브 오웬을 생각하고 있고 여주인공은 시에나 밀러 등과 이야기 중이다. 시에나 밀러는 이번 방한 때 만났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해외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하는 첫 영화일 텐데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나?
김지운
: 두렵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 할 때도 뭐가 있었나. (웃음) 물론 영어도 잘 못하고 모든 게 처음 겪는 일이겠지만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고 거기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인데 안 되면 또 설명해서 찍고 그러다 보면 결국 잘 되겠지. (웃음)

글. 제천=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제천=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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