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나이로 기억된다. 영화 <친구>에서 동수 곁을 지키는 부산 건달 은기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후부터 사랑하는 여인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MBC <주몽>의 우태, 식물인간이 된 그룹 총수를 보필하는 KBS <꽃보다 남자>의 정 실장까지 배우 정호빈은 강한 눈빛과 의리를 지닌 남자 역할을 맞춤옷처럼 소화해냈다. 그리고 신라의 모든 능력자들을 휘하에 거느린 미실에게 필마단기로 맞서는 MBC <선덕여왕>의 국선 문노를 통해 그는 사나이 캐릭터의 어떤 정점을 보여주며 3회 이후 사라진 뒤에도 아직까지 드라마에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다. 그 스스로 해동검도 4단의 고수인데다 농담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진지함이 몸에 밴 그에게서 배우보단 남자가 먼저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덕만 뿐 아니라 시청자들도 문노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것 같다. (웃음)
정호빈
: 숨어서 이런저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단순히 신라의 내정뿐 아니라 삼국 전체를 보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언제 나올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마 20회에서 30회 사이에 등장할 거다.

“앞으로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면 알아봐 주겠지”

비록 실질적으로는 초반 3회까지만 나왔는데도 문노의 존재감이 대단한 건 미실의 장악력에 거의 유일하게 대항한 인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정호빈
: 그래서 아픔이 많고 외로운 남자다. 사실 그냥 쉬운 길을 갈 수 있지 않았나. 과거의 동료였던 설원랑이 손을 내미는데도 그걸 뿌리치고 진흥대제의 유지를 지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다. 게다가 미실파와는 달리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들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는 남자니까 외로울 수밖에. 비록 지금은 안 보이고 있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런 남자를 좋아하나.
정호빈
: 남자라면 모두들 그런 남자를 좋아하지 않나. 자기 자신은 힘들고 아프지만 큰 뜻을 품고 뭔가 해보려는 그런 남자.

그걸 물어본 이유는 문노를 비롯해 SBS <올인>의 정준일, <꽃보다 남자>의 정 실장처럼 의리 있고 남자다운 역을 많이 맡아서다. 선한 역이라고 보기 어려운 <친구> 은기도 동수의 오른팔이었고.
정호빈
: 우선 그런 역할이 나에게 많이 들어온다. 쉽게 생각해서 코믹 연기 하는 분들에겐 코믹한 역이 많이 들어오고, 악역 하는 분들에겐 악역이 많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거다. 나 같은 경우 연기할 때 크게 오버하는 느낌이 아니다보니까 중간적인 입장을 많이 맞게 되는 것 같다. 모시는 분의 속내를 잘 파악하는 동시에 밑에 있는 수하들을 잘 다스리는 그런 역할을. 그런 중간자적인 역할은 사실 어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거의 대부분 필요한 편인데 내가 여태 쌓아온 이미지와 캐릭터가 잘 맞으니까 많이들 찾는 것 같다.

스스로는 어떤가. 그런 역할이 편한가.
정호빈
: 이런 식으로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좋다. 나중에 코믹한 역할을 하던 악역을 하던 다른 느낌의 연기를 할 때가 오긴 할 거다. 하지만 변신할 때 하더라도 우선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구축해서 대중에게 정호빈이라는 배우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한 다음에 바꿔야 할 것 같다.

좀 더 알려진 다음에 다른 역할에 도전해 보겠다는 뜻인가.
정호빈
: 아무래도 아직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진 못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하는 스타일의 연기를 열심히 해서 ‘아, 정호빈은 저런 배우구나’라고 대중들이 인식하게 됐을 때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면 그때서야 사람들도 그걸 연기 변신이라고 이해해줄 것 같다. 또 개인적으로 코믹한 걸 하더라도 표정이나 멘트를 통해 억지로 웃기는 것보단 진지한 상황에서 한 방에 뒤집어지게 만드는 블랙 코미디를 하고 싶은데 지금의 문노 같은 이미지가 구축되고 나서 코믹을 시도하면 그런 게 가능해지지 않을까.

스스로 대중적이지 않다고 여기나.
정호빈
: 이제 얼굴이야 어느 정도 알겠지만 그래도 아직 내 이름을 모르는 분들이 많을 거다. 조급하진 않다. 문노 역할도 그렇고 앞으로 할 역할을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면 알아봐 주겠지. 내 나름의 소신을 가진 기다림이다.

“서있기만 해도 공간을 꽉 채우는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

사실 당신이 <친구>, <올인>으로 대중의 눈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기다림이었을 것 같다.
정호빈
: 그런 셈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대구에 있는 극단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10년이 넘어서야 영화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으니까.

그 시기가 많이 궁금하다. 영화에 진출하기 전에는 트럭 운전도 하며 생활했던 걸로 아는데.
정호빈
: 연극으로는 생활이 안 되니까. 극단에 들어갔다고 했지만 내 또래나 선배들과 같이 하는 수준이었지 어떤 실력 있고 경험 많은 선생님이 계신 극단은 아니었다. 지방에는 극단 자체가 얼마 없으니까. 그러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직접 극단을 운영했는데 잘 안됐다. 정확히 말해 망했지. 경영이고 뭐고 그냥 아무 것도 없는 상태니까. 서울에서 연극하는 사람들보다 더 어려웠을 거다. 나름의 추억으로 남긴 했다.

그러다 영화라는 대중적 매체의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어떤 의미였나.
정호빈
: 떨리는데 긴장되진 않았다. 연극부터 시작했지만 배우의 꿈을 키운 건 중, 고등학교 때 영화를 보면서부터였다. 말하자면 내가 처음부터 서고 싶었던 건 바로 카메라 앞이었던 거다. 그러니까 좋을 수밖에.

그럼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그 힘든 길을 걸었다는 건데 대체 어떤 영화들을 보며 연기에 대한 꿈을 키운 건가.
정호빈
: 소위 방화라고 불리는 박노식, 허장강 같은 한국영화의 대선배님들이 출연했던 시기의 영화들을 보며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 때 배우들은 정말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비록 후시 녹음이지만 목소리도 멋있게 나오고 액션도 멋있었고.

그러고 보니 박노식 같은 방화 시대 캐릭터의 비장미가 본인에게서도 느껴지는 것 같다.
정호빈
: 그럼 영광이다. 정말 멋있는 캐릭터 아닌가. 죽더라도 뭔가를 꼭 지켜내는 역을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들이랑은 많이 다르지. 박노식, 허장강 선생님이 연기했던 캐릭터가 만약 지금 시대에 있다면 분명히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다. 그런 멋진 남자 캐릭터를 보며 연기자를 동경하다가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니로 같은 성격파 배우를 보며 내 연기의 모티브로 삼았다.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눈빛이 강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런 게 성격파 배우인 건가.
정호빈
: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좀 그렇지만 우선 노력은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성격파 배우는 없는 것 같다. 그건 어떤 테크닉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어떤 공간에 배우 혼자 서있는 풀샷을 잡았는데 그 공간을 아무 말 없이 꽉 채우는 그런 연기. 나중에 대한민국에도 그런 배우가 있었다는 이야길 남기고 싶다.

“시청자들은 변한다, 난 겸손하게 신인의 마음 그대로 쭉 가는 거다”

배우로서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싶은 건가.
정호빈
: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항상 꿈은 배우 정호빈의 이름을 남기는 거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아시아든 어디든. 내가 죽더라도 정호빈은 이러이러한 배우였노라고 기억해주면 좋겠다.

이름을 남긴다는 면에서 처음 카메라에 섰을 때만큼 처음으로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 올라갈 때도 좋았겠다.
정호빈
: 물론이다. 사실 처음 카메라에 섰던 작품은 개봉을 못했다. 그래서 처음 엔딩에 이름을 올린 작품은 <쉬리>다. 사실 그 때만 해도 일인다역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니까. 어느 정도 배우로서 인식될 수 있었던 건 그 다음 작품인 <친구>에서였다. 그때가 연기 인생의 어떤 분기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분기점 이후 아까 말했든 누군가의 오른팔 역할을 꾸준히 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작품들의 흥행도 상당히 좋았다. <친구>도 그렇지만 드라마 <주몽>, <꽃보다 남자> 같은 작품은 한 해를 대표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정호빈
: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알겠지만 드라마 현장은 바쁘고 힘들다. 그 와중에 시청률까지 안 좋으면 정말 분위기가 완전히 침체된다. 시청률이 잘 나와야 의기투합해서 끌고 갈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이번에 문노 역을 하면서 많이 부담됐다. 1, 2회에서 나름 메인 캐릭터인데 이 때 시청률이 잘 안 나오면 50부 내내 분위기 다운될 거 아닌가. 정호빈이 드라마 말아먹었다는 소리 들을까봐 정말 걱정 많이 했다.

그럼 시청률 외의 시청자 반응에도 신경 쓰는 편인가. 가령 인터넷 게시판이라던가.
정호빈
: 그쪽엔 관심 없다. 검색어 오르내리고 그런 것. MBC <히트> 출연했을 때 갑자기 검색어 순위 1위도 해봤는데 그 때도 후배 동생이 연락해줘서 알았다. 내 이름이 검색어 1위라서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더라. (웃음) 시청자들이 호기심에 검색하는 건데 그런 건 언제 또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영화판에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그렇고 일희일비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정호빈
: 꾸준한 걸 좋아한다. 모든지 내가 당장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발판을 만들고 구축해 나가다가 어느 시기가 되면 딱 보여주는 거지. 또 그렇게 살아왔고.

그 꾸준함 가운데 조금씩 상승 그래프를 그렸다고 생각하나.
정호빈
: 조금은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인드컨트롤을 한다. 좀 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조금 잘 나간다고 해봤자 영원할 수는 없지 않나. 시청자들은 변한다. 그러니 겸손하게 신인의 마음 그대로 쭉 가는 거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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