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회화, 특히 르네상스 시기 회화의 발달은 캔버스라는 평면 안에 조각의 느낌을 살리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지오토의 <신앙>은 고딕 시대의 환조 작품을 보는 듯한 입체감을 주고, 최초로 원근법을 회화에 도입한 마사치오의 <성 삼위 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에 이르러 인류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감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조를 거치며 인상주의에 이르러 기계적인 공간감보다는 우리 눈에 비치는 인상을 화폭에 담았던 회화는 추상주의에 이르러 평면성을 부각하는 단계에 이른다.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 같은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던 이러한 평면성에 대해 모더니즘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가 비로소 조각이 아닌 회화만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았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평면에 구현된 입체감은 거짓이고, 마크 로스코 같은 2, 3개 색만으로 이뤄진 색면 회화는 순수하다는 이론으로 한 시대를 들었다 놓은 그린버그를 소개하기 위한 과정이다. 말하자면 음악은 음악, 회화는 회화만이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순수한 미가 있다는 얘기인데 이번에 소개할 ‘공간을 그리다-선으로 만든 세상’展에서 볼 수 있는 김병진 작가의 조각들은 오히려 얼핏 평면 드로잉처럼 보이는 작품들이다. ‘apple tree’나 ‘blossom’ 같은 작품에서도 그런 경향이 보이지만 무엇보다 ‘black blossom’에선 철선의 입체감이 오히려 세밀한 스케치처럼 보인다. 그린버그의 이론대로라면 이 작품들은 조각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입체감을 포기한 작품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래서 보기엔 더 재밌다. 물론 철선을 이용한 입체 작업을 하면서도 전시 제목 그대로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방식에 대해 3차원적 입체의 공간에 회화적 유희를 부리는 어쩌고저쩌고 하는 수사를 붙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전시 리플릿 빽빽한 이런 수사들이 답답할 때가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그린버그가 결국 독단적인 이론가로 몰렸던 건 자신의 패러다임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배제했기 때문인데, 가끔 이론이란 이렇게 작품 자체의 재미를 즐기는 법을 가로막기도 한다.

<현대미학 강의>
2003년│진중권

지금이야 보수 우파 논객들, 변희재 같은 정체불명의 존재들과 논쟁을 벌이는 진보 논객으로 이름이 높지만 진중권은 기본적으로 미학자다. 하지만 스스로 발터 벤야민과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학문적 태생 때문인지 주로 유럽 철학자들의 미학을 많이 인용하는 편인데 이 책 <현대미학강의>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의 미학을 소개하며 예를 드는 작품은 그린버그의 적자인 바넷 뉴먼의 것들이다. 물론 이 책이 뉴먼을 이야기하며 그린버그를 빼놓는 게 문제될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하나의 작품이 다양한 미학적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은 어떤 사조를 설명하기 위한 독단적 이론이라는 게 얼마나 허구적인지 보여준다.

‘end of the Rainbow’展
몽인아트센터│작가 지니 서│05.21~07.19
요즘은 갤러리에서도, 개인 컬렉터에게서도 조각이 인기가 없다고 한다. 다른 것보다 회화에 비해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비록 의도한 건 아니라 해도 벽에 걸린 김병진의 회화적 조각은 그런 약점을 어느 정도 해소한 작품이다. 하지만 현재 몽인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end of the Rainbow’展은 마치 ‘나는 내 길을 가련다’는 듯한 고집이 느껴지는 대형 조각 프로젝트다. 철이란 재료를 이용해 미술관 공간 전체를 휘감는 ‘end of the Rainbow’는 회화적인 거리두기가 아닌, 작가가 창조해낸 공간에 들어가는 경험을 선사한다. 회화가 다양한 경향과 그 경향을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처럼 조각 역시 ‘조각은 이렇다’는 설명으론 설명할 수 없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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