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그 배우는 거기에 있었다. 물론 그 흔한 연극영화과 출신도, 극단 출신도 아니었다. 하이틴 스타로 등장해 서서히 나이 먹어 간 것도, 조연에서 시작해 주연으로 올라온 입지전적 인물도 아니었다. 대학 졸업반 때 우연히 참가한 <박하사탕> 오디션을 통해 그 말간 첫사랑의 얼굴을 드러낸 문소리는 이후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분한 <오아시스>로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다 시집 못간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람난 가족>의 유부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용감한 선택은 문소리라는 배우의 이름을 단 몇 작품 만에 강렬하게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90년 대 말 한국영화가 그 대륙을 확장하고 영토를 개척하던 시절, 문소리는 이창동이라는 콜럼버스가 발견해 낸 비옥한 신대륙이자, 한국영화의 이후 10년을 이끌게 된 희망봉이었다.

그러나 이제 문소리를 떠올리며 “심각하고 독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느덧 그녀는 어린 아들 손을 부여잡고 핸드볼 코트에 서는 억척스러운 아줌마(<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고, “<태왕사신기> 찍다가 배용준 이모라는 소리도 들었다”는 이야기를 오락프로그램에서 농담처럼 꺼낼 수 있는 유연한 엔터테이너다.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첫인사를 건넨 이 여배우는 이제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자신의 그 너른 땅으로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꿨던 것도 아니었고, 여배우에 대한 로망이나 판타지도 없었어요”. 그러나 한편 한편 필모그래피가 쌓이고 연기라는 작업과 배우라는 정체성이 그녀에게서 자리 잡기 시작 할 무렵부터 문소리에게 여배우들의 영화는 “교과서이자 롤 모델”이 되었다. “그저 이목구비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 때문에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결국 아름답게 느껴지는 배우들이 좋아요.” 이자벨 위페르, 지나 롤랜드, 메릴 스트립, 힐러리 스웽크, 줄리안 무어. 그 이름들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는 이 위대한 5명의 여배우들이 스크린 위에 그려낸 ‘여인의 초상’을 따라가는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1. <레이스 짜는 여인> (The Lacemaker, La Dentelliere) 이자벨 위페르
1976년 │ 끌로드 고레타

“대사나 기교가 아니라 호흡과 눈빛만으로도 숨 막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대단한 배우, 단 한 번도 전형적이었던 적도, 동시에 여성성을 놓친 적도 없는 힘 있는 배우가 바로 이자벨 위페르예요.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쨍-하고 깨지는 듯 한 느낌이랄까. 얼마 전 <레이스 짜는 여인>을 보는데 <피아니스트>의 그 배우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동, 서양의 어떤 매력도 안 갖춘 듯한, 심지어 조금 촌스러운 스타일을 한 여자라니. 그런데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정말 그 에너지에 무릎 꿇게 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꽤 어린 나이였을 텐데, 그건 끼로 하는 연기가 아니라 자기 에너지를 다 바쳐야 다다를 수 있는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닷가로 여행을 떠난 순진한 열아홉 아가씨 폼므(이자벨 위페르).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 프랑소와와 동거를 시작하지만, 봄눈 같이 짧은 사랑이 녹은 자리엔 메마른 풍경만이 남는다.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영화는 풋풋한 시절의 이자벨 위페르를 만나는 기묘한 타임머신이다.

2. <오프닝 나이트> (Opening Night) 지나 롤랜드
1977년 │ 존 카사베츠

“여배우라는 운명. 과연 이토록 징글징글한 숙명을 안고 살 수 있을까, 오히려 객석에 남아있는 인생이 우아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만감이 교차한 나머지 울면서 본 영화예요. 하지만 이상하죠? 잔인하지만 저렇게 끝을 향해 달리는 캐릭터를 연기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동시에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여배우 고든을 연기한 지나 롤랜즈는 이 영화의 감독이자 상대역으로 출연한 존 카사베츠의 부인이기도 한데 자기 부인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다니! 장준환 감독은 결이 고운 사람이라서 저한테 이런 연기는 못 시킬 것 같아요. (웃음) <글로리아> <영향력 아래 있는 여자> 등 많은 영화를 통해 이런 쉽지 않는 과정을 통과해 냈을 카사베츠와 롤랜즈의, 부부로서 또 감독과 배우로서의 관계와 믿음이 궁금하고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연극 <세컨드 우먼>의 오프닝 나이트. 첫 공연이 끝난 비 오는 극장 앞으로 팬들이 몰려들고 여배우 고든(지나 롤랜즈)에게 애타게 사랑을 표하던 열여덟 소녀 팬 낸시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이야기로 가져와 오마주를 바쳤다.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에 대한 신경쇠약 직전의 풍경.

3. <맘마미아> (Mamma Mia) 메릴 스트립
2008년 │ 필리다 로이드

“사실 메릴 스트립을 별로 안 좋아했었어요. 너무 훌륭한 배우고,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장인이지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거나 연기를 보며 가슴이 뛰진 않았거든요. 뭐랄까, 교본 같아서 배워야 할 것 같고, 존경해야 할 것 같은 그 느낌이 부담스러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녀의 최근작들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어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도 좋았지만 <맘마미아>에서는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놀 수 있다는 게,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놀랍더라고요.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완벽한 테크니션으로서의 장점을 잃지 않은 가운데 저런 에너지와 흥을 보여 줄 수 있는 배우는 정말 드물잖아요. 요즘엔 심지어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게 까지 되었다니까요. (웃음)”

그리스의 아름다운 작은 섬에서 엄마 도나(메릴 스트립)와 단둘이 살아가던 소피. 결혼식을 앞두고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본 소피는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살아왔던 ‘아빠 후보 3인 방’을 결혼식에 초대한다. 그룹 아바의 히트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맘마미아>. 특히 결혼식장으로 딸을 올려 보낸 후 도나(메릴 스트립)가 부르는 노래 은 이 흥겨운 춤과 노래의 축제에 잠시 벅찬 눈물의 타이밍을 선사한다.

4. <밀리언 달러 베이비> (Million Dollar Baby) 힐러리 스웽크
2004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영화를 처음 볼 당시 어떤 예술영화를 봐도 그냥 그렇구나, 별로 감정변화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감정이 폭발했던 기억이 나요. 힐러리 스웽크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로 오스카 여우주연상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배우라 스스로 그 강렬한 첫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었을 거예요. 나에게 <오아시스>가 굴레였던 것만큼. 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고 있으면 역시 그녀의 힘과 매력은 이런 강한 캐릭터에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요. 대신 그 사이 연기가 더욱 증폭되고 깊어졌더라고요. 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대단했지만 힐러리 스웽크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 했을 영화가 아니었을까요.”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던 백발의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 그의 앞에 어느 날 꿈과 의지 외에는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연습생 매기(힐러리 스웽크)가 나타난다. 그녀에게서 특별한 투지를 발견한 프랭키는 매기를 최고의 복서로 만들지만, 이 ‘백만 불짜리 아가씨’ 앞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제 77회 아카데미의 4개 부분 상을 휩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스터피스.

5. <파 프롬 헤븐> (Far From Heaven) 줄리안 무어
2002년 │ 토드 헤인즈


“줄리안 무어를 보면 불안해요. 그런데 그 불안함이란 게 뭘 몰라서 오는 초초함이 아니라 이미 삶의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오는 위태로움인 거죠. 그런 복합적인 연기를 이 여배우보다 더 잘 표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고. (웃음) <가족의 탄생> 찍기 전에 의상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파 프롬 헤븐> 이야기를 자주 했던 것 같아요. 단추를 목까지 채운 참한 아가씨, 웬만하면 참고 좀처럼 감정적이지 않은 <가족의 탄생>의 미라와 완벽해 보이는 삶을 균열 없이 지키려고 고분 분투하는 이 영화의 캐시와 상당히 닮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파 프롬 헤븐>의 카메라는 얼핏 ‘천국’처럼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모범주부였던 캐시(줄리안 무어)가 남편의 외도를 목도하고, 흑인과의 금지된 사랑에 빠지면서 어떻게 서서히 그 ‘헤븐’으로 부터 멀어져 가는지를 잔인하고 집요하게 뒤따른다. <세이프> <벨벳 골드마인>으로 뉴 퀴어 시네마의 꽃을 피운 이단아 토드 헤인즈가 <천국이 허락하는 모든 것> 등 더글라스 서크가 그려낸 폐쇄적인 1950년대 미국사회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

“저는 나이 들면 좀 더 괜찮아 질 것 같지 않아요?”

남편 장준환감독과 인적 드문 교외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다는 주부 3년 차 문소리에게 최근 드라마 <내 인생의 황금기>를 끝내고 찾아온 이 휴식은 꽤나 달콤한 쉼표다. “그래도 나름 바빠요. (웃음)”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는 4살짜리 동네 꼬마 녀석과 “병원놀이도 하고 책도 스무 권이나 읽어줬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묘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그 ‘엄마놀이’가 머지않은 미래의 예행연습이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올 상반기 개봉을 앞둔 임순례 감독의 <날아라 펭귄>을 제외하면 큰 작품 계획 없이 올해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 열심히 몸을 만들 예정”이라는 문소리는 그렇게 여자로서의 삶과 배우로서의 삶을 공평하고 충실하게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영국 여행 중에 초상화만 모아놓은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피오냐 쇼라는 영국 여배우가 치마 위에 브라만 입고 앉아있는 그림을 봤어요. 사실 욕망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배우이고, 그래서 여배우가 잘 늙기란 어떤 사람들 보다 어려운 일인데, 곱고 편안하게 늙어있는 그 얼굴을 한참을 보고 있는데 이 배우 참 멋지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문소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나이 들면 좀 더 괜찮아 질 것 같지 않아요?” 이 여배우가 어떻게 늙어 갈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 그 기대감에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이런,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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