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성한 데가 없어요. <잠복근무> 이후로 쭉 달고 온 부상들이 요즘은 감당이 안 돼요.” 드라마 <밤이면 밤마다>에서 다친 어깨 때문에 아직도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김선아의 목소리는 그러나, 여전히 활기차다. 김선아는 그녀의 말대로 “몸을 쓰는” 역할들을 많이 해왔다. 고등학교에 위장 잠입한 형사였던 <잠복근무>는 물론이고,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살을 찌우고, 훈장처럼 건강이 악화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 최근작 <걸스카우트>에서도 어머니의 눈물을 쏙 뺄 만큼 처절한 몸싸움을 벌였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역할조차 온몸으로 표현해내고야 마는 김선아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의 몸에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제가 미쳤죠. (웃음) 그런데 몸을 아껴야지 하면서도 또 촬영만 들어가면 저도 모르게 몸을 날리고 있어요.”

그렇게 김선아가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분신들의 성장판도 닫히지 않을 수 있었다. 의 지나도 계속된 연애의 사망을 지켜본 후 자신과 화해했고,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도 진헌을 만나 싸우고 사랑하며 한 뼘 더 자랐다. 더 이상의 2차 성징이 오지 않는 나이임에도 성장하는 여자들. 그녀들이 김선아 안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응원한다. 그녀만큼이나 부딪치고 깨져도 영화에 열기를 불어 넣는 여자들이 숨 쉬는 영화를, 김선아가 말한다.

1. <몬스터> (Monster)
2003년 │ 감독 팻티 젠킨스

“원래는 굉장히 아름다운 금발 미녀인 샤를리즈 테론이 엄청나게 몸을 불리고, 그것도 범죄자로 나오잖아요. 여자 배우가 저 정도 할 수 있는 게 참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지금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배우 이름이 아닌 그냥 에일린의 얼굴이 떠올라요. 거기다 제가 원래 스릴러나 범죄물을 좋아하는데 그런 장르의 느낌도 잘 살렸구요. 샤를리즈 테론이 맡았던 에일린 같은 캐릭터를 저도 해보고 싶어요. 또 살을 찌우겠단 얘기는 아니구요. (웃음)”

실제 미국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생계를 위해 13세부터 거리의 여자가 된 에일린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생활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자살을 결심한 순간 불현듯 찾아온 사랑이 그녀를 붙잡고, 늘 그렇듯 사랑은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 셸비(크리스티나 리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에일린과 한때 사랑했으나 더 이상 그녀와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셸비의 이야기. 에일린을 괴물로 만든 것은 사랑일까, 세상일까.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으로 기록되기도 한 에일린 우르노스는 12년 동안 복역하다 2002년 사형되었다. 미녀배우로만 인식되었던 샤를리즈 테론에게 제7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

2. <글루미 선데이> (Ein Lied Von Liebe Und Tod)
1999년 │ 감독 롤프 슈벨

“저는 이 영화를 자동차 극장에서 봤어요. 우연히 비오는 날 봤는데 어찌나 우울하던지… 영화를 보고 난 뒤 일주일 내내 우울함의 늪에 빠져있었어요. 사실 그 때는 이 남자, 저 남자 왔다 갔다 하는 여주인공이 이해가 안 됐는데, 한두 살 먹다보니 그 감정을 알 것 같아요. 세 사람의 사랑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긴 한데 그 상황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고. 여배우라면 누구나 모두에게 사랑받는 일로나 같은 배역을 탐내지 않을까요? 저도 여배운데 그런 욕심이 없을 리가 없겠죠? (웃음)”

자보 레스토랑에는 다른 남자와 공유해서라도 가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일로나(에리카 마로잔)와 그녀의 두 남자가 있다. 비교적 평화롭게 사랑하던 세 사람은 전쟁이란 파고 속에서 모든 걸 잃게 되고, 먼 훗날 혼자 남겨진 일로나는 조용히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 발표 당시 청취자들의 자살이 잇달았던 곡 ‘Gloomy Sunday’의 정서가 상영시간 내내 영화를 지배한다. 언제 들어도 영화의 장면,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OST가 독보적이다.

3.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년 │ 감독 리들리 스콧

“제가 마흔 다섯이나 쉰 살이 되면 해보고 싶은 영화예요. 지금은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를 찍기엔 이른 것 같고, 나이가 들어서 연륜이 쌓이면 꼭 해보고 싶어요. 어른들의 일상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고, 분명 어른들도 일상에서 일탈하고픈 욕구가 있을 텐데 우리나라는 그런 걸 많이 표현 못 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 나이가 되면 그런 얘기들을 하고 싶어요.”

반복되는 일상에서 누구의 아내나 아줌마로 살아가는 여자들이 세상을 향해 날리는 마지막 하이킥. 남편의 간섭이 지겨운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사는 게 지루한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잔 서랜든)는 그저 잠깐의 휴가를 즐기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시작한 그녀들의 여정은 어느새 범죄자들의 도피 행각이 되어버리고, 결국 둘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너무도 즐거워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로 기억되는 극단적인 결말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는다. 섹시 아이콘 브래드 피트의 풋풋한 모습과 찰진 엉덩이는 이 영화의 보너스.

4. <더티 댄싱> (Dirty Dancing)
1987년 │ 감독 에밀 아돌리노

“<더티 댄싱>을 보고나선 춤추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 얼마 전에 춤추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 더 확인했어요. 비와 함께 했던 무대가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가수들이 왜 그렇게 무대를 사랑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땀 흘리며 관객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관객들의 반응들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건 두렵기도 하지만 영화와 다른 의미로 매력적이었어요. 거기다 춤을 그렇게 추고 나니까 속이 다 후련하던걸요. 아마 이 영화의 프란시스가 더티 댄싱을 추면서 느꼈던 해방감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영화를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긴다면 핑크 드레스를 입은 프란시스(제니퍼 그레이)를 들어 올리는 자니(패트릭 스웨이지)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얌전한 부잣집 아가씨 프란시스는 여름 별장에서 우연히 접한 더티 댄싱에 매료 된다. 한 번도 춰본 적 없는 열정적인 몸짓은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댄스 강사 자니는 그녀의 마음을 춤추게 한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티격태격 귀여운 연애가 지금 보면 전혀 더티하지 않은 춤들과 함께 펼쳐진다.

5.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
1965년 │ 감독 로버트 와이즈

“아주 어렸을 적에 봤던 영화인데 생각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져요. 등장했던 음악들이며 풍경이 아직도 생생해요. 마리아라는 캐릭터가 당시로는 굉장히 진취적이고 강한 여자인데도, 영화는 따뜻하잖아요. 음악이 그런 면에서 크게 한 몫 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저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봐도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견습 수녀인 마리아(줄리 앤드류스)는 원장 수녀의 배려로 트랩 대령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마음의 문이 닫혔던 아이들은 서서히 사랑 넘치는 마리아에게 의지하게 되고, 딱딱하기만 하던 저택엔 온기와 노랫소리가 감돈다. 가족영화이자 음악영화의 영원한 고전으로 ‘좋은 건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라는 명제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는 없는 작품.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부르는 ‘Do-Re-Mi’나 사랑에 빠진 큰 딸이 부르는 ‘Sixteen Going On Seventeen’ 등 잊을 수 없는 오리지널 넘버들이 퍽퍽한 가슴에 물기를 돌게 한다.

“조금 더 여배우들이 설 수 있는 장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김선아는 드라마 <온에어>의 김은숙 작가, 신우철 감독과 신작 <시티홀>을 준비하고 있다. 4월 방송 예정인 이 드라마에서 김선아는 시청의 말단 공무원에서 시장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입지전적인 인물을 맡았지만, 아직도 욕심이 많다. “조금 더 여자배우가 설 수 있는 장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로맨틱 코미디가 뜨면 그것만, 삼순이 캐릭터 뜨면 그런 캐릭터만 우려먹는 게 아니라 새로운 여자 캐릭터도 발굴하구요.” 자신이 연습 삼아 기획해본 영화들이 스릴러, 코미디, 휴먼 드라마까지 10여 편이 넘는다는 사실을 수줍게 밝히지만 배우로서 할 말은 당차다. 침체된 한국 영화에 대한 걱정과 관객에 대한 당부도 빼놓지 않는 그녀의 말은 그저 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김선아라면 분명 자기 몸에 멍 자국을 만들더라도 자신이 임한 작품에는 흠집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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