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배우 송강호의 뇌 구조를 그린다면 대부분은 ‘영화’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 남자는 그러니까 영화를 찍고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빼면 도통 별다른 취미도 특기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라는 장르에 매혹된 타자로서의 영화광이라기보다는, 스크린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걸 멈추지 못하는 주체로서의 영화광이다.

하여 영화감상에 있어서는 이 영화 저 영화 닥치는 대로 찾아보는 잡식성 대식가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취향과 장르를 고집하는 까다로운 미식가도 아니다. 본인 영화의 시사회를 제외하고는 극장출입도 잘 안 한다. 이런 그에게 하나의 테마를 중심으로 다섯 편이 넘는 영화를 고르라고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주문이었다. 결국 오랜 고심 끝에 선택한 테마는 ‘고정관념을 깬 뱀파이어 영화’다. 2008년 가을 촬영을 마치고 올해 봄 관객들에게 선보일 차기 작이 뱀파이어가 된 신부로 등장하는 <박쥐>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뱀파이어 영화 같지 않은 뱀파이어 영화, <박쥐>는 그 어느 작품보다 대중적인 작품이 될 것 같아요. 박찬욱 감독 특유의 독창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머도 상당하단 말이죠” 라는 확신에 찬 자랑에 “어릴 때 제목도 화가 이름도 모른 채 달리의 <시간의 영속성>이란 작품을 봤을 때의 충격 같은 걸 받았다”라는 고백을 듣고 있자니 어서 당장 그 영화 속으로 횃불을 들고 걸어 들어가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박쥐>가 동굴에서 나오기 까지는 아직 4개월이나 남았다. 그 기다림에 타는 ‘목마름’을 즐기기 위해선 아래의 각양각색의 뱀파이어들에게 잠시 당신의 흰 목덜미를 내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아니 기대 이상 짜릿한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1. <렛 미 인>(Let the right one in)
2007년 │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박쥐> 촬영 중에 여러 사람이 추천을 해서 보기 전부터 기대감이 컸던 영화예요.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해서 순하기만 한 영화는 아니더라고요. 참 이상한 것이 영화를 보면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다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붉은 피 색보다는 창백할 만큼 하얀 흰 눈의 이미지만 기억에 남아요. 뱀파이어 영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모든 선입견을 다 깨버리는 영화라는 면에서는 <박쥐>와 닮은 부분이 있죠.”

<렛 미 인>은 한국극장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스웨덴 영화다. 누군가에는 뱀파이어가 나오는 공포영화로, 어떤 이에게는 세상의 이면을 비추는 사회성 짙은 영화로, 혹자에게 외톨이 소년 오스칼과 그의 옆집으로 이사 온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가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순설 같은 사랑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2. <이마 베프>(Irma Vep)
1996년 │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뱀파이어 영화를 찍고 있는 현장을 둘러싼, ‘영화에 대한 영화’예요. 사실 영화 현장이라는 것이 뱀파이어의 세계보다 훨씬 냉혹하고 잔인한 순간이 있거든요. 서로가 서로에게 베스트를 뽑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면 갈등도 많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장만옥은 괴상한 스텝들에 치이면서도, 감독의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선택들을 묵묵히 따르고 끝까지 지지 한단 말이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그 영화의 아름다움에서 때론 무조건적인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확인 할 수 있어요.”

한물간 프랑스 중견 감독 르네 비달은 <동방삼협>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홍콩배우 장만옥을 캐스팅해 뱀파이어영화를 리메이크하려 한다. 그러나 열악한 작업환경과 적응하기 힘든 프랑스 스텝들 속에 이 홍콩 여배우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주물에 부어 만든 듯 온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라텍스 의상을 입고 파리의 지붕 위를 달리는 장만옥의 고혹적인 자태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

3. <미녀 드라큐라>(Innocent blood)
1992년 │ 감독 존 랜디스

“착한 사람들은 안 건드리고 마피아 같은 나쁜 놈들만 골라서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라니, 말하자면 의적 같은, 사회성 있고 진화한 뱀파이어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이런 장르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잔혹한 장면이나 엽기적인 설정도 공포스럽기보다는 어찌나 코믹한지. 조잡한 느낌을 주는 국내 비디오 제목만큼이나 특수 분장이나 미술도 하나 심각할 것 없는데 이 썰렁하고 이상한 유머감각에 종종 무릎을 치게 되더라고요. 공포와 코미디가 적절하게 섞여서 무서운 걸 싫어하는 사람도 부담 없이 꺼내 볼 수 있는 대중영화예요.”

80년대 대표 코미디 영화인 <브루스 브라더스>와 마이클 잭슨 뮤직비디오 중 최고작으로 뽑히는 ‘스릴러’의 연출로 유명한 존 랜디스 감독의 B급 코믹 호러. <니키타>의 안나 빠릴로드가 ‘미녀 뱀파이어’로 등장하는 영화로 원제인 ‘무고한 피’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4. <뱀파이어>(Life force)
1985년 │ 감독 토브 후퍼

“한국 출시 제목이 <뱀파이어>로 되어 있지만 사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공포영화는 아니에요. 인간을 닮은 생명체가 서로의 에너지를 빼먹는다는 행위가 가지는 상당히 성적인 코드가 있는데 그 부분을 극대화 시킨 영화랄까. B급 유머도 상당하고 80년대 당시로서의 상상력이나 특수효과도 흥미롭죠.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영화 내내 거의 탈의한 상태로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남자라면 저런 여자라면 기꺼이 죽어도 좋지 (웃음)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헬리 혜성 탐사팀이 우연히 발견한 외계 생명체의 시체가 인간의 정기를 빨아먹고 환생해 지구인을 습격한다. 1980년대 만연한 우주에 대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

5.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
1994년 │ 감독 닐 조단

“뱀파이어를 둘러싼 사건에 기대서 공포감을 조성한다기 보다는, 뱀파이어로 산다는 것에 대한 무게나 고통을 담고 있어요. 뱀파이어의 비극이지만, 역으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어 준 달까. 브래드 피트와 톰 크루즈, 두 배우의 화학작용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고 그 남자들이 단순히 잘생긴 배우일 뿐 아니라, 정말 좋은 배우라는 것을 알게 해 주죠. 세상, 참 불공평하죠? (웃음)”

라디오 방송작가(크리스찬 슬레이터)와 20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온 뱀파이어 루이(브래드 피트)의 인터뷰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 영속성 때문에 “아름답고 신비한” 이미지까지 만들어져 버린 뱀파이어들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생존기다. 어느덧 할리우드의 아름다운 영양으로 자라난 커스틴 던스트의 앳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 <박쥐>가 4월 말 개봉하고 나면 또 새로운 영화작업에 들어갈 거라는 송강호는 쉼표가 생략된 배우다. 출세작이 된 <넘버 3>의 말더듬이 조폭 두목부터 <살인의 추억> <괴물> <우아한 세계>를 거쳐 2008년 최대의 흥행작 <놈놈놈>의 ‘이상한 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지만 그는 도통 지칠 줄을 모른다. 어쩌면 남 몰래 뱀파이어와 악수를 나누고 배우로서의 영생을 보장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쩌라. 이미 우리는 송강호라는 이름을 가진 마성의 뱀파이어를 떠날 수 없는 피의 추종자가 되어버린 것을. 아찔하다. 그래서 행복하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