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박기영 : 사실 2012년부터 뮤지컬의 음악감독 활동을 했어요. 몇 작품을 했기 때문에 처음 ‘그 여름, 동물원’의 제안을 받았을 땐 우선 우리의 음악으로 이뤄지는 극이니 더 수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엔 일반적인 뮤지컬의 음악감독의 역할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죠. 우리 이야기이긴 하지만 작가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고, 실제 ‘나’는 아니니 객관화시켜 접근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정하는데 어렵진 않았어요.
10.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예상과 다른 점이 있었나요.
박기영 : 작가와 인터뷰를 하면서 대본 작업에 참여를 했어요. 우리들의 실제 이야기에 최대한 가깝게 가기 위해 그런 과정을 오래 거쳤죠. 이후 본격적으로 배우들이 연습에 들어갔는데, 실제 눈앞에서 움직이는 걸 보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이 소환되더라고요.(웃음)
10. 준비되지 않은 소환이었네요.
박기영 :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어요.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졌을 텐데 예상하지 못한 강도로 다가와서, 처음에는 떠올리기 불편한 기억도 있고 그런 것들이 섞이기 시작했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경험, 동물원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이라든지 또 잠시 묻어둔 상처, 이런 모든 것들이 연습 과정을 보면서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대면하기 힘들었죠. 그 불편한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장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됐어요. 과거 저의 기억과 화해하는, 저에게 연습은 화해의 과정이었죠.
10. 공연을 보면서 ‘동물원은 마치 일기장을 펼쳐보는 것 같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그랬군요.
박기영 : 맞아요. 더군다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나가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과거 자료를 토대로 대본을 구성했더라고요. ‘저런 생각을 했었구나’ 싶었죠. 또 어떤 건 애써 외면했다고 해야 할까요, 시간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들도 있죠.
10. 시작은 쉬웠지만, 과정이 쉽진 않았네요.
박기영 : 살면서 단편적으로 그런 순간들이 불쑥 솟아날 때는 있겠지만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에게 여름날이었던 그 시절이 고스란히 작품이 된 거니까요.
10. 작품화되고,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눴나요.
박기영 : 딱히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어요.(웃음) 모든 멤버들이 공연을 보러 왔는데, 눈물을 글썽인 이도 있고 또 밝고 환한 반응을 보인 이도 있어요.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느껴지는 무언가는 다 같았을 겁니다.
10. 하길 잘했다, 싶기도 하겠어요.
박기영 : 정말요. 작가의 펜에서 처음 시작된 프로젝트인데, 제게 좋은 선물이 됐어요.
10. 어떤 장면이 가장 애착이 가나요?
박기영 : 데모 테이프를 만드는 장면인데, 동물원의 출발점이죠. 대학교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 때, 그간 만들어둔 노래를 테이프 두 개 분량으로 녹음을 했어요. 그게 돌고 돌아 김창완 선배 손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동물원이 됐죠.(웃음)
10. 이번 작품을 위해 새롭게 쓴 곡이 있어요. 다른 곡 작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것 같습니다.
박기영 : 다른 노래와 톤, 분위기가 다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튀게 들리면 안 된다고 말이죠. 전체적인 음악의 흐름에 다른 노래와 어우러지게끔 만들었죠. 제가 쓰는 거니까 동물원 풍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겠지만(웃음) 사실 우리 음악은 사랑을 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담긴 곡은 거의 없어요. 우리 중엔 화려한 사랑을 하는 친구들이 없었어요.(웃음) 다들, 음…지질한 경험 끝에 가사가 나왔기 때문에 하하. 그래서 사랑하는 순간에 초점을 맞춰 곡을 썼죠.
10.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박기영 : 어렸을 때 피아노를 치고 이런 건 다들 비슷할 거예요. 대학교를 들어갔는데, 우리 때는 대학가요를 하는 써클이 가장 힘이 컸어요. 지금은 대학문화라는 게 딱히 구별돼 있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대중문화와 대학문화는 달랐거든요. 악기를 다루다 보니까 음악, 연주를 하는 걸 좋아했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동기였던 안치환의 제안으로 노래 써클에 갔어요. 2, 3학년 때는 학교 앞에서 공연도 했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했습니다.
10.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겠죠. 음악을 취미로 할지, 아니면 업으로 삼아야 할지를요. 극에 등장하지만, 동물원 역시 그 부분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박기영 : 처음 동물원은 7명으로 시작했어요. 되돌아보면, 김광석 형은 평생 음악을 할 사람처럼 보였어요. 노래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은 나중 삶의 모습이 어떨까를 떠올렸을 때, 광석 형처럼 삶의 중심에 노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을 거예요. 저는 경계인, 혹은 주변인이란 표현을 하는데요. 당시 우린 음악계에선 좀 색다른 아이들로 여겨졌고, 또 직장에 가면 음악을 하는 아이들로 보였어요. 주변이 그런 식으로 인식했죠. 물론 자초한 부분이기도 하지만요. 동물원을 시작하고 이후로도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공통적인 정서가 됐던 것 같아요. 1988년 1월, 정신없이 공연을 했는데 방송은 많이 못했어요. 우리끼리 스케줄 맞추는 게 힘들기도 했고요. 1989년 6월, 동숭아트센터에서의 공연이 원년 멤버 7인의 마지막 공연이었어요. 다들 각자의 삶, 상황이 달라지니까 당황스러웠죠. 공연을 하면서도 ‘앞으로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고요. 각자의 삶, 원래 계획했던 진로, 이런 것들이 계속 부딪히다 보니까 결국 결정을 해야 하는 단계가 왔고, 첨예하게 된 것 같아요.
10. 그런 지점들이 마주하기 힘든 부분이었겠네요.
박기영 : 음악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아예 연을 끊는다는 걸 생각하진 않았어요. 광석이 형은 음악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고, 형이 감당하기엔 동물원의 행보가 한가해 보였던 거죠.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뒀고, 개인의 사정, 입장, 현실적인 상황 등 일상적인 충돌이 이어졌어요. 다들 성격이 막 강한 편이 아니라, 세게 부딪힌 건 아니지만 그런 대화들이 2년간 계속됐어요.
10. 지금 돌이켜보면,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하는 생각도 들겠어요. 하지 않은 선택에 대한 후회는 반드시 남으니까요.
박기영 : 나이가 들고 경험을 많이 했다면, 파국으로 간다든지 감정적인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좀 더 현명하게 풀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하죠.
10. 대중의 입장에선 ‘더 좋은 곡이 많이 나왔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박기영 : 1990년에 광석 형이 솔로로 나서고, 1993년 봄까지 동물원은 5집을 냈어요. 그리고 이후 거의 3년을 쉬었죠. 누구는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고요. 다들 상황이 맞지 않아 2년 반, 3년을 쉬었는데 그때 광석 형은 1993년께부터 쭉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1995년 10월, 동물원이 ‘널 사랑하겠어’를 발표했고, 당시 광석이 형은 1000회 공연을 했을 거예요. 광석 형의 인기는 절정이었고, 운 좋게 우리 음반도 잘 됐죠. 이제 좀 같이 할 수 있겠네, 분위기 좋은 이야기도 오가던 차였는데 1996년 1월, 그렇게 된 거죠. 아쉬움이 크죠.
10. 주로 동물원의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박기영 : 표현이 좀…색다른 면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개인적인 경험,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경험이 노래가 되는 식이었죠.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10. 여름날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가장 뜨거웠을 때였겠죠.
박기영 : 노래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물론 쥐어짜면 나오겠지만 그러면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의미 있는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흘러넘치는 순간들이 오는데 우리는 그게 노래가 됐던 것 같아요.
10.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마련인데 지금 들으니 새삼 더 와 닿는 곡이나 가사가 있나요?
박기영 : 예를 들어 ‘잊혀지는 것’이라고 하면, 그때도 물론 노랫말이나 표현들이 와 닿긴 했지만 지금보단 폭이 좁았고 색깔이 다른 것 같아요. 지금 똑같은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곡에 몰입할 수 있고, 그려지는 장면과 이미지가 다르죠.
10. 좋은 곡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빛을 발해요. 동물원의 곡들도 현재 많은 젊은이들에게 회자되고 불리는데, 음악인으로서의 책임감도 느껴질 것 같아요.
박기영 : 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 노래가 만들어져도 그게 듣는 이들에게 전달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의 노래가 되는 것 같아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수용되기도 하고요. 저의 손을 떠나면, 그 후에는 들으시는 분들의 각자의 것이 되는 게 아닐까요. 노래라는 것이 대중예술이긴 하지만, 예술이니까 현실에서는 상상만 하는 일들, 좀처럼 존재하지 힘든 상황도 예술은 언급할 수 있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긴 하죠. 책임감과는 반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웃음)
10.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분명 있으니까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도요.
박기영 :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하는 이야기예요. 사회학과 학생들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한 뒤에 써먹는다면, (음악을 하는) 우리는, 네가 스물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요. 졸업 후에 열심히 하겠다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지금 써야 한다’고 하죠. 스물한 살엔 스무 살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예술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최소한의 음악적 수단만 있으면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거죠.
10. 완성도를 높여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학생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요. 투박하고 서툰 1집이 창피하고 쑥스러울 수 있어도, 또 그것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테죠.
박기영 : 1집에 대한 민망함이 우리만큼 큰 가수들도 없을 겁니다.(웃음) 기본적으로 연주력이 떨어지는 데다, 당시 녹음실이 음악을 전문적으로 녹음하던 곳이 아니어서 에코 시설이 완비되지 않았어요. 사실 그땐 에코가 강조되던 시절인데, 우리 1집엔 전혀 없었죠. 처음에 우리 음악을 들으면 ‘사운드가 이상하지?’란 반응을 보이고, 이후 ‘특이하다’ ‘신선하다’는 평으로 이어졌어요. 거친 느낌인데, 따뜻하고 인위적이지 않으니까 더 듣고 싶어지지 않았나 생각해요. 아마 당시 음악과 다르니까, 새로운 느낌이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몰랐는데 (김)창완이 형은 알았던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다시 녹음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해도 ‘됐어, 다시 할 필요 없어’라고 했어요. 창완이 형이 생각한 방향과 기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이해되는 면이 분명 있고요.
10. 지금 설명하신 것들 모두, 동물원이 사랑받은 이유이기도 하네요.
박기영 : 더군다나 학생을 가르치는데 우리 1, 2집의 상태가 그렇다는 게 부끄러웠죠.(웃음)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게 과연 정밀하고 세련된 음악이었을까.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말이죠. 다들 소심해서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마음을 내뱉지 못하고 노래 속에 담아둔 건데. 그 이야기가 잘 들리면 되는 거잖아요. 뒤늦게 알게 됐죠.
10.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겠군요.
박기영 : 음악을 위한 음악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음악을 잘 해야 하고, 기능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야 된다고. 잘 정돈되고, 좋은 연주에 음정 박자, 리듬도 잘 맞아야 된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음악을 하는 이유도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음악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는, 우린 이야기꾼인 거죠. 보잘것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들어줄 수 있는 이들이 있어서 고마운 거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릇이 되는 것 같아요, 음악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고, 교감을 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그릇 말이죠.
10. 앞으로의 음악 활동도 기대됩니다.
박기영 : 동물원은 2003년에 9집을 내고 신곡이 나오지 않았어요. 이번엔 녹음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 여름, 동물원’의 OST를 녹음하는데 우리가 써놓은 곡이 있으니까, 즉흥적으로 해보자고 해서 3곡을 녹음했어요. 그게 12월께 나올 거예요.
동물원이 내후년 1월이면 음반을 내놓은지 30주년이 됩니다. 물론 2, 30주년이란 것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황 자체가 창기 형이 음악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도 꽤 됐고, 이 작품을 보면서 현재 우리의 상황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외부에 보이는 이벤트라기 보다, 우리 친구들한테 의미 있는 그런 서른 살은 어떤 걸까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여름, 동물원’이란 작품이 많은 동기부여를 줬죠.
10. 끝으로, 박기영 그리고 동물원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요?
박기영 : 우리 노래와 가사가 신선했던 건 그런 거 같아요. 사실 노래엔 되게 시적이고 아름다운 가사가 많지만, 적나라한 나의 느낌은 아니잖아요. 극화된 사랑, 아름답지만 내 이야기 같지 않은 노래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소소한 감정, 서글픈 상념,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이야기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게 우리 팀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의미가 있었고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 다른 세대들이 우리 음악을 만나서 ‘내 이야기 같은데? 어쩜 내 마음을…’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웃음)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어떻게 내가 아는 네가 음반 몇 장으로 설명될 수가 있겠니?”10. 동물원의 이야기를 담아낸 ‘그 여름, 동물원’이란 작품의 음악감독을 맡았어요. 쉽게 결정하지 못 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에서 동물원의 멤버 김창기가 고(故) 김광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누구보다 애틋한 친구가 단 음반 몇 장으로 남는다는 것이 안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20년이 흘러도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음색, 독보적인 분위기로 추억된다는 건, 게다가 명반으로 평가받기까지 한다면 가수에게 그 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
1988년 1월, ‘거리에서’로 세상에 나온 그룹 동물원. 원년 멤버는 일곱이다. 각기 다른 삶을 꿈꾸던 청년들이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뭉쳤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좋은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이름을 건 음반을 냈고, 공연을 수도 없이 하며 대중과 교감하고 소통했다. ‘잊혀지는 것’ ‘변해가네’ ‘흐린 가을에 편지를 써’ ‘혜화동’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등 주옥같은 노래는 모두 그때 완성됐다. 투박한 데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1집으로 온갖 좋은 평가는 다 들었던 동물원. 그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 올랐고, 음악감독으로 동물원의 멤버 박기영이 나섰다.
뮤지컬의 음악감독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흔쾌히 결정했지만, 연습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옛 기억의 잔상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과정을 통해 과거와 화해했고, 위로도 받았다. 그는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 역시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예감했다.
2018년이 되면, 동물원이 첫 음반을 발표한지 30주년이 된다. 과거의 ‘나’와 화해한 박기영, 그리고 동물원은 좀 더 의미 있는 서른을 맞이하기 위해 고민 중이다.
박기영 : 사실 2012년부터 뮤지컬의 음악감독 활동을 했어요. 몇 작품을 했기 때문에 처음 ‘그 여름, 동물원’의 제안을 받았을 땐 우선 우리의 음악으로 이뤄지는 극이니 더 수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엔 일반적인 뮤지컬의 음악감독의 역할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죠. 우리 이야기이긴 하지만 작가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고, 실제 ‘나’는 아니니 객관화시켜 접근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정하는데 어렵진 않았어요.
10.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예상과 다른 점이 있었나요.
박기영 : 작가와 인터뷰를 하면서 대본 작업에 참여를 했어요. 우리들의 실제 이야기에 최대한 가깝게 가기 위해 그런 과정을 오래 거쳤죠. 이후 본격적으로 배우들이 연습에 들어갔는데, 실제 눈앞에서 움직이는 걸 보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이 소환되더라고요.(웃음)
10. 준비되지 않은 소환이었네요.
박기영 :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어요.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졌을 텐데 예상하지 못한 강도로 다가와서, 처음에는 떠올리기 불편한 기억도 있고 그런 것들이 섞이기 시작했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경험, 동물원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이라든지 또 잠시 묻어둔 상처, 이런 모든 것들이 연습 과정을 보면서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대면하기 힘들었죠. 그 불편한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장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됐어요. 과거 저의 기억과 화해하는, 저에게 연습은 화해의 과정이었죠.
10. 공연을 보면서 ‘동물원은 마치 일기장을 펼쳐보는 것 같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그랬군요.
박기영 : 맞아요. 더군다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나가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과거 자료를 토대로 대본을 구성했더라고요. ‘저런 생각을 했었구나’ 싶었죠. 또 어떤 건 애써 외면했다고 해야 할까요, 시간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것들도 있죠.
10. 시작은 쉬웠지만, 과정이 쉽진 않았네요.
박기영 : 살면서 단편적으로 그런 순간들이 불쑥 솟아날 때는 있겠지만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에게 여름날이었던 그 시절이 고스란히 작품이 된 거니까요.
10. 작품화되고,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눴나요.
박기영 : 딱히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어요.(웃음) 모든 멤버들이 공연을 보러 왔는데, 눈물을 글썽인 이도 있고 또 밝고 환한 반응을 보인 이도 있어요.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느껴지는 무언가는 다 같았을 겁니다.
10. 하길 잘했다, 싶기도 하겠어요.
박기영 : 정말요. 작가의 펜에서 처음 시작된 프로젝트인데, 제게 좋은 선물이 됐어요.
10. 어떤 장면이 가장 애착이 가나요?
박기영 : 데모 테이프를 만드는 장면인데, 동물원의 출발점이죠. 대학교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 때, 그간 만들어둔 노래를 테이프 두 개 분량으로 녹음을 했어요. 그게 돌고 돌아 김창완 선배 손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동물원이 됐죠.(웃음)
10. 이번 작품을 위해 새롭게 쓴 곡이 있어요. 다른 곡 작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것 같습니다.
박기영 : 다른 노래와 톤, 분위기가 다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튀게 들리면 안 된다고 말이죠. 전체적인 음악의 흐름에 다른 노래와 어우러지게끔 만들었죠. 제가 쓰는 거니까 동물원 풍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겠지만(웃음) 사실 우리 음악은 사랑을 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담긴 곡은 거의 없어요. 우리 중엔 화려한 사랑을 하는 친구들이 없었어요.(웃음) 다들, 음…지질한 경험 끝에 가사가 나왔기 때문에 하하. 그래서 사랑하는 순간에 초점을 맞춰 곡을 썼죠.
10.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박기영 : 어렸을 때 피아노를 치고 이런 건 다들 비슷할 거예요. 대학교를 들어갔는데, 우리 때는 대학가요를 하는 써클이 가장 힘이 컸어요. 지금은 대학문화라는 게 딱히 구별돼 있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대중문화와 대학문화는 달랐거든요. 악기를 다루다 보니까 음악, 연주를 하는 걸 좋아했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동기였던 안치환의 제안으로 노래 써클에 갔어요. 2, 3학년 때는 학교 앞에서 공연도 했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했습니다.
10.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겠죠. 음악을 취미로 할지, 아니면 업으로 삼아야 할지를요. 극에 등장하지만, 동물원 역시 그 부분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박기영 : 처음 동물원은 7명으로 시작했어요. 되돌아보면, 김광석 형은 평생 음악을 할 사람처럼 보였어요. 노래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은 나중 삶의 모습이 어떨까를 떠올렸을 때, 광석 형처럼 삶의 중심에 노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을 거예요. 저는 경계인, 혹은 주변인이란 표현을 하는데요. 당시 우린 음악계에선 좀 색다른 아이들로 여겨졌고, 또 직장에 가면 음악을 하는 아이들로 보였어요. 주변이 그런 식으로 인식했죠. 물론 자초한 부분이기도 하지만요. 동물원을 시작하고 이후로도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공통적인 정서가 됐던 것 같아요. 1988년 1월, 정신없이 공연을 했는데 방송은 많이 못했어요. 우리끼리 스케줄 맞추는 게 힘들기도 했고요. 1989년 6월, 동숭아트센터에서의 공연이 원년 멤버 7인의 마지막 공연이었어요. 다들 각자의 삶, 상황이 달라지니까 당황스러웠죠. 공연을 하면서도 ‘앞으로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고요. 각자의 삶, 원래 계획했던 진로, 이런 것들이 계속 부딪히다 보니까 결국 결정을 해야 하는 단계가 왔고, 첨예하게 된 것 같아요.
10. 그런 지점들이 마주하기 힘든 부분이었겠네요.
박기영 : 음악을 계속하는 것에 대한, 아예 연을 끊는다는 걸 생각하진 않았어요. 광석이 형은 음악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고, 형이 감당하기엔 동물원의 행보가 한가해 보였던 거죠.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뒀고, 개인의 사정, 입장, 현실적인 상황 등 일상적인 충돌이 이어졌어요. 다들 성격이 막 강한 편이 아니라, 세게 부딪힌 건 아니지만 그런 대화들이 2년간 계속됐어요.
10. 지금 돌이켜보면,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하는 생각도 들겠어요. 하지 않은 선택에 대한 후회는 반드시 남으니까요.
박기영 : 나이가 들고 경험을 많이 했다면, 파국으로 간다든지 감정적인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좀 더 현명하게 풀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하죠.
10. 대중의 입장에선 ‘더 좋은 곡이 많이 나왔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박기영 : 1990년에 광석 형이 솔로로 나서고, 1993년 봄까지 동물원은 5집을 냈어요. 그리고 이후 거의 3년을 쉬었죠. 누구는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고요. 다들 상황이 맞지 않아 2년 반, 3년을 쉬었는데 그때 광석 형은 1993년께부터 쭉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1995년 10월, 동물원이 ‘널 사랑하겠어’를 발표했고, 당시 광석이 형은 1000회 공연을 했을 거예요. 광석 형의 인기는 절정이었고, 운 좋게 우리 음반도 잘 됐죠. 이제 좀 같이 할 수 있겠네, 분위기 좋은 이야기도 오가던 차였는데 1996년 1월, 그렇게 된 거죠. 아쉬움이 크죠.
10. 주로 동물원의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박기영 : 표현이 좀…색다른 면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개인적인 경험,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경험이 노래가 되는 식이었죠.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10. 여름날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가장 뜨거웠을 때였겠죠.
박기영 : 노래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물론 쥐어짜면 나오겠지만 그러면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의미 있는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흘러넘치는 순간들이 오는데 우리는 그게 노래가 됐던 것 같아요.
10.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마련인데 지금 들으니 새삼 더 와 닿는 곡이나 가사가 있나요?
박기영 : 예를 들어 ‘잊혀지는 것’이라고 하면, 그때도 물론 노랫말이나 표현들이 와 닿긴 했지만 지금보단 폭이 좁았고 색깔이 다른 것 같아요. 지금 똑같은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곡에 몰입할 수 있고, 그려지는 장면과 이미지가 다르죠.
10. 좋은 곡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빛을 발해요. 동물원의 곡들도 현재 많은 젊은이들에게 회자되고 불리는데, 음악인으로서의 책임감도 느껴질 것 같아요.
박기영 : 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 노래가 만들어져도 그게 듣는 이들에게 전달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의 노래가 되는 것 같아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수용되기도 하고요. 저의 손을 떠나면, 그 후에는 들으시는 분들의 각자의 것이 되는 게 아닐까요. 노래라는 것이 대중예술이긴 하지만, 예술이니까 현실에서는 상상만 하는 일들, 좀처럼 존재하지 힘든 상황도 예술은 언급할 수 있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긴 하죠. 책임감과는 반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웃음)
10.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분명 있으니까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도요.
박기영 :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하는 이야기예요. 사회학과 학생들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한 뒤에 써먹는다면, (음악을 하는) 우리는, 네가 스물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요. 졸업 후에 열심히 하겠다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지금 써야 한다’고 하죠. 스물한 살엔 스무 살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예술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최소한의 음악적 수단만 있으면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거죠.
10. 완성도를 높여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학생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요. 투박하고 서툰 1집이 창피하고 쑥스러울 수 있어도, 또 그것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테죠.
박기영 : 1집에 대한 민망함이 우리만큼 큰 가수들도 없을 겁니다.(웃음) 기본적으로 연주력이 떨어지는 데다, 당시 녹음실이 음악을 전문적으로 녹음하던 곳이 아니어서 에코 시설이 완비되지 않았어요. 사실 그땐 에코가 강조되던 시절인데, 우리 1집엔 전혀 없었죠. 처음에 우리 음악을 들으면 ‘사운드가 이상하지?’란 반응을 보이고, 이후 ‘특이하다’ ‘신선하다’는 평으로 이어졌어요. 거친 느낌인데, 따뜻하고 인위적이지 않으니까 더 듣고 싶어지지 않았나 생각해요. 아마 당시 음악과 다르니까, 새로운 느낌이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몰랐는데 (김)창완이 형은 알았던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다시 녹음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해도 ‘됐어, 다시 할 필요 없어’라고 했어요. 창완이 형이 생각한 방향과 기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이해되는 면이 분명 있고요.
10. 지금 설명하신 것들 모두, 동물원이 사랑받은 이유이기도 하네요.
박기영 : 더군다나 학생을 가르치는데 우리 1, 2집의 상태가 그렇다는 게 부끄러웠죠.(웃음)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게 과연 정밀하고 세련된 음악이었을까.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말이죠. 다들 소심해서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마음을 내뱉지 못하고 노래 속에 담아둔 건데. 그 이야기가 잘 들리면 되는 거잖아요. 뒤늦게 알게 됐죠.
10.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겠군요.
박기영 : 음악을 위한 음악으로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음악을 잘 해야 하고, 기능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야 된다고. 잘 정돈되고, 좋은 연주에 음정 박자, 리듬도 잘 맞아야 된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음악을 하는 이유도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음악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는, 우린 이야기꾼인 거죠. 보잘것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들어줄 수 있는 이들이 있어서 고마운 거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릇이 되는 것 같아요, 음악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고, 교감을 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그릇 말이죠.
10. 앞으로의 음악 활동도 기대됩니다.
박기영 : 동물원은 2003년에 9집을 내고 신곡이 나오지 않았어요. 이번엔 녹음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 여름, 동물원’의 OST를 녹음하는데 우리가 써놓은 곡이 있으니까, 즉흥적으로 해보자고 해서 3곡을 녹음했어요. 그게 12월께 나올 거예요.
동물원이 내후년 1월이면 음반을 내놓은지 30주년이 됩니다. 물론 2, 30주년이란 것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상황 자체가 창기 형이 음악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도 꽤 됐고, 이 작품을 보면서 현재 우리의 상황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외부에 보이는 이벤트라기 보다, 우리 친구들한테 의미 있는 그런 서른 살은 어떤 걸까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여름, 동물원’이란 작품이 많은 동기부여를 줬죠.
10. 끝으로, 박기영 그리고 동물원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요?
박기영 : 우리 노래와 가사가 신선했던 건 그런 거 같아요. 사실 노래엔 되게 시적이고 아름다운 가사가 많지만, 적나라한 나의 느낌은 아니잖아요. 극화된 사랑, 아름답지만 내 이야기 같지 않은 노래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소소한 감정, 서글픈 상념,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이야기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게 우리 팀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의미가 있었고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 다른 세대들이 우리 음악을 만나서 ‘내 이야기 같은데? 어쩜 내 마음을…’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웃음)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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