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코펜하겐’의 연출가 윤우영/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연극 ‘코펜하겐’의 연출가 윤우영/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처음 대본을 받아들고는 황당했다. 지문도 하나 없이, 게다가 지나치게 생소한 과학 이론과 용어가 난무했다. 첫 만남은 ‘황당’이었지만, ‘감동’으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무대에 오른 연극 ‘코펜하겐’, 그리고 연출을 맡은 윤우영 감독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났다. 2010년, 재정비해 다시 한번 무대에 올렸고, 2016년 7월, 거듭 관객들을 만났다. 세 번 모두 연출자로 나선 윤우영 감독에게 ‘코펜하겐’은 어떤 작품보다 애틋하고, 떼려야 뗄 수 없다.

1996년 ‘마로윗츠 햄릿’으로 연출가의 삶을 걷기 시작한 후 단순한 작품보다는 늘 어려운 길을 택했다. “어려운 만큼 감동이 크다”라는 걸 몸소 느낀 윤우영 연출의 뚝심이 지금의 ‘코펜하겐’을 있게 했다. 깊이 있는 작품에 대한 갈증, 앞으로 내놓을 작품에 대한 설명에 눈빛이 반짝이는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10. 6년 만에 재연을 올렸습니다. 첫 공연은 만족스러웠나요?

윤우영 : 아무래도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첫 공연이 가장 좋아요. 다만 이번에는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극장에 에어컨을 가동하니, 배우들의 대사 전달이 좀 힘들었죠. 같은 날 진행된 2회 공연부터는 소리의 울림을 잡았고, 만족했습니다.

10. 어떤 점이 변했나요?
윤우영 : 음악을 첨가했어요. 물론 보기에 덜 부담스럽게 첨했고요. 영상도 몇 가지를 삽입하려고 시도했지만, 만들어 놓고 보니 지나친 영상 투사는 배우들을 가려 버릴 것 같더라고요. 고민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영상은 포기를 했죠. 배우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어요. 조명의 경우에도 하나의 핀 조명으로 처리를 한다든지, 대사 전달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했어요. 사실 아무리 쉽게 풀려고 해도 어려운 소재인데, 가능한 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조명도 단순하게, 포인트만 뚜렷하게 하도록이요. 그래서인지, 6년 전보다 명확해진 것 같아요.

10. 남명렬 배우를 제외하고는 출연자도 바뀌었어요.
윤우영 : 6년 전 배우들의 연기는 드라마틱한 느낌이 강했어요. 배우들이 그야말로 굉장한 열기를 뿜어냈는데,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어려운 대사인데, 편안하게 들을 수가 없는 거죠. 이번에는 차분하게 대사를 하도록 해서 대사 전달이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10. 재연의 본격적인 준비는 언제부터였나요?
윤우영 : 지난 3월부터 준비를 했어요. 가장 달라진 점은 ‘차분함’이에요. 배우들이 냉정하게 대사 위주로 가니까, 전보다 훨씬 연기가 안정적이고 이성적인 느낌이 강해요. 진짜 대화를 주고 받는 느낌이죠. 물론 관객에 따라서는 6년 전이 더 좋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요.

10. 작품이 어려운 만큼 캐스팅이 관건인 작품 같아요.
윤우영 : 맞아요. 배우들의 역할이 굉장히 큰 작품입니다. 한 마디만 실수를 해도 극이 진행되지 않거든요. 2009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한 배우가 1, 2페이지를 한 번에 넘어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모두가 당황스럽거든요. 내용도 어렵지만, 배우들의 순발력도 필요로 하는 작품이죠. 게다가 이론에 대한 느낌도 갖고 있어야 표현을 할 수 있고, 독백의 순간에는 감정도 실어야 하고요. 배우들에게는 어려운 작품이에요. 그런데 작품을 본 다른 배우들은 다 하고 싶어 해요. 연극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캐릭터들이죠. 캐스팅할 때 조심스러워요. 머리를 쓰고자 하고, 또 쓸 줄 아는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죠. 거기에 또 캐릭터와 잘 맞아야 하고요.

10. 두 번째인 만큼 연출자로서도 달라진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윤우영 : 처음 대본을 봤을 때는 황당했어요.(웃음) 서울대 공대 출신이 모여 만든 실극이라는 극단이 있어요. 그들이 모두 번역을 해서 만들었고, 저에게 연출을 제안했어요. 과학 이론에 시제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웠죠. 대본 작업부터 기본 토대를 다시 잡았어요. 어느 부분은 대사를 늘리기도 했고, 또 삭제도 많이 했어요. 해석적으로 골치 아픈 부분을 덜어내기도 하고요. 가장 처음 공연을 마치고는 뭔가 부족함을 느껴서 2008년에는 대사를 좀 더 집어넣었어요. 그때를 초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어서. 이후인 2009년 공연을 사실상 정식 초연으로 보고 있습니다.

윤우영 연출가/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윤우영 연출가/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을 맡았고, 올해 또 한 번 맡았다는 건 작품에 분명 매력이 있었군요.

윤우영 :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보면 볼수록 관객들이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라고요. 결국 삶이거든요. 세 사람이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미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과학을 넘어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결국은 모두 불확실하고, 현재가 중요하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과학 이론으로만 볼 게 아니라, 관객들이 이 점을 조금만 이해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았죠. 아시다시피, 요즘엔 머리 쓰는 작품들이 많이 없어요. 코미디 혹은 상업극이 대부분이죠. 사실상 ‘코펜하겐’과 같은 작품들은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고요. 그래서 더욱 하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코펜하겐’처럼,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10. 과학 이론을 나열하다가, 닐스 보어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때부터 인생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우영 : 뜬금없이 죽은 아들 이야기를 할까, 싶기도 하죠. 그것이 한 번이 아니라 반복됩니다. 처음 연출할 때는 이런 것에 대한 생각들이 명확하지 않았어요. 할수록, 결국 그 아들의 죽음과 보어와 하이젠베르그의 허우적거림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이걸 읽을 줄 알면 훨씬 더 작품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10. ‘코펜하겐’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윤우영 : 그 누구도 미래는 볼 수가 없죠. 알 수가 없고 불확실하죠. 누구나 삶에서는 허우적거리는 겁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물음은 계속 가져가는 거고요. 그게 삶의 불확정성의 원리이고, 굉장히 철학적이죠. 거기서 출발한 작품입니다. 보어 자체가 실제로 철학에 심취해있었고, 상보성의 원리 역시 그래요. 그는 중국의 동양철학을 공부했을 정도로 빠져있었어요.

10. ‘코펜하겐’의 재연을 올리기 전까지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윤우영 : 극단에서 지방 순회공연도 다니고, 뮤지컬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상업적인 것 외에 다른 작품에 대한 갈증이 있었죠. 2011년 ‘화장’이라는 공연을 했어요. 그 이후로 5년 만에 다시 ‘코펜하겐’을 하는 거죠. 가끔은 이렇게 깊은,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사실 엄밀히 흥행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10. 향후 몇 년 뒤 ‘코펜하겐’을 또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웃음)
윤우영 : 또 연출자로 나서게 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재해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요. 다시 만들게 된다고 하면, 현재 보어와는 좀 다른 캐릭터, 기존 대본에 있는 어떤 부분을 극대화한다든지, 그렇게 한다면 지금과 다른 하이젠베르그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저 역시 궁금하네요.

윤우영 연출가/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윤우영 연출가/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연출가로서의 방향이 확실하신 것 같아요.

윤우영 : 조연출 때 영향을 받았어요. 20대에 실극을 통해 다소 무거운 작품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적응을 하다 보니까,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것 같아요. 당시에 앞으로 어떤 연극을 해야겠다, 하고 싶다는 방향이 생겼죠.

10. 데뷔작이 1996년 연극 ‘마로윗츠 햄릿’입니다.
윤우영 : 해체극에 관심이 있었어요. ‘마로윗츠 햄릿’이 사실상 공식적인 데뷔라고 할 수 있죠.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연극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때부터 지금의 취향이 확고해진 것 같습니다. 정통극 위주였는데, 해체극은 당시 어려운 점이 있었어요. 우유부단한 햄릿의 단면에 초점을 맞췄고, 흐름을 바꾸면서 관객들이 헷갈리게 만들었죠. 그렇지만 빠져들면 극이 흘러갈수록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어요.

10. 데뷔작으로 수상까지 했습니다.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윤우영 : 공교롭게도, 상을 받았어요.(웃음) 사실 기대는 안 했는데, 굉장히 편하게 작업한 작품이거든요. 1999년에 했던 ‘조선제왕신위’라는 작품도 해체적인 작품이에요. 연출가로서 모험과 도전을 많이 했어요. 실험적인 작품으로 수상을 하면서 앞으로도 이 같은 작품을 해야겠다는 신념이 더 확고해졌죠. 사실 그 배경에는 배우들이 있어야 해요. 모든 걸 받아들이는, 배우들에게 모든 것이 입력돼야 하거든요.

10. 연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어디인가요? 배우가 큰 몫을 차지하겠네요.
윤우영 : 캐스팅이죠. 극중 캐릭터가 배우에게 맞는지를 확인하고, 또 항상 즐겁게 연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격적으로도 잘 맞는 배우들을 캐스팅해 왔습니다. 크게 언성을 높이지 않고, 잘 할 수 있도록이요. 배우 캐스팅이 잘 되면 그 작품은 절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어요. 우선 같이 작업한 연출가들에게 조언을 구하죠.

10. 평소 다른 작품을 많이 보는 편인가요?
윤우영 : 20대와 비교하면 많이 줄었지만, 봐야 하는 작품들은 꼭 봐요. 친한 극단의 작품도 챙겨보고요.

10. 계획 중인 작품이 있나요?
윤우영 : 꾸준히 준비 중이에요. 신작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읽어보고 있어요. 지나치게 상업적이지 않으면서 작품성을 갖추고 있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목표라고 하면 그간 조명되지 않은 인물을 그려보고 싶어요. 때로는 논란이 되기도 하고, 또 드라마틱한 삶을 산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작품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삶에 있어서도 큰 목소리뿐만 아니라 작은 목소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쪽에 치우친 건 아니지만, 모든 목소리를 존중하고 싶어요.

10. 창작의 고통에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기도 해요.
윤우영 : 예전에는 자동차를 타고 근교라도 드라이브를 가곤 했어요. 바둑도 많이 뒀고요. 바둑을 두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 생각이 없어져요. 그렇게 마음을 달랬죠.

10. 연출에게도 유독 빠져나오기 힘든 작품이 있을 것 같습니다.
윤우영 : 사실 배우들과는 다르겠죠. 한 달 이상을 그 캐릭터로 사는 배우보다는 덜할 테지만, 분명 있긴 해요. 와이프는 여행을 좀 다녀오라고 하더라고요. 외국에 가서 공연도 좀 보고, 새로운 실험극도 관람하라고요. 그런 시간을 갖고 싶기도 합니다. 요즘엔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드는구나 깨닫는 게 많을 것 같아요. 물론 국내에서도 가능하죠. 후배들이 저예산으로 만드는 작품을 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해요. 그래서 자주 보려고 노력하고요.

10. 창작을 위해서는 비워내는 작업, 또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죠.
윤우영 : 유학을 다녀온 뒤 10년 정도는 그때 보고 느꼈던 걸 썼어요. 지금은 점점 고갈돼 가는 기분이 들죠. 새로운 걸 느끼고 충전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윤우영 연출가/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윤우영 연출가/사진=서예진 기자 yejin0214@

10. 연출과 연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윤우영 : 과거엔 학교 수업을 통해 철학개론과 심리학 개론을 기본적으로 들었어요. 역사, 세계사 역시 마찬가지고요. 작품의 철학을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훨씬 편하죠. 요즘은 표현에 있어서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깊이가 아쉬운 거죠. 물론 요즘 친구들은 순발력에 있어서는 탁월해요. 거기에 기본적인 지식이 더해진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배우든, 연출이든 인문학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깊이가 생기고, 그것이 아우라가 돼 빛난다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10. 연출가 윤우영의 5년 후는 어떨 것 같나요.
윤우영 : 지금처럼 지낼 것 같아요.(웃음) 어려운 작품도 계속해서 할 생각이고요. 인물에 대한 집중 탐구도 계획대로 진행할 거예요. 신윤복의 재해석부터 말이죠. 연출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어떤 단체의 장이 된다든지 하면서 현장과 멀어져요. 최대한 현장에서 느끼고 표현하는 연출가로 있고 싶고, ‘코펜하겐’처럼 고문스러운 작품도(웃음) 관객들이 뭔가를 얻어 갈 수만 있다면 계속하고 싶어요. 어렵다고 하더라도, 감동을 위해 만들어나갈 생각입니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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