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충무로 능력자들]
황석희
황석희

영화 ‘데드풀’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좌석에 앉아 스크린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이 요염한 안티히어로의 ‘찰진 말빨’을 유머 충만한 자막으로 풀어낸 번역가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암흑 속에서 떠오르는 이름 황.석.희. ‘데드풀’을 보며 이 영화의 번역가에게 호기심을 느낀 건, 한두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데드풀’ 관련, 인터넷 공간에 “번역가, 약 빨았네!” “번역가에게 상 줘라” 등의 글이 넘쳐나는 걸 보면 말이다. 영화 번역가가 관심의 중심에 서는 일도 드물지만, 그것이 논란 때문이 아닌 환호로 보답 받은 것은 분명 드문 풍경이다. 서두를 필요가 있나. 황석희 번역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황석희 번역가를 파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건넨 명함. 엔딩 크레딧 형식으로 꾸며진 명함에서 황석희라는 사람의 ‘센스’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명함 뒷면에 있는 ‘세상을 번역하다’라는 문구가 특히나 가슴에 박혔는데, 실제로 황석희 번역가의 작업 반경은 넓고 깊고 다채롭다. 현재 극장가에 걸려 있는 ‘스포트라이트’ ‘캐롤’ ‘사울의 아들’ 역시 황석희의 손을 거친 작품들. ‘데드풀’ 포스터 글귀를 살짝 바꿔서 인용하자면, 황석희는 현재 가장 ‘핫하고, 재기 넘치고, 요염한’ 영화 번역가임에 틀림없다.

10. 솔직히 말해보자. ‘데드풀’을 극장에서 몇 번 봤나.
황석희: 하하하. 4-5번 정도 본 것 같다.
10. 번역하면서 ‘이 부분에서 웃음이 터지겠다’ 예상했던 게 있었을 텐데, 예상과 실제 관객 반응엔 차이가 큰가.
황석희: ‘데드풀’은 그래도 타율이 좋은 편이다. 10개 중 8개는 내가 노린 부분에서 웃으시는 것 같다. 가령 인스타그램 태그를 단 ‘방귀타그램’에서 많이들 웃으신다. 오프닝 크레딧(배우/스태프의 진짜 이름 대신 ‘감독: 돈만 많이 처받는 초짜’, ‘제작: 돈많은 호구들’ 등으로 표기됐다)도 예상대로 많이들 좋아해주시고. 그런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오프닝 크레딧을 자막사고로 받아들인 분들도 꽤 많더라.(웃음) 크레딧이 끝날 때쯤에야 이해하신 분들도 많았고. 신선하게 느끼셨던 것 같다.

10. 안 그래도,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이 영화는 번역이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겠구나’ 싶었다. 번역의 맛이 살려야 하는 영화라, 직역과 의역에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황석희: 의역과 직역을 수치로 봤을 경우 ‘데드풀’은 오히려 직역 쪽으로 간 경우다.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지, ‘어떻게 바꿀까’로 고민하지는 않았다. 바꾸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분명한 작품이니까.
황석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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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령, 어떤?
황석희: 지금 어린 관객들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돈 많은 부자 캐릭터가 등장하면 자막에 ‘정주영’이라 표기하기도 했다.(일동웃음) “우리 ‘투캅스’에 나오는 안성기-박중훈 처럼”이란 자막도 있었다. 지금 보면 너무 촌스럽지만 당시엔 그게 일반적이었다. 이젠 추세가 달라져서 만약 ‘투캅스’나 ‘정주영’을 썼다가는 인터넷에 “황석희 죽어라” 난리가 날 거다.(웃음) 지금의 관객들은 미국문화를 너무 잘 알기에, 그들의 수준을 무시하고 번역을 하는 건 큰 실례다.
10. 의역은 어떤 영화들에 많이 들어가나.
황석희: 의외로 잔잔한 영화들에 많이 들어간다. ‘인사이드 르윈’처럼 문학적 대사들이 있는 경우에 의역을 많이 사용한다. ‘데드풀’의 경우 미국 문화나 B급 문화를 얼마나 ‘센스’있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했다.

10. 흔히 말하는 ‘드립력’ ‘덕력’을 요하는 영화다.
황석희: 맞다. 똑같은 소재를 가지고 틀리지 않게 어떤 ‘드립’으로 푸느냐가 중요했다. 그걸 의역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한글로 봤을 때 원문이 뭔지 모르는 수준으로 간 게 의역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두 문장을 놓고 봤을 때 의미와 뉘앙스만 같은, 원문을 유추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그렇다.

10. 잘 모르는 입장에서도 번역은 녹록치 않는 작업으로 보인다. 원문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가느냐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쪽으로 가느냐, 존대를 쓰느냐 반말을 쓰느냐,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축약하느냐 등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일 것 같다.
황석희: 사실 번역가들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과 관객들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에는 괴리가 조금 있다. ‘데드풀’은 엄밀히 말해 관객이 좋아하는 번역이다. 번역가들이 봤을 때는 좋은 번역이 아닐 수 있다. 너무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기도 하고, 직설적이기도 해서. 사실 ‘데드풀’은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스타일과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이 영화를 겪으면서 프로 집단에서 생각하는 좋은 번역이라는 게, 과연 정말로 좋은 번역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지금까지 좋은 자막이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어떤 편견’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10. ‘인사이드 르윈’ ‘노예 12년’ ‘아메리칸 허슬’ ‘폭스캐처’ ‘셀마’ 등 예술성 있는 영화들을 주로 번역해 온 이력 때문에, ‘데드풀’ 번역을 했다길래 좀 의외이긴 했다.(웃음)
황석희: 작은 영화들을 작업하긴 했지만, 영화업계 쪽에 나를 알린 첫 작품은 ‘웜바디스’다. ‘웜바디스’도 나름 ‘개드립’이 난무하는 영화였다. 관객들이 좋아했던 건 ‘매정한 년!’ ‘헐?!!’, ‘허….얼?!!’ 이런 번역들.(웃음)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로부터 ‘데드풀’을 받으면서 좋긴 했는데 걱정도 컸다. 내가 히어로물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데드풀이 어떤 캐릭터인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거든. 번역가가 굉장히 고생하겠다 생각했던 작품이라, 대본을 받을 때 부담이 확 오더라. 처음엔 ‘개봉하면 2주 정도 잠수타야겠다’ 생각했다. 이런 미국식 개그는 어떻게 번역하든 욕먹기 쉽거든. 한숨 푹푹 쉬게 하는 대사들이 많았다.
데드풀
데드풀
10. 과감한 대사가 ‘신의 한 수’였다고 본다. 수위를 많이 눌렀다면 지금처럼 영화가 짜릿하지 못했을 거다.
황석희: 많은 공이 폭스에 있기도 하다. 폭스에서 많이 풀어준 거니까. 어떤 영화든 번역가 혼자 하는 건 없다. 우리나라의 모든 영화 자막은 영화사/배급사 피드백을 받는다.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는 과정을 몇 번 거쳐서 자막이 완성된다. 처음 ‘데드풀’을 받고 ‘강하게 가야겠다’ 싶었다. 초벌 자막을 넘겼을 때 ‘100% 잘리겠구나, 강하다는 의견을 주실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폭스에서 의외로 “그대로 가도 좋습니다”라는 응답을 해왔다. 좋기도 하면서 ‘번역이 욕을 먹으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내 잘못이겠구나’ 싶었다. 영화사에서 마음껏 뛰어보라고 목줄을 풀어줬고, 그래서 내 스타일을 살려서 했는데 반응이 안 좋으면? 어디에도 핑계를 댈 수가 없으니까.

10. 결과적으로 괜한 걱정이었다. 번역가가 이토록 주목받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반응이 좋은데, 번역에 대한 평은 찾아봤나.
황석희: 나는 한국에 나오는 거의 모든 외화의 번역 평을 모니터링 한다. 당연히 내 영화도 찾아보지.(웃음) ‘데드풀’ 이전까지는 블로그·트위터·영화 게시판 등에 올라온 내 번역 평들에 모두 댓글을 달아줬었다. 그런데 ‘데드풀’은 그럴 수 있는 양을 넘어버렸다. 이렇게 번역이 많이 언급된 건 처음이다.

10. 능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만난다고 해도 그 능력을 제대로 뽐내기란 더 어렵고. ‘데드풀’은 그 두 가지가 잘 맞아떨어진 경우라 생각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평은 뭔가. 역시 ‘약 빤 번역’이란 평?(웃음)
황석희: 하하하. 다들 ‘번역가, 약 빨았다’고.(일동웃음) 장인어른에게 관련 기사를 보여드리곤 한다. 어른들은 자식들 자랑하는 맛에 사시니까. 보여드렸더니 장인어른이 “그런데 황서방, 약 빨았다는 건 무슨 소린가?” 하시더라. 설명하기 애매해서 “아버님, 그건 자막이 기발하다는 뜻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일동폭소) 재미있는 평 같다. 지금 ‘데드풀’ 네이버 평점에 들어가면, 가장 공감을 많이 받은 평이 “번역가한테 상 하나 줘야 한다”다. 평점에 번역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인데, 또 호평이라니. 이런 풍경은 아마 내게 다신 없을 거다. 그래서 한창 ‘스크린 샷’을 뜨고 있다. 인쇄해서 두고두고 보려고.(웃음)
10.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숨겨진 레퍼런스가 깨알 같이 많은 영화니까. 개인 블로그에 <3분만에 보는 데드풀 예습 총정리>를 정리해서 올렸더라.
황석희: 마블 팬이 아니거나 영화를 많이 안 본 분들의 경우, 감지 못할 유머들이 꽤 많다. 그게 너무 아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더라. 그래서 스포일러가 될 만한 건 빼고, 알고 가면 재미있겠다 싶은 것들을 몇 개 정리해서 올렸다.

10. 그 글에 대한 반응이 상당하던데. 트래픽 초과로 블로그가 마비된 것도 그 글 때문 아닌가.(웃음)
황석희: 여러 가지로 ‘데드풀’을 통해 흥미로운 경험들을 하고 있다.(웃음)
황석희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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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펴봤는데, ‘마블코믹스 관계자들의 자막카메오’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라도 캐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황석희: 그건 마블 골수팬 아니면 놓치기 쉬울 거다. 해외 팬들도 많이들 모른다. 워낙 ‘훅’ 지나가는 거라. 사실 그 내용을 몰라도 영화를 보는데 전혀 상관은 없다. 잔재미인 거지.

10. 그런 정보들은 번역 전에 영화사 측에서 알려주는 건가, 아니면 번역가의 능력인 건가.
황석희: 대본이 올 때 참조로 딸려 오는 경우가 있는데 완벽하게 다 오지는 않는다. 각본가가 어떤 걸 노리고 ‘드립’을 친 건데, 참고 내용도 없고, 나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면 진짜 욕먹는 거다.(웃음) ‘마블코믹스 관계자들의 자막 카메오’는 내가 찾아서 쓴 경우다. 지인 중에 마블 그래픽 노블을 번역하는 분이 있다. 그 분에게 여쭤보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마블을 좋아해도 전문가만큼은 모르니까. 가령 ‘자비에 영재학교’(영화 ‘엑스맨’ 시리즈에 등장한다. 뮤턴트들의 정신적 지도자 찰스 자비에가 이끄는 학교)의 경우 한국 그래픽노블에서 쓰는 정식명칭이 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다.
10. ‘데드풀’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캐롤’도 번역했다. ‘데드풀’과는 다른 의미로 번역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섬세한 ‘캐롤’ 대사들을 번역하면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황석희: 아주 사소한 건데, 테레즈(루니 마라)와 캐롤(케이트 블란쳇)이 이별을 한 후 테레즈가 캐롤에게 전화를 한 번 건다. 전화를 건 테레즈가 “캐롤, 아이 미스 유, 아이 미스 유(Carol. I Miss You. I Miss You)” 두 번 이야기를 한다. 처음 “아이 미스 유”를 했을 때 캐롤이 전화를 끊고, 두 번째 “아이 미스 유”는 듣는 이가 없는 상태에서 하지. 영문으로는 같은 대사인데 첫 번째 번역은 “보고 싶어요”로, 두 번째는 “보고 싶어…”로 했다. 나는 한 사람이 끝까지 비슷한 언어를 구사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중간에 반말을 슬쩍 섞을 때가 있는데, 그런 사소한 것을 캐치해 주시는 관객들이 있다. 검색을 해보니, “두 번째를 반말로 써 놓으니까 두 배로 짠했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 별 게 아닐 수 있지만, 번역가 입장에서는 나름 고민해서 쓴 거거든. 그걸 알아주는 관객들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맙고 기분 좋다.

10. 매의 눈을 지닌 관객들이 많다.(웃음)
황석희: ‘데드풀’에도 있었다. 주인공이 타고 있던 기구가 팡 터진 후, 절벽 같은 곳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간신히 올라가서 드러눕는 장면이 있다. 거기에서 나오는 데드풀의 대사가 “머더퍽킹(motherfucking)”인데, 그걸 “머↗더퍼킹↘” 한숨을 푹 쉬면서 한다. 그 억양을 살리려고 자막을 “아이고~ 죽겠네”로 번역했다. 데드풀의 어투와 어울리는 것 같아서 노리고 쓴 건데, 그걸 알아주시는 분들이 있다. “그 부분에서 데드풀이 한국말 하는 줄 알았음”이라고 해 주시는 분들이. 또 ‘쉿뻑(shit! fuck!)’이라는 욕이 나오는데, 그걸 ‘씨X’이라고 안 하고 나는 ‘씨박’이라고 했다. 비슷하게 들리라고 쓴 건데, 그걸 또 캐치해서 웃기다고 하는 분들도 많다. 그런데 영어 음차를 이용해서 번역을 하는 건, 내 특기라기보다 번역가 이미도 씨가 굉장히 잘 하는 방법이다. 굉장하시다. 그건 기술이라기보다는 개념 자체가 다르거든. 그런 것들은 보면서 배운다.

*황석희 번역가의 인터뷰는 2부로 이어집니다.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권영탕 sorrowky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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