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완전 서양판 ‘사랑과 전쟁’이네~”
뮤지컬 ‘엘리자벳’을 본 뮤덕(뮤지컬 덕후)들 사이에서는 꽤 흔한 반응이다. 이해한다. “어머니는 절 질투하세요”(엘리자벳이 시어머니 소피에게)라든지 “당신 엄마야, 아님 나야”(엘리자벳이 남편 요제프에게)와 같은 대사들은 고부 갈등의 전형처럼 보인다. 게다가 대공비 소피는 아들 부부의 잠자리 문제에까지 관여한다. 영화 ‘올가미’가 부럽지 않다. 광고 카피는 또 어떤가,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한 아름다운 황후.” 죽음과 엘리자벳의 은밀한 사랑(혹은 불륜)을 암시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양판 ‘사랑과 전쟁’이란 평가는 여전히 억울하다.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로맨스가 아니라 구원이었기에.
엘리자벳을 위한 변명
‘엘리자벳’을 감상하는 팁 하나. 엘리자벳에게 자유란,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니었음을 인지할 것.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유는 그녀의 존재 목적이었다.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해볼까. 그녀가 원한 자유는 신체를 넘어 영혼 또한 속박되지 않는 상태. 황실의 규율이 그녀의 몸을 구속했다면, 대중의 흥미 어린 시선은 그녀의 영혼을 구속했다. 여기까지가 제 1차 자아 붕괴.
소피와의 (고부 갈등처럼 보이는)알력 싸움 끝에 엘리자벳은 잠시나마 자유를 얻는 듯 하지만, 소피의 계략으로 남편 요제프로부터 배신당한다. 충격을 받은 엘리자벳은 황실을 떠나 유럽 곳곳을 누빈다. 자, 여기서 물음표 하나가 그려질 수 있다. ‘황실에서 벗어났으니, 자유로워진 것 아닌가?’ 반복해 말하건대, 엘리자벳에게 자유란 영혼의 속박 상태와도 관련이 있다. 자유를 향한 엘리자벳의 갈망과 움직임은 허무함만 낳았을 뿐이다. “난 모든 것에 맞서 싸웠지만 난 뭘 이뤘나. 아무 것도….”(‘아무 것도’ 中) 허무는 또 다시 갈증을 낳고, 또 다시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또 다른 허무함을 안긴다. 이 같은 악순환이 그녀의 영혼을 구속한다. 제 2차 자아 붕괴. 보너스(?)로 아들 루돌프의 죽음으로 인해 멘탈 붕괴까지 따랐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엘리자벳은 깨닫는다.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벗어나 제 영혼을 풀어주는 일, 쉽게 말해 진정한 자유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그러니까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그녀의 구원이었던 셈이다. 내내 악마를 연상시키던 죽음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천사와 같은 의상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향한 엘리자벳의 걸음은 감동적일 만큼 홀가분해 보였다.
죽음을 위한 변명
‘엘리자벳’을 감상하는 팁 둘. 엘리자벳의 눈에서 죽음을 바라볼 것. 분명히 하자. 죽음은 (인간의 몸으로 표현되나)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남자는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한 여잘 사랑하는 두 남자의 빤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라는 ‘마지막 춤’의 가사는 대단히 잘못됐다. 다만 죽음이 남자의 몸, 그것도 섹시한 남자의 몸으로 표현되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다. 엘리자벳은 일생동안 죽음으로부터 엄청난 매혹을 느껴왔고, 이를 직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게 섹시함이기 때문이다.
정통 뮤지컬배우가 아닌 가수 출신 배우들, 특히 젊고 잘생긴 배우들을 기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단 죽음이 부르는 넘버는 팝의 느낌이 강한데다가, 좀 튀어도 된다. 성악 톤의 창법을 죽음은 빗겨가도 좋다는 말이다. 또 목소리나 외모는 물론, 몸짓만으로도 관객 들을 홀리는 것이 죽음의 임무. 때문에 새로 선보인 븐토드(최동욱)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그의 움직임은 날렵하고 매끄러웠다. 넘버 소화도 준수했다. 미성의 목소리는 ‘마지막 춤’이나 ‘그림자는 길어지고 리프라이즈’ 등의 넘버와 잘 어울렸다. 살짝 섞인 비음도 매력 있게 들렸다. 게다가 세븐은 아주 낮은 목소리도 낼 줄 알더라. 성량을 키우고 전 음역대를 자신의 목소리로 아우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전반적으로 ‘섹시한 죽음’에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다.
죽음은 내내 엘리자벳을 유혹한다. 때론 거만하고 때론 화도 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서만큼은 하얀 옷을 입고 왕자님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는 애처로울 정도로 감미롭게 노래한다. “엘리자벳. 이제 내게 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나만의 여인.” 엘리자벳은 답한다. “어둠은 끝났어. 영혼의 안식처를 원해. 기억은 모두 지우고 이제는 자유를 찾아.” 엘리자벳을 향한 죽음의 갈망과, 자유를 향한 엘리자벳의 갈망이 모두 해소되는 순간. 엄청난 전율이 찾아온다. 서양판 ‘사랑과 전쟁’이란 평가가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엘리자벳은 지난 6일을 마지막으로 서울공연의 대장정을 끝냈다. 이어 오는 17일 대구공연을 시작으로 지방 투어에 나선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완전 서양판 ‘사랑과 전쟁’이네~”
뮤지컬 ‘엘리자벳’을 본 뮤덕(뮤지컬 덕후)들 사이에서는 꽤 흔한 반응이다. 이해한다. “어머니는 절 질투하세요”(엘리자벳이 시어머니 소피에게)라든지 “당신 엄마야, 아님 나야”(엘리자벳이 남편 요제프에게)와 같은 대사들은 고부 갈등의 전형처럼 보인다. 게다가 대공비 소피는 아들 부부의 잠자리 문제에까지 관여한다. 영화 ‘올가미’가 부럽지 않다. 광고 카피는 또 어떤가,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한 아름다운 황후.” 죽음과 엘리자벳의 은밀한 사랑(혹은 불륜)을 암시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양판 ‘사랑과 전쟁’이란 평가는 여전히 억울하다.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로맨스가 아니라 구원이었기에.
‘엘리자벳’을 감상하는 팁 하나. 엘리자벳에게 자유란,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니었음을 인지할 것.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유는 그녀의 존재 목적이었다.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해볼까. 그녀가 원한 자유는 신체를 넘어 영혼 또한 속박되지 않는 상태. 황실의 규율이 그녀의 몸을 구속했다면, 대중의 흥미 어린 시선은 그녀의 영혼을 구속했다. 여기까지가 제 1차 자아 붕괴.
소피와의 (고부 갈등처럼 보이는)알력 싸움 끝에 엘리자벳은 잠시나마 자유를 얻는 듯 하지만, 소피의 계략으로 남편 요제프로부터 배신당한다. 충격을 받은 엘리자벳은 황실을 떠나 유럽 곳곳을 누빈다. 자, 여기서 물음표 하나가 그려질 수 있다. ‘황실에서 벗어났으니, 자유로워진 것 아닌가?’ 반복해 말하건대, 엘리자벳에게 자유란 영혼의 속박 상태와도 관련이 있다. 자유를 향한 엘리자벳의 갈망과 움직임은 허무함만 낳았을 뿐이다. “난 모든 것에 맞서 싸웠지만 난 뭘 이뤘나. 아무 것도….”(‘아무 것도’ 中) 허무는 또 다시 갈증을 낳고, 또 다시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또 다른 허무함을 안긴다. 이 같은 악순환이 그녀의 영혼을 구속한다. 제 2차 자아 붕괴. 보너스(?)로 아들 루돌프의 죽음으로 인해 멘탈 붕괴까지 따랐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엘리자벳은 깨닫는다.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벗어나 제 영혼을 풀어주는 일, 쉽게 말해 진정한 자유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그러니까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그녀의 구원이었던 셈이다. 내내 악마를 연상시키던 죽음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천사와 같은 의상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향한 엘리자벳의 걸음은 감동적일 만큼 홀가분해 보였다.
‘엘리자벳’을 감상하는 팁 둘. 엘리자벳의 눈에서 죽음을 바라볼 것. 분명히 하자. 죽음은 (인간의 몸으로 표현되나)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남자는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한 여잘 사랑하는 두 남자의 빤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라는 ‘마지막 춤’의 가사는 대단히 잘못됐다. 다만 죽음이 남자의 몸, 그것도 섹시한 남자의 몸으로 표현되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다. 엘리자벳은 일생동안 죽음으로부터 엄청난 매혹을 느껴왔고, 이를 직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게 섹시함이기 때문이다.
정통 뮤지컬배우가 아닌 가수 출신 배우들, 특히 젊고 잘생긴 배우들을 기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단 죽음이 부르는 넘버는 팝의 느낌이 강한데다가, 좀 튀어도 된다. 성악 톤의 창법을 죽음은 빗겨가도 좋다는 말이다. 또 목소리나 외모는 물론, 몸짓만으로도 관객 들을 홀리는 것이 죽음의 임무. 때문에 새로 선보인 븐토드(최동욱)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그의 움직임은 날렵하고 매끄러웠다. 넘버 소화도 준수했다. 미성의 목소리는 ‘마지막 춤’이나 ‘그림자는 길어지고 리프라이즈’ 등의 넘버와 잘 어울렸다. 살짝 섞인 비음도 매력 있게 들렸다. 게다가 세븐은 아주 낮은 목소리도 낼 줄 알더라. 성량을 키우고 전 음역대를 자신의 목소리로 아우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전반적으로 ‘섹시한 죽음’에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다.
죽음은 내내 엘리자벳을 유혹한다. 때론 거만하고 때론 화도 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서만큼은 하얀 옷을 입고 왕자님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는 애처로울 정도로 감미롭게 노래한다. “엘리자벳. 이제 내게 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나만의 여인.” 엘리자벳은 답한다. “어둠은 끝났어. 영혼의 안식처를 원해. 기억은 모두 지우고 이제는 자유를 찾아.” 엘리자벳을 향한 죽음의 갈망과, 자유를 향한 엘리자벳의 갈망이 모두 해소되는 순간. 엄청난 전율이 찾아온다. 서양판 ‘사랑과 전쟁’이란 평가가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엘리자벳은 지난 6일을 마지막으로 서울공연의 대장정을 끝냈다. 이어 오는 17일 대구공연을 시작으로 지방 투어에 나선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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