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윤종신
윤종신
“제가 올해 마흔일곱 살인데요, 더 늦으면 뭔가를 못할 것 같았어요. 마흔일곱쯤 되면, 인생에 신빙성 있는 통계가 생기거든요. 그러면서 어떻게 변하냐면, 하던 걸 해요. 지금 하는 걸 오래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변화 같은 건 꿈도 못 꾸고요, 모험도 잘 못해요. 사실 작사가 콘서트라는 것 자체가 없던 콘셉트이기도 하고, 이렇게 발라드로만 가는 것도 굉장히 무모한 건데요. 그렇지만 저는 오로지 이야기로만 채워진 공연을 하고 싶었어요. 오늘 공연을 보면 ‘윤종신이 어떤 사랑을 해왔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 구나’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윤종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말이나 글이 아닌 노래를 통해서. 그 속에는 윤종신의 사랑도 있었고 이별도 있었으며, 상념과 고집도 있었다. 어느 때보다 솔직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까. 이날 윤종신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고, 한편으론 묘한 설렘도 느껴지는 듯 했다.

지난 29일과 30일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 삼성홀에서 ‘작사가 윤종신 콘서트 : 그늘-땀 흘린 자를 위하여’가 개최됐다. 무대 한편에는 커다란 조형 나무가 자리했고, 밴드의 악기가 아기자기하게 놓였다. 핀 조명 아래 위치한 작은 의자는 얌전히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경쾌한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작사가 윤종신이 등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윤종신
윤종신
‘그늘’과 ‘9월’ 박정현의 ‘오랜만에’로 시작된 공연은 이후 일곱 가지 테마로 진행됐다. 이별, 그리움, 재회, 체념, 감사, 삶, 위로, 오기가 바로 그것. 이별 테마에서는 ‘고요’와 ‘내일 할 일’을, 그리움 테마에서는 ‘야경’ ‘눈물이 주룩주룩’을 들려줬다. 이어 재회에서는 ‘스치듯 안녕’ ‘너에게 간다’ ‘뒷모습’을, 체념 테마에서는 ‘한 번 더 이별’과 ‘몬스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별 후 감정선을 따라간 세트리스트. 그야말로 윤종신의 ‘사랑의 역사’를 알 수 있던 시간이었다.

윤종신은 평소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깐족 대신,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공연을 이끌었다. 그는 각 테마에 얽힌 자신의 생각을 전하며 몰입을 도왔고, 곡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해 흥미를 더했다. 아이유, 박정현, 이수영 등 여자 가수들의 노래를 부를 때에는 화자를 남자로 개사하지 않고, 원곡 그대로 소화해냈다. 덕분에 노래의 이야기와 감성도 매끄럽게 흘러갔다. ‘9월’ ‘야경’처럼 평소 듣기 어려웠던 곡들도 반가웠으며, ‘몬스터’의 처절함은 관객들을 무아지경의 상태로 이끌었다.
윤종신
윤종신
윤종신은 “체념을 하면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나’의 소중함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내 평생을 바칠만한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 때 가지게 되는 감정이 바로 감사함이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대 없이는 못살아’와 ‘수목원에서’. 스펙터클한 이별의 과정을 거치고, 한 단계의 성숙이 그려지던 순간이었다. 사랑에서 삶으로, 윤종신의 시선이 옮겨지고 있었다.

이어진 테마는 삶. 윤종신은 “철없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파하던 한 남자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을 걱정하고 돌아보고 하소연하는 노래를 만들게 된다”면서 ‘서른 너머 집으로 가는 길’과 ‘나이’를 불렀다. 각각 그가 3, 40대를 맞이하며 썼던 곡. 30대의 중반에서 “정해진 걸까, 내 일 그리고 내 길”(서른 너머 집으로 가는 길 中)이라 고민하던 윤종신은 10여년 쯤 뒤, “날 사랑해. 난 아직도 사랑받을 만해”(나이 中)라며 제 삶을 껴안았다. 2, 30대를 위한 위로 테마송 ‘지친 하루’와 ‘오르막길’ 역시, 깊은 울림을 던졌다.

윤종신은 “내 가사를 보면 내 삶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내 삶’이란, 연예인이나 유명 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남자, 가정을 꾸린 아버지, 무엇보다 인생을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삶이다. 때문에 윤종신의 가사에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마지막 오기 테마에서 부른 ‘담배 한 모금’의 가사가, 마치 모두에게 전하는 윤종신의 당부처럼 느껴졌다. “참다 참다가 뒤돌아서서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담배 한 모금, 저 하늘에 뿜는 순간. 다 용서할게. 다 잊어줄게. 나를 짓누른 자들아. 혹시 내일이 되면 입장 바뀔지 몰라.”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미스틱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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