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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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정시우 기자]유해진은 올 여름 ‘극비수사’ ‘소수의견’ ‘베테랑’으로 누구보다 뜨거운 한철을 보냈다. 유해진 개인에게는 세 편의 영화를 동시기에 선보인 게 살짝 아쉬울 수 있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새삼 그의 연기내공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극비수사’의 김중산, 현실과 타협해 지내다가 다시 정의와 진실의 편에 서는 ‘소수의견’의 장대석, 비굴함과 야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베테랑’의 최상무. 모두 유해진이었지만, 또 모두 유해진이 아니었다. 데뷔 18년차 배우 유해진은 아직도 날마다 새롭다.

Q.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을 때 유해진은 코디와 깊은 대화중이었다.)의상은 항상 의논해서 정하나요?
유해진: 그럼요. 저는 주는 대로, 아무거나 입지 않아요. 하하하하.

Q. 얼마 전 아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가로수길 한복판에 한 남자가 백바지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쳐다봤더니 유해진 씨였다고 하더라고요.
유해진: 아이고~ 그래요? 제가 (패션)감각이 없지는 않습니다. 으하하하하

Q. 유해진 씨는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등으로 캐릭터를 보여줄 때가 많았어요. 가령 ‘신라의 달밤’의 파마머리, ‘공공의 적’에서의 화이트 양복이 그랬죠. 그에 비하면 ‘극비수사’에서의 의상은 굉장히 심플했습니다. 하얀 ‘난닝구’(러닝셔츠).
유해진: 개인적으로도 저는 ‘난닝구’를 좋아해요.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이라고 생각하거든요.

Q. 러닝셔츠하면 일반적으로 서민적인 옷이라는 인식이 있는데요.
유해진: 물론 그렇죠. 정확하게 말하면, 패션으로 봤을 때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해요. ‘난닝구’와 함께 또 하나 멋있다고 보는 건 ‘몸빼’.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멋있는 동시에 실용적인 옷이라고 생각합니다.

Q. 외국인들이 봤을 때 전위적인 의상으로 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웃음)
유해진: 맞아요. 외국에 소개되면 굉장한 ‘핫’한 반응을 이끌어 내리라 생각해요.
유해진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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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패션에 남다른 철학이 있으신 것 같아요.
유해진: 하하.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심플하면서도 실용적인 걸 좋아해요. 그런데 가끔 코디가(코디를 지목하며) 그런 옷을 안 가지고 올 때가 있어요.(일동 웃음) 지금 제가 입은 것도 굉장히 심플하지 않나요? 심플한 게 가장 멋있다고 생각해요.

Q. 그게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겠죠?
유해진: 네. 비슷한 것 같아요. 군더더기 없는…잠깐만. (혼잣말)내 삶에 군더더기가 없나? 하하. 없지는 않을 텐데.

Q. 하하. 작품 얘기를 해 볼까요? 한해에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게 낯설지는 않지만, 올해는 그 느낌이 조금 강한 것 같습니다. 최근 ‘극비수사’ ‘소수의견’ ‘베테랑’ 세 작품이 연달아 개봉했어요. 배우로서 조금 아쉬울 수 있는 부분 같은데요.
유해진: ‘서로에게 나쁜 영향만 안 줬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속상해 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으니까요. 모두 다 제 작품이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극비수사’로 좋은 스타트를 해서 나머지 영화에 좋은 영향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Q. 다행히 장르가 모두 다릅니다. 실제로 그동안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해 오셨고요.
유해진: 저는 운이 정말 좋은 놈이에요.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Q. 많은 남자 배우 분들과 호흡을 맞춰오셨어요. 당장 ‘극비수사’에서 김윤석, ‘소수의견’에서 윤계상, ‘베테랑’에서는 유아인과 힙을 맞췄죠. 유해진 씨 연기를 보며 항상 느끼는 점인데, 상대 배우의 기운을 죽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기운도 내뿜으세요.
유해진: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중요한데 쉽지 않은 연기죠.
유해진: 하하. 저는 제 씬이 아니더라도 좋은 아이템이 있으며 꼭 이야기 하는 편이에요. 저도 뒤처지면 안 되겠지만 ‘작품이 잘 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안을 해요. 물론 조심스럽게요. 아무리 친한 선후배라도 같은 배우로서 지켜야 할 선이 있으니까요. 결국 작품에서 중요한 건 밸런스인 것 같아요. 어느 한 쪽이 치우치면 안 되죠.
유해진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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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게 또 상대 배우에 따라 영향을 받지 않나요?
유해진: 그럼요, 받죠.

Q. 그건 또 어떻게 조율하세요?
유해진: 아, 이건 쉽지 않은 질문인데요? 감독님이 조절해 주는 경우도 있고요. 개인적으로도 생각을 많이 하고 촬영장에 나가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는 게 저에겐 중요해요. 가령 ‘극비수사’에서 (김)윤석이 형이 연기한 공길용 형사는 굉장히 동적인 인물이에요. 그랬을 때 ‘정’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김중산 도사를 조금 더 정적으로 연기한 면이 있어요. 둘 다 동적이면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Q. 감독님 영향도 많이 받는 편이신가요?
유해진: 음…그런 건 있어요. 오래 전 ‘이장과 군수’(2007)할 때였어요. 촬영 초반에 장규성 감독님 차를 타고 가는데, 오래 전 당신이 탔던 프라이드 차 얘기를 하면서 ‘프라이드를 폐차시키면서 폐차장에서 울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때 감독님이 확 가깝게 느껴졌어요. ‘저런 마인드를 가진 분이면 믿을 수 있겠다’ 신뢰가 갔죠.

Q. 유해진 씨 대사처리는 뭐랄까, 참 맛있어요. 어떤 표현을 써야 하나 아무리 찾아봐도, 맛있다는 어감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고요. 배우의 본능일까요, 연습의 결과일까요?
유해진: 이게 호흡의 문제인데,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까딱하면 안 통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머릿속으로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고… 찾으려고 고민하는 시간이 꽤 돼요. 또 제가 제 연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잖아요? 외부의 시선으로 생각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죠. 다행히 부족한 건 편집이 도와줘요. 온전히 저의 능력이 아닌 거죠.

Q. 이전에 ‘타짜’를 함께 한 최동훈 감독님이 “편집실에서 가장 난감한 배우는 유해진”이라고 말한 기억이 나요.(웃음)
유해진: 하하. 그때는 더 그랬을 것 같아요. 편집 포인트를 생각 안 하고 연기만 했거든요. 편집할 때, 아마 많이 속상하셨을 거예요.

Q. 아… 최동훈 감독님은 ‘유해진이 연기한 씬이 아까워서 자르기 아깝다’는 의미의 말씀이셨어요. 긍정적으로.
유해진: 아~ 그래요? 으하하하하

Q. 칭찬에 약하시네요.
유해진: 제가 좀…(웃음)
유해진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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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베테랑’의 최상무가 욕망의 노예라면, ‘소수의견’ 대석은 정의감을 잊은 채 이혼전문변호사로 살아가다가 법이 외면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정의의 편에 서는 인물입니다. 반면 ‘극비수사’ 김중산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인물이고요. 유해진의 소신이랄까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가요.
유해진: 요즘 가장 고민되는 지점이기도 한데요, ‘잘 살자’에요. 왜 지방에 가면 로터리 같은 곳에 ‘바르게 살자!’ 표어가 적힌 현수막들이 있잖아요? 이전에는 ‘참 유치하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젠 ‘결코 유치한 말이 아니구나. 정말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구나’ 해요. 그런 생각을 할 나이인 거죠. 생각한다고 해서 실천이 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저의 소신이 뭐냐고 묻는다면 ‘잘 살도록 노력하자’입니다.

Q. ‘잘 살자…’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려운 문제 같아요.
유해진: 그렇죠. 근래 들어 부쩍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네요. 사실…(깊은 한숨) 어떨 때는 재미가 더럽게 없고 그래요. 물론 일적으로는 복을 많이 받아서 너무 감사한 시점이에요. 영화도 많이 사랑 받았고, ‘삼시세끼’도 뜻밖에 너무 잘 됐죠. 그런데 일 말고, 인간 유해진의 삶을 생각하면 갑갑할 때가 많아요. 유해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우울한 건지, 잘 흘러가고 있는 건지…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Q. 배우 유해진과 인간 유해진을 엄격해서 분리해서 바라보는 편인가 봐요.
유해진: 그런 편이에요. 또래 친구들은 가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부분에서 저는 또 이뤄놓은 게 없고. 그래서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Q. 외로울 땐, 뭐 하세요?
유해진: 산에 가거나, 술 마시거나.(웃음) 요즘은 술은 좀 많이 먹는 것 같아요. 또 마시니까 그만큼 에너지를 빼려고 산에 가고요. 하하.

Q. 안 그래도 등산을 자주 가시던데, 바다 보다 산이 더 좋은 건가요?
유해진: 네. 산이 더 좋아요. 바다는…제가 수영을 못하기도 하고요.

Q. 산을 오르면서 생각을 채우는 편인가요, 비우는 편인가요?
유해진: 올라갈 때는 비우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너무 힘드니까. 내려올 때는…내려올 때도 비우는 건 마찬가지네요. 작품에 대한 생각에 집중할 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비우는 편이에요.
유해진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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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주위에서 흔히 “유해진은 인간적인 배우다”라는 말을 많이 해요. 많이 들으셨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런 말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나요?
유해진: ‘정말 그런가?’ 저를 돌이켜보게 되죠. ‘정말 내가 그런 거니?’ ‘남들이 얘기 하듯이 그렇게 살고 있니?’ 그러니까 그게 요즘 ‘잘 살고 있냐’ 스스로에게 질문 하고 있는 것 중 하나에요. 이 물음은 오래 갈 것 같아요. 물론 삶에 대한 고민은 30대에도 없지 않았어요. 차이라면 깊이겠죠. 30대에 ‘잘 살고 있냐’고 자문하는 것과, 지금 나이에 ‘잘 살고 있냐’고 묻는 건 ‘깊이에 큰 차이’가 있어요. 같은 질문이지만 조금 더 깊이가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Q. 20대엔 어떠셨나요? 서울예대 시절엔 올 A 성적표를 받을 정도로 모든 것에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던 걸로 알아요. 졸업 때 ‘예술의 빛’(예술적 창의력이 높은 학생에게 주어지는 상)도 수상하셨죠?
유해진: 대학 때는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제가 서울예대에 늦게 들어갔어요. 27-28살에 들어갔으니까. 학교를 친척집에서 다녔는데, 나이 먹고서 어디에 신세를 진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일찍 나와서 무조건 도서관에 갔어요. 학교 밥이 싸기도 했고.(웃음) 그러면서 한 글자라도 더 읽게 됐던 것 같아요. (배우) 신구 선생님(연극과 동문)이 주시는 ‘신구장학금’도 받으면 살았죠.

Q. 학교에 늦게 들어간 만큼 동생들이 많았을 텐데, 리더십 있는 형이셨나요?
유해진: 아니요. 저는 리더십이 있는 스타일은 아니에요.(웃음) 왜 어딜 가면 ‘가장자리’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죠? 제가 그래요.

Q. 그런 분이 작품에서는 어쩜 그렇게.(웃음)
유해진: 하하. 일과 생활은 분리해야죠.

Q. 졸업 후 들어간 극단 목화 생활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유해진: 그때도 열정이 넘쳤죠. 당시 목화 배우들은 작품에 쓰이는 소품을 직접 만들어 썼어요. 제가 ‘삼시세끼’에서 여러 소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게, 모두 그 바탕인 거죠. 필요하면 뭐든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Q. 목화 오태석 선생님은 ‘무대는 달궈진 프라이팬’이라는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유해진에겐 무대가 뭔가요?
유해진: 저에게도 마찬가지에요. 그 말씀이 저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줬어요. 무대에 서기 전에 항상 “끝까지 자신을 의심하라”고 얘기해 주셨거든요. 제가 현장에서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어요. 생각해보면 그 말씀 때문에 생긴 버릇 같아요. 현장을 가면 뺑뺑 돌아다녀요. 혼자 거닐면서 대사도 외우고, 뭔가를 찾으려고 해요. 저만의 방법인 거죠. 집중도 되고 좋아요. 다만 사람들이 저를 찾으러 다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죠(웃음)
유해진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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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미술·음악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세요.
유해진: 대신 저는 굉장히 얕아요. 그냥 열어둘 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맞은데, 그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어요.

Q. 정서라 함은요?
유해진: 가령 ‘극비수사’에 보면 김중산이 흰 러닝셔츠만 입은 채 아이들과 함께 모기장에서 자는 모습이 나와요.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좋아요. 코피가 나는 아이를 데리고 이비인후과에 달려갔다가 가족들과 함께 비를 바라보는 장면도 너무 좋고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유독 그렇게 남는 씬들이 있어요. 그럴 때는 감독님께 “다른 건 몰라도 이 씬은 넣어주시면 안 돼요?”라고 물어봐요.

Q. 음악은, 어떤 정서의 곡들을 좋아하나요?
유해진: 음악은 굉장히 다양하게 들어요. 저는 일어나면 라디오부터 켜는 사람인데, 요즘에는 씨야부터 콜드플레이까지 가리지 않고 듣고 있어요. 그래서 ‘배철수 음악캠프’를 좋아해요. 다양하게 들을 수 있으니까요.

Q. 이야기가 좋아서 라디오를 듣는 건가요, 음악이 좋아서 라디오를 듣는 건가요?
유해진: 둘 다요. 좋은 이야기와 좋은 음악이 있는 게 ‘배철수의 음악캠프’ 같아요.

Q. 기승전 ‘배철수의 음악캠프’네요.(웃음) ‘삼시세끼 만재도’ 시즌2를 비롯해 여러 작품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쉬지 않고 달리는 원동력은 뭔가요.
유해진: 얼마 전에 영화 ‘위플래쉬’를 봤어요. 남자 주인공을 보며 나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나도 저런 열정을 갖고 살았을 때가 있었는데…’ 괜히 뜨끔했어요. 끊임없이 그런 자극들을 받는데, 중요한 건 무뎌지지 않는 것 같아요. 자극에 무뎌지지 않으려고 해요.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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