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를 시작하려면 이름이 필요했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명동 맥도날드에서 밴드 이름을 작명하는 회의를 했다. 다양한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무슨 법칙 같은 것이면 재밌겠다.’는 박준철의 의견에 모두 공감했다. 특히 일본 로봇만화를 좋아하는 조동원과 류준은 파블로프(PAVLOV)의 영문 스펠링에 ‘V’가 두 번이나 들어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성급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유명한 미국밴드 Pavlov’s Dog도 있고 한국적인 록음악을 하는 밴드로는 너무 이국적인 이름이니까요. 이름을 바꾸기엔 늦었지만 덕분에 러시아 팬도 생겼으니 결혼생활처럼 그냥 도장 찍고 산다는 기분입니다.”(박준철)

2007년 서울예고 밴드부 ‘타락’ 8기를 주축으로 한 밴드 파블로프는 잼 합주실에서 주관한 공연을 비롯해 몇 차례 공연을 했다. 인터넷에 올린 공연영상을 보고 클럽 FF 매니저 에디가 연락해 클럽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함께 무대에 올랐던 폰부스, 핑크앨리펀트, 킥스카치, 서교그룹사운드는 지금도 형제 밴드처럼 살갑게 지낸다. 2008년 1월, 처음으로 멤버 전원이 함께 일본으로 일주일동안 친목도모 여행을 떠났다. 동경의 시모 기타자와 지역에 있는 클럽 쉘터, 헬스키친에서 일본 밴드들의 공연을 보며 견문을 넓혔다.



파블로프는 함께 즐겁게 연습을 하면서 곡을 만드는 스타일이다. 첫 창작곡은 ‘알렉산더’. “오도함은 하고 싶은 말을 막 하다보면 가사가 되고 노래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보다 굉장히 즉흥적이었던 오도함은 무대를 난장판을 만들어 놓기도 했어요.(웃음) 그러니까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다가 무대에서 떨어지고 드럼에 부딪히고 노래하다 마이크를 떨어뜨려 고장 내기도 했지요.”(박준철)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에서도 조금씩 밴드의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2008년 돌연 드럼 조동원이 군 입대를 선언해 멤버들은 멘붕에 빠졌다. 그때 클럽 빵 김영등대표의 ‘군에 가기 전에 뭐라도 해놔야 한다.’는 충고에 공연에서 선보였던 자작곡 5곡을 추려 데뷔 EP제작에 들어갔다.


조동원은 드럼 녹음만 끝내고 가장 먼저 입대했다. “녹음작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을 했으니 초보자의 행운이었죠. 녹음 스튜디오 세븐의 김현승님의 도움으로 음반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박준철) 속전속결로 진행된 파블로프의 데뷔 EP <반드시 크게 들을 것>는 예상외로 인디씬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EP발매기념 공연을 포함해 조동원을 대신 드럼을 연주해 줄 객원멤버가 필요했다. 검정치마에서 활동 중이던 정경용을 섭외했다. 그 과정에서 기타가 공석이었던 검정치마와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류준은 검정치마에서 군 입대 전까지 친형 류영과 함께 반년동안 활동을 병행했지만 앨범에는 참여하지는 않았다. “당시 조휴일형에게 코드도 몇 개 배우고 편곡이나 실제 공연에서 다른 사람의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되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류준) 모든 멤버들이 군 문제로 긴 공백기를 가졌다. 돌아오니 루비살롱은 예전과 같지 않았고 검정치마, 국카스텐은 유명밴드가 되어있었다. 몇몇 레이블에서 영입제의가 들어왔다. 지금의 소속사 러브락컴퍼니를 선택한 것은 밴드 활동 외에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기 때문.



베이스 박준철은 4인조 블루스 밴드 ‘악어들’에서 1년 정도 활동을 병행했다. 유앤미블루 멤버였던 방준석의 작업실에서 녹음을 했지만 멤버들의 군 입대로 앨범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리드기타 류준도 파블로프의 1집 믹싱을 도와준 밴드 온달의 리드보컬 이호진과 함께 활동을 병행했다. 드럼 조동원은 밴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클럽공연에서 번 돈을 한 곳에서 모으는 밴드 계좌를 만들었다. “아무도 음악 말고 밴드 운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라 뭔가 체계적으로 밴드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조동원)



데모들을 토대로 지원을 받아 정규 1집을 제작하려 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앨범 제작비를 벌기 위해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참가했다. 전부 미역국을 먹었다. 결국 회사에서 순수투자를 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때 같은 소속사 선배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가 케이블 MNET ‘밴드의 시대’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경사가 났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수상한 다음 날 불미스런 일에 휘말렸다. 파블로프의 앨범 제작비는 고스란히 변호비용으로 사용 되며 녹음작업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봉착했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셀프 레코딩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블로프의 정규1집 ‘26’은 2014년 5월에 세상에 나왔다. 한국의 고전 밴드사운드에서 지향해온 원초적인 그루브를 연구하는 음악적 방향을 잡아 6년 만에 발표한 컴백앨범이다. 이번 앨범은 멜로디의 아쉬움이 있지만 낭만과 원초적 욕망으로 가득한 젊은 패기를 담았다. “이번에는 시간을 들여 정성을 쏟아 만들었습니다. 지난달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첫 정규앨범을 드렸더니 당신이 아끼시던 앰프에 예열까지 해가며 끝까지 들으신 후 ‘기타를 참 잘 친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뭉클했습니다.”(류준)



정규앨범 발표 후, 파블로프는 헬로루키, 댄스 디스커버리에 뽑혔고 앨범도 반응이 좋아 동력을 받고 있다. 밴드의 시작은 아마추어적인 마인드였지만 1집 이후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진화하고 있다. “처음엔 각자 전공이 있으니 취미 정도로 음악을 생각했는데 오래하기 위해선 음악을 잘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족스러운 첫 정규앨범이 나왔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음악적으로도 발전하고 <30>,<46>,<58> 같이 계속해서 앨범을 발표하는 롱런 밴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오도함) 데뷔 초기부터 파블로프는 열심히 연습하는 밴드는 아니지만 함께 해 온 오랜 세월의 이끼는 기막힌 밴드 합의 원초적 동력이 되었다. 파블로프에게 변하지 않은 것은 결성 초기부터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우리의 목표는 오랫동안 친구들끼리 함께 밴드를 하는 것’이라는 초심이다.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러브락컴퍼니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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