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에서 이어짐) 파블로프의 리드보컬 오도함은 통통 튀는 끼로 무장한 보컬리스트다. 그는 월간 미술잡지 ‘아트인컬쳐’에 누드 화보사진을 찍고 무대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퍼포먼스를 일삼는다. 그래서 지인들은 그를 ‘똘끼’가 넘치는 ‘돌 아이’로 여긴다. 자유연애주의자인 오도함의 그 같은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얼마 전 CBS ‘라디오3.0 남궁연입니다’에 출연한 그는 고급스런 언어와 논리 정연한 언변을 구사해 스마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념촬영 때는 수술을 해 얼굴 공개를 꺼렸던 선배 남궁연을 배려해 함께 뒤로 돌아 안경을 거꾸로 작용했던 퍼포먼스는 기발했다. DJ 남궁연은 “중심이 없는 돌 아이는 무지 싫어하는데 중심이 있는 돌 아이는 매력적인 것 같다”고 호감을 표했었다.



오도함의 사진자료에서 1994년 대천해수욕장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하곤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딱 20년이 흐른 2014년에 밴드의 피쳐사진을 촬영하러 같은 장소에 갔기 때문이다. 슬픈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오도함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알지 못하는 슬픈 사연이 있다. 어릴 때부터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인숙(여인숙)이라 했다’고 한다.

오도함 1994년 대천해수욕장에서

그의 집안은 큰아버지가 강원도 산 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히피였을 정도로 끼가 많았다. 전북 익산에서 권투선수와 선원생활을 했던 한량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거 중에 그를 임신했다. 생계를 위해 무작정 상경해 영등포의 기타 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강남구 세곡동 야산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살았다. 오도함은 2살 터울의 남동생과 함께 그곳에서 1987년 4월 3일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개천에서 올챙이를 잡으며 놀았죠.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빠 동네 가게간판을 보면서 혼자 한글을 배웠습니다.”(오도함)



금천구 독산동 우시장에 정착한 그의 집안은 형편이 호전되어 부모님은 뒤늦게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의 한량 끼와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구성지게 불렀던 어머니의 DNA를 물려받은 오도함은 자신을 돌봐준 고모와 성인 TV프로 ‘가요무대’를 즐겨본 특이한 아이였다. 남성듀엣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는 어린 그를 침대위에서 박자에 맞춰 춤을 추게 만들었다. 어느 날, 부모님 직장의 회식이 열린 국빈관에 따라갔다. 무대에 등장한 러시안 무희가 옷을 벗으며 춤을 추자 어린 오도함이 흥에 겨워 함께 춤을 춰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7살 때 유치원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함께 살았던 서울시립대 미대를 다녔던 사촌누나는 늘 그에게 칭찬을 해주어 그림에 매진하게 했다. 독산동 두산초등학교에 들어간 그림을 잘 그린 오도함은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당시 게임기 ‘슈퍼 알라딘 보이’에서 건스타 히어로즈와 베어너클3를 플레이했을 때 BGM으로 흘러나왔던 음악들은 그를 매료시켰다. 어느 날, 걸그룹 베이비 복스의 ‘야야야’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니가 보고 싶어’ 부분에서 기쁨과 슬픔의 공존함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 운동권 선생님이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해석하고 부르게 했는데 노래가 너무나 슬프더군요. 부모님 친구 집들이에서 어른들이 젓가락을 두들기며 윤수일의 ‘아파트’를 신나게 부르셨는데 역시나 슬픈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신문에서 식물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면 잘 자란다는 기사를 읽고 밤새 모차르트 곡을 오토리버스로 틀어놓았는데 흙더미에서 새싹이 올라 올 때의 감동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오도함)



가산중학에 진학해 ‘우주소년 꼬망’, ‘크레용 신짱’ 같은 일본만화를 보고 만화그리기에 빠져들었다. 중2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만화를 금지하는 청소년보호법에 반대하는 단체에 가입해 사전심의를 없애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중2때 만화그리기를 배우기 위해 들어간 미술학원 원장의 권유로 서울예고 미술과에 진학했다. 공부를 잘했던 친구 김종수는 가요보다는 어게인스트 더 머신 (Rage Against The Machine)과 스매슁 펌킨즈 같은 메탈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을 통해 친해진 그 친구와 야릇한 기운이 흘러 어색해져 멀어졌어요. 그 후, 인터넷 방송에서 접한 팻 맨시니, 에이펙스 트윈의 노래가 너무 좋아 진행자로부터 흑인음악전문 잡지 MDM을 추천받아 음악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오도함)



가정형편이 나아진 오도함은 마음껏 원하는 CD를 구입해 음악을 들었다. “당시 재킷만 보고 앨범을 골랐어요. 지금도 재킷은 그 음반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오도함) 중학교 만화부 선배들이 첫사랑에 실패한 그를 위해 합주실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그때까지 음악은 스피커에서 알아서 흘러나온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들었던 드럼소리는 소리가 컸을 뿐인데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와 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를 모성애적으로 사랑해준 서울예고 동창 조여진은 구세주였다. 발칙한 상상한 유발시키는 1집 첫 트랙 ‘한껏 조여진’은 그에겐 인생의 노래인 셈이다.

밴드부 보컬 오디션에서 탈락해 악기를 배우려 했지만 지루한 연습과정을 인내하기 힘들어 포기했다. ‘목청이 우렁차다’는 이유로 밴드부 친구들이 불러주어 함께 연습을 했다. 지금의 파블로프 멤버들이다. 처음에 그는 소리를 빽빽 지를 수 있는 메가데스, 콘 같은 시끄럽고 헤비한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국민대 서양화과에 진학한 그는 친구들과 밴드 파블로프를 결성했다. “여성과 음악은 알아갈 수록 마치 알몸처럼 신비로운 것 같아요. 아직도 노래는 잘 부르지 못하지만 앞으로 듣기가 좋은 노래를 많이 불러보고 싶습니다.”(오도함) (PART4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사진제공. 오도함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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