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유일한 인물 노아(러셀 크로우)는 대홍수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거대한 방주를 짓기 시작한다. 방주에 탈 수 있는 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의 암수 한 쌍과 노아의 가족들 뿐. 물론 방주를 짓기까지 여러 역경과 고난이 따른다. 영화 ‘노아’다. 텐아시아 영화 기자 두 명이 각자 다른 시선으로 ‘노아’를 살폈다. 15세 관람가, 20일 개봉.

정시우 : 세상의 평가 앞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도 능력이다 관람지수 ∥ 8
황성운 : 재난 블록버스터가 맞긴 한데…. ∥ 관람지수 6

유년 시절 ‘Super 8mm’라는 코닥 카메라로 영화를 찍으며 감독에 대한 꿈을 키운 J.J. 에이브럼스는 영화 ‘슈퍼 에이트’에 자전적 경험을 한껏 녹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쉰들러 리스트’에 투영했다. 절실한 가톨릭 신자인 멜 깁슨에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영화라기보다 절절한 신앙고백이었다. 어떤 감독들에게 어떤 영화는 감독 자신의 인증으로 남는다. 13살의 나이에 노아에 대한 시를 써서 상을 받은 다소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대런 아로노프스키에게는 아마 이 영화 ‘노아’가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노아’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와 방주 이야기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노아’의 뿌리는 또 하나 있다. 오래전부터 노아라는 인물에 매료됐던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벨기에 만화 전문출판사 ‘르 롱바르드’를 통해 2011년 판타지 그래픽노블 ‘노아’를 출간했는데, 영화는 이 그래픽노블을 스토리보드 삼아 움직인다. 노아의 방주 건설을 돕는 타락천사들과 신비한 능력을 지닌 현자로 묘사된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앤서니 홉킨스) 등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성경과는 많은 부분 동떨어진 판타지로 재창조됐다.

영화는 크게 전후반으로 나뉜다. 방주를 성공적으로 띄우기까지의 우여곡절이 전반부, 방주에 살아남은 노아 가족들이 일으키는 반목이 후반부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장르도, 분위기도, 목표하는 바도 완연히 다르다. 전반부가 스펙터클이라면, 후반부는 심리극이다. 전반부가 블록버스터에 처음 도전하는 감독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나가는 과정이라면 후반부는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다. ‘파이’ ‘레퀴엠’ ‘레슬러’ ‘블랙스완’ 등에서 확인한 바 있는 아로노프스키의 예술적 야심이 1억 3,000만 달러의 물량과 만나면서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형태의 결과물을 낳았다.

일단 전반부 목표는 많은 이들이 합격점을 줄만큼 인상적으로 완수됐다. 창세기의 경이로움에 대한 묘사들이 뛰어난 상상력으로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인류의 멸망과 재생이라는 모티브에 걸맞게 재난의 규모도 강렬하게 묘사됐다. 특히 노아의 방주로 몰려드는 동물 떼, 배에 오르기 위해 개미떼처럼 몰려두는 군중, 어마어마한 느낌의 대홍수 등 ‘노아’의 환상적인 비주얼들은 앞으로 나올 노아의 방주 모티브 영화들의 하나의 높은 기준이 될 정도로 입이 딱 벌어진다. 다소 이물감이 느껴지는 ‘감시자들(타락천사)’의 모습(‘트랜스포머’ 속 악당을 연상시킨다)도 블록버스터 영역 안에서 바라 봤을 땐,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상당히 흥미롭다.

반면 후반부는 완성도를 떠나, 호불호를 안길 자극적인 설정들이 넘쳐난다. 대홍수가 집어 삼킨 것은 세상만이 아니다. 홍수는 노아의 영혼마저 잠식한다. 살육과 학살 끝에 방주를 지켜낸 후 노아는 창조주의 뜻을 실현하는 대리인에서 내적 고뇌에 휩싸이는 햄릿형 인간으로 변모한다. 인류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 즉 세상에 남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노아의 행동은 가족들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향한 감독의 집요하리만큼 끈질긴 해석은 블록버스터를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로부터 ‘티켓 값을 환불해 달라’는 불만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누군가에겐 흥미로운 해석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강박증과 편집증과 과대망상이 뒤얽힌 요란한 소동으로 보일 수 있다. 아버지를 광신도로 여기며 돌발행동을 하는 둘째 아들(로건 레먼)의 심리상태도 설득력을 얻기엔 다소 엉성하다. 가도 너무 가는 인물들의 행동이 짜증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노아’의 대중성에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그만큼 감독이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과 광기를 시각적으로 잘 구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이건,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장기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건, 대런 아로노프스의 실패작일까. 관객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 자신에게는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아’가 인상적은 것은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스튜디오의 간섭이나, 평단의 평가 앞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감독임을 ‘확인사살’ 시킨다는 것이다. 지금의 ‘노아’는 스튜디오의 재편집 요구에 한 거장 감독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얻어낸 고집스러운 결과물이다. 지나친 자신감 아니냐고? 그러면 또 어떠한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오랜 시간, 자기 안에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인간과 신에 대한 물음을 온전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구현했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재능이 결코 아니다.

2eyes, ‘노아’ 블록버스터로 알았는데 > 이건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자기도취일까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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